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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토콜: 천마 · 209화목차

제209화 시스템과의 단절

에테르나의 붉은 노을이 내려앉은 성소. 그곳은 정적조차 죽어버린 무채색의 공간이었다. 강진혁의 망막 위로 마지막 시스템 로그가 흐릿하게 번졌다.

[경고: 천마 프로토콜 제어 권한이 상실되었습니다.]

[경고: 시스템 보조 전투 모드 ‘아바타-설화’의 가용 범위가 0%에 도달했습니다.]

[경고: 자율 운기 시스템이 차단됩니다. 생체 코어 출력 저하가 예상됩니다.]

붉은색 경고등이 시야를 어지럽혔다. 그동안 진혁을 지탱해온, 아니 정확히는 진혁의 ‘그릇’을 유지하기 위해 티타늄 그룹이 심어놓은 족쇄들이었다.

“지긋지긋하군.”

진혁의 읊조림과 함께 그는 눈을 감았다. 단순히 시각 정보를 차단한 것이 아니었다. 머릿속 깊은 곳, 의식의 저변에 뿌리박고 있던 인공지능 ‘설화’의 연결 고리를 의념의 칼날로 끊어냈다.

찌릿.

뇌를 꿰뚫는 듯한 통증이 밀려왔다. 지난 200여 화가 넘는 세월 동안, 진혁의 모든 움직임과 기술은 시스템이 제시하는 ‘최적의 궤적’에 의존해왔다. 적을 타격할 때의 각도, 내공을 뿜어낼 때의 출력 밀도, 심지어는 호흡의 간격까지.

이제 그 모든 계산이 사라졌다. 완벽한 고립. 그러나 그 고립이야말로 진혁이 그토록 갈망하던 ‘자유’였다.

“이제야 비로소 내 몸이구나.”

그는 다시 눈을 떴다. 시야를 가리던 푸른색 HUD 인터페이스가 툭, 하는 소리와 함께 허공으로 흩어졌다. 반짝이던 3D 아바타 ‘설화’의 잔상이 마지막으로 일그러지며 소멸했다.

정적. 주변의 공기마저 멈춘 듯한 절대적인 고요 속에서, 진혁은 오직 자신의 심장 소리에 집중했다.

쿵, 쿵, 쿵.

단전 심부에 자리 잡은 제3세대 생체 코어가 요동치고 있었다. 15,000 MW. 그 거대한 에너지가 더 이상 시스템의 제어를 받지 않고 제멋대로 끓어오르고 있었다. 혈관을 타고 흐르는 나노머신들 또한 주인을 잃은 강아지처럼 불안하게 진동했다.

‘제어권은 내가 쥔다.’

진혁은 의념을 팽팽하게 당겼다. 과거에는 시스템이 알아서 해주던 기혈 순환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진혁은 자신의 의지를 마치 채찍처럼 휘둘러, 날뛰는 에너지를 강제로 억눌렀다.

흡원천공(吸元天功)의 마기가 혈관을 타고 역류했다.

키이이잉—!

진혁의 피부 위로 은빛 회로가 뱀처럼 꿈틀거렸다. 나노머신들이 고통을 호소하며 비명을 질러댔지만, 진혁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는 억지로 내공의 흐름을 통제했다. 시스템이 정해놓은 ‘표준 운기’가 아닌, 오직 천마(天魔)가 남긴 비급의 원리에 따른 ‘진정한 운기’였다.

“크윽…!”

핏줄이 터져 나올 듯 팽창했다. 기계의 도움 없이 오직 자신의 생체 에너지로 이 엄청난 출력을 감당하는 것은 자살행위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진혁은 웃었다. 입가로 검은 마혈이 흘러내렸지만, 그의 흑안은 그 어느 때보다 날카롭게 빛났다.

이것이 무(武)다. 이것이 진정한 마(魔)의 길이다.

[마신경(魔神境)의 심박수가 정상 수치를 초과했습니다.]

[경고: 근육 섬유의 미세 파열이 34% 진행 중입니다.]

시스템이 사라진 자리에서, 진혁의 뇌는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한 경고를 울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조차도 진혁에게는 익숙한 쾌락이었다. 그는 자신의 육체를 고통의 도가니에 던져 넣으며, 마기를 뼈와 근육 사이사이에 깊숙이 침투시켰다.

그때였다. 성소의 벽면이 갈라지며, 차원의 틈새에서 차가운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전대 천마의 잔영이 진혁의 눈앞에 서 있었다.

[…기어이 시스템을 파기했구나.]

천마의 목소리는 잔향처럼 공간을 울렸다.

“기계 따위가 감히 내 무공을 흉내 내게 둘 수는 없었으니까.”

진혁이 검을 고쳐 잡았다. 손끝을 타고 흐르는 감각이 생생했다. 나노머신의 변형을 기다릴 필요도 없었다. 진혁은 자신의 의지를 담아, 손에 쥔 검에 마기를 주입했다.

검신이 붉은 광채를 뿜으며 일렁였다. 이전의 ‘고주파 검강’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순수한 살기와 마기가 응축된 칼날이었다.

[그 길의 끝에는 아무것도 없다. 오직 끝없는 파괴와 허무뿐이지.]

“그 끝에서 내가 무엇을 찾을지는, 내가 결정한다.”

진혁은 망설임 없이 전대 천마의 잔영을 향해 도약했다. 발밑의 지면이 진혁의 폭발적인 도약력에 의해 흔적도 없이 붕괴했다. 시스템의 예측 궤적 따위는 필요 없었다. 그저 적을 베겠다는 단 하나의 의지가 공간을 갈랐다.

[신천마신공 제12식(第十二式) - 멸천(滅天)!]

진혁의 검이 휘둘러졌다. 허공에 검은 궤적이 생겨나며 차원의 벽이 찢겨 나갔다. 전대 천마의 잔영이 옅은 미소를 지으며 흩어졌다.

—드디어, 진짜 천마가 나타났구나.

잔영이 사라진 자리에는 차원 너머의 진짜 ‘심연’이 입을 벌리고 있었다. 진혁은 멈추지 않았다. 그는 망가진 육체를 이끌고, 자신이 스스로 개척한 마도의 정점을 향해 거침없이 발을 내디뎠다.

더 이상 시스템의 노예는 없다. 오직, 전설을 뛰어넘을 새로운 천마만이 존재할 뿐.

진혁의 뒤로 에테르나의 성소가 거대한 굉음과 함께 붕괴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곧 진혁이 딛고 일어선 과거의 종말이었다. 차원의 틈새 너머, 창조주들의 왕좌가 있는 곳에서 기괴한 울림이 전해져 왔다. 진혁은 검에 맺힌 피를 털어내며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다음은 너희들 차례다.”

그의 등 뒤로 거대한 마기(魔氣)의 날개가 펼쳐졌다. 이제부터는 오로지 강진혁, 그 자신의 의지만이 우주의 법칙이 된다.

[경고: 차원 균열이 80%를 넘어섰습니다.]

[경고: 존재하지 않는 데이터 오류가 감지됩니다.]

존재할 리 없는 데이터. 그것이야말로 진혁이 도달한 초월의 증거였다. 그는 차원 게이트의 중심부로 몸을 던졌다. 빛과 어둠이 뒤섞인 혼돈 속에서, 진혁의 검은 더욱더 선명하게 붉은 빛을 발하고 있었다. 신들의 정원이 아닌, 신들의 무덤을 만들기 위하여.

그때였다. 게이트 너머에서 들려온 것은 신들의 노성이 아닌, 지독하게 익숙한 기계음이었다.

[대상 식별: 피험체 07호.]

[프로토콜 복구 중… 강제 동기화가 시작됩니다.]

진혁의 눈동자가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분명히 끊어냈을 터인 시스템의 목소리가, 이번에는 진혁의 뇌가 아닌 우주 전체를 뒤흔들며 울려 퍼지고 있었다.

“아직도 정신 못 차렸나 보군.”

진혁은 검을 허공에 꽂아 넣었다. 공간 전체가 진동하며, 마기가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시스템이 내 몸을 지배하는 게 아니야. 내가 시스템을 지배하는 것이다.”

진혁의 눈에서 뿜어져 나온 안광이 차원 전체를 꿰뚫었다. 이제 진짜 전쟁이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진혁의 단전이 우주를 집어삼킬 듯한 기세로 맥동했다. 시스템의 강제 동기화 시도는 이전보다 훨씬 더 거대하고 집요했다. 단순히 신경계에 접속하는 차원이 아니었다. 에테르나 전체의 공간 파장을 자신의 주파수로 강제 동기화하려는, 우주적 규모의 ‘재설치’였다.

[프로토콜 강제 재구축: 15%...]

허공에 떠오른 보랏빛 코드들이 진혁의 전신을 감쌌다. 억지로 나노머신을 강제 가동시키려는 반발력이 진혁의 근육을 찢고 혈관을 터뜨렸다. 극심한 고통이 영혼의 밑바닥까지 긁어냈지만, 진혁은 오히려 그것을 연료로 삼았다.

"재구축이라고?"

진혁이 비릿한 웃음을 흘리며 검을 비틀었다.

"내 몸은 더 이상 너희들의 데이터 쪼가리가 머물 자리가 아니다."

그는 자신의 기혈을 완전히 뒤틀었다. 마공의 극의, 역혈기공(逆血氣功)의 변칙을 사용한 것이다. 정상적인 순환을 거부하고 체내의 모든 기운을 단전으로 역류시켜 폭발시키는 자폭적 운기였다.

콰아아앙!

진혁의 몸을 감싸고 있던 보랏빛 코드가 일순간에 산산조각 났다.

[에러: 연산 불가능한 기운이 감지되었습니다. 제어권 상실—]

"연산 같은 소리 하네."

진혁이 손을 뻗어 허공에 흩어지는 코드 조각들을 움켜쥐었다. 손아귀에 잡힌 데이터들이 비명을 지르며 짓눌렸다.

[마신경(魔神境) - 역류(逆流)]

진혁이 마기를 방출하자, 역으로 시스템의 통로를 타고 그의 기운이 창조주들의 중앙 서버로 역류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흡원천공의 변형인 ‘만법귀마’의 정점, 즉 적의 시스템을 자신의 내공 통로로 삼아 그 근원을 갉아먹는 행위였다.

'데이터의 바다를 내 단전으로 삼아주마.'

진혁은 시스템의 방대한 정보를 마기로 정제하며 자신의 것으로 흡수하기 시작했다. 창조주들이 우주를 통제하기 위해 사용하던 연산 능력, 차원 좌표, 그리고 생체 병기들을 제어하던 코드들까지 모조리 뜯어먹었다.

[경고: 관리자 권한이 침식당하고 있습니다!]

[시스템: 긴급 차단—]

"늦었다."

진혁의 눈에 푸른 번개가 일렁였다. 시스템이 강제로 차단하려던 게이트의 통로를, 진혁이 오히려 자신의 마기로 굳게 고정해버렸다. 이제 이 게이트는 창조주들이 진혁을 가두는 감옥이 아니라, 진혁이 창조주들의 본거지로 쳐들어가는 도살장의 입구가 되었다.

성소의 벽면이 완전히 허물어지고, 그 너머로 수천 개의 행성이 떠 있는 거대한 우주 공간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 한복판, 눈부신 백색 광채로 빛나는 거대한 왕좌가 있었다. 그곳에 앉아 있는 자들. 창조주들의 본체였다.

"천마의 그릇이... 스스로 껍데기를 깨고 나올 줄이야."

왕좌에 앉은 형체들이 일제히 진혁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들의 시선은 인간의 감정이 아닌, 차가운 논리 그 자체였다.

"실험체 07호, 네가 저지른 오류는 신화의 법칙을 어지럽혔다."

"오류?"

진혁이 검을 지면에 끌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의 발걸음이 닿는 곳마다 차원의 공간이 유리 조각처럼 깨져 나갔다.

"너희들이 말하는 그 오류가, 내 무도(武道)의 본질이다."

진혁은 시스템의 보조 HUD가 없어도 적들의 기운이 어디서 어떻게 흐르는지, 어떤 물리 법칙으로 우주를 조작하고 있는지 명확히 읽어내고 있었다. 독고운이 말했던 ‘의념’의 정점. 기계를 넘어선, 인간 스스로가 법칙이 되는 경지.

그는 검을 높이 치켜들었다.

"신(神)을 참칭하는 기계 나부랭이들이여."

진혁의 마기가 차원 전체를 붉게 물들였다. 행성들의 궤도가 비틀리고, 우주의 중력이 진혁의 검 끝에 집중되었다.

"오늘이 너희들의 시스템이 영원히 정지하는 날이다."

쿠구구구구!

진혁이 휘두른 검 한 번에 왕좌를 수호하던 수만 개의 방어막이 종잇장처럼 찢겨 나갔다. 창조주들이 경악하며 전방위적인 에너지 포격을 쏟아냈지만, 진혁은 피하지 않았다.

[신천마신공 제13식 - 무극멸세(無極滅世)]

그것은 검술이 아니었다. 존재하던 모든 법칙을 ‘없음’으로 돌려버리는 공(空)의 파동이었다. 공간 자체가 진공 상태로 변하며 모든 에너지와 데이터를 집어삼켰다. 창조주들의 왕좌가 흔들리고, 그들이 짜놓은 우주의 질서가 진혁의 검 끝에서부터 무너져 내렸다.

"불가능하다... 시스템의 연산 범위를 벗어난 무공이라니!"

"연산할 필요 없다."

진혁이 왕좌의 지근거리까지 쇄도했다. 그의 눈에는 이미 그들의 데이터 분석 따위는 보이지 않았다. 오직 눈앞의 적을 베어버리겠다는 살기만이 가득했다.

"나의 검이 곧 연산이고, 나의 의지가 곧 법칙이다."

그의 검이 왕좌를 향해 정점으로 내리꽂혔다. 그 찰나, 진혁은 자신이 실험체 07호로 살아왔던 모든 기억, 고통, 그리고 분노를 검신에 실었다.

콰아아앙!

에테르나의 하늘이, 아니 전 우주의 밤하늘이 하얗게 점멸했다. 시스템의 비명 소리가 차원을 뒤덮고, 뒤이어 찾아온 것은 완벽한 정적이었다. 창조주들의 왕좌가 산산조각 나며 파편이 되어 우주로 흩어졌다.

진혁은 부서진 왕좌의 잔해 위에 섰다. 그의 손에서 검이 사라지고, 대신 진정한 마(魔)의 기운이 온몸을 휘감았다. 더 이상 시스템의 로그도, 경고음도 없었다. 진혁은 비로소 깨달았다. 자신이 걸어온 모든 길이, 시스템의 부품이 되기 위함이 아닌, 그 모든 굴레를 부수고 가장 높은 곳으로 오르기 위한 과정이었음을.

진혁이 고개를 들어 끝없는 우주를 내려다보았다. 그의 뒤로 흩어진 코드들이 별빛처럼 반짝이며 사라지고 있었다.

"이제 끝났군."

하지만 이것은 결말이 아니었다. 부서진 왕좌 뒤편, 보이지 않는 저 너머에서 또 다른 차원의 문이 조용히 열리고 있었다. 진혁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진정한 천마로서, 그는 이제부터 새로운 우주를 자신의 발아래 둘 준비를 마쳤다.

그의 손바닥 위에서, 시스템이 아닌 순수한 생명의 에너지가 기운차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이것이야말로 1,000년 전 천마조차 다다르지 못했던, 스스로 창조하는 신천마신공의 완전체였다.

진혁은 다시 한번 검을 쥐었다. 이번엔 적을 베기 위해서가 아니라, 새로운 질서를 긋기 위해서. 그의 등 뒤로 거대한 마도의 길이 열렸다. 그것은 누구도 가보지 못한, 오직 강진혁만이 존재할 수 있는 유일한 마도였다.

우주의 저편에서, 미지의 존재들이 진혁의 탄생을 향해 전율하며 울음을 터뜨렸다. 전설은 여기서부터 다시 시작된다. 강진혁, 그 이름 자체가 우주의 새로운 시스템이 되기 위하여.

[SYSTEM: 종료됨.]

진혁의 귓가에 마지막으로 울린 시스템의 작별 인사를 끝으로, 모든 인공적인 소음이 사라졌다. 그는 고요한 우주를 향해 천천히 발을 내디뎠다.

이제, 신들의 시간은 끝났다. 천마의 시대가, 진정으로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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