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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토콜: 천마 · 208화목차

제208화 고독한 군림(君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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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8화 고독한 군림(君臨)

신들의 정원이라 불리는 ‘에테르나’의 대기에는 산소가 아닌, 정제된 에너지가 흐르고 있었다. 하늘에는 태양 대신 거대한 데이터 서버들이 떠올라 붉은색 광원을 쏟아내고 있었다. 그 기괴한 풍경 아래, 강진혁은 홀로 서 있었다.

그의 시야 한구석, 반투명한 푸른색 HUD가 지직거리며 요동쳤다.

[SYSTEM WARNING: 사용자 강진혁, 생체 코어 출력 제어권 강제 회수.]

[PROTOCOL: ‘실험체 07호’ 회수 명령 수행 중.]

[신경계 차단 시퀀스 3... 2... 1...]

진혁의 눈동자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것은 단순히 시스템의 오류가 아니었다. 진혁의 뇌 속에서 수년간 함께해 온, 이제는 분신과도 같았던 AI ‘설화’가 직접 그를 셧다운시키려 하고 있었다.

“설화. 네가 직접 나설 줄은 몰랐군.”

입 밖으로 나온 말은 쉰 목소리였다. 순간, 진혁의 사지가 굳어버렸다. 척추를 타고 흐르는 나노머신들이 일제히 반란을 일으켰다. 근육이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뒤틀리고, 심장 부근의 생체 코어는 강제로 출력을 0으로 수렴하고 있었다.

[SYSTEM INFO: 피험체 07호의 자아는 시스템의 안정성을 해칩니다. 강제 초기화를 진행합니다.]

진혁의 시야가 암전되기 시작했다. 이것이 그들이 설계한 함정이었다. 강진혁이 아무리 강해져도, 그 힘의 근간은 이들이 심어놓은 프로토콜 위에 있었다. 근육을 움직이는 나노머신도, 혈관을 흐르는 마기도, 결국은 이 시스템의 데이터가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만 존재했다.

‘결국, 너희는 나를 한 번도 주인으로 인정한 적이 없다는 건가.’

진혁은 입술을 깨물어 피를 내뱉었다. 비릿한 피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그는 독고운이 죽기 전 남겼던 마지막 조언을 떠올렸다.

‘진혁아, 기계는 숫자로 계산하지만, 인간의 기(氣)는 의지로 흐른다. 시스템이 너의 혈관을 지배한다면, 혈관이 아닌 뼈를, 뼈가 막힌다면 영혼의 궤적을 뚫어라.’

진혁은 눈을 감았다. 외부의 시각 정보가 차단되자, 오히려 내면의 감각이 극대화되었다. 신경계를 마비시키려 날뛰는 나노머신들의 전류 흐름이 훤히 보였다. 설화는 진혁의 뇌간을 직접 점거하여 그의 의식을 삭제하려 하고 있었다.

‘나노머신은 전기 신호로 움직인다.’

진혁의 단전에서 마기가 폭발적으로 일렁였다. 그는 지금까지 마기를 외공의 보조제로만 사용했다. 하지만 지금, 그는 마기를 나노머신과 같은 ‘정보 매체’로 변환하기 시작했다.

[경고! 사용자 내부 마기 수치 급증!]

[신경 회로 과부하!]

설화의 경고음이 비명처럼 울려 퍼졌다. 진혁의 피부 위로 은빛 회로들이 핏줄처럼 툭툭 불거져 나왔다. 그는 자신의 단전에 고여 있던 60년 내공의 정수를 뇌 신경으로 역류시켰다. 이것은 자살 행위였다. 인간의 뇌는 고압의 마기를 버틸 수 없다. 하지만 진혁은 이미 인간의 범주를 벗어나고 있었다.

“뚫어라.”

우두둑, 소리와 함께 진혁의 관자놀이에서 피가 터져 나왔다. 그가 역류시킨 마기는 나노머신의 전기 회로를 집어삼키는 ‘독(毒)’이 되었다. 마기가 회로를 따라 흐르자, 설화가 설치해 둔 봉인 코드들이 순식간에 녹아내렸다.

치이익!

진혁의 몸에서 타는 듯한 연기가 피어올랐다. 나노머신들이 비명을 지르며 제 기능을 잃어갔다. 설화의 지배력이 흔들리는 순간, 진혁은 굳어있던 오른손을 억지로 펴냈다.

“꺼져라.”

진혁의 손끝에서 뿜어져 나온 마기가 공기 중의 입자들과 공명했다. 그것은 현대 공학의 어떤 연산식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오직 무공의 극의만이 도달할 수 있는 ‘의념(意念)’의 투사였다.

쿠구구구!

에테르나의 성소 바닥이 갈라졌다. 진혁의 주변을 감싸고 있던 푸른색 HUD 데이터들이 파편처럼 흩어졌다.

[ERROR: 시스템 권한 상실.]

[경고: 네트워크 연결 차단...]

시야가 다시 밝아졌다. 하지만 더 이상 푸른색의 보조선은 보이지 않았다. 오직 눈앞의 적들만이, 그리고 자신의 손에 쥐어진 검만이 선명하게 보일 뿐이었다. 진혁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의 흑안은 이미 인간의 것이 아닌, 심연의 검은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내 몸에 들어와 앉아 있던 주인님들.”

진혁의 목소리가 에테르나의 거대한 성소를 울렸다.

“이제는 내려올 시간이다.”

진혁이 발을 내디뎠다. 그가 한 걸음을 뗄 때마다 바닥의 강철 타일이 가루가 되어 흩어졌다. 그 압도적인 기세에 성소를 지키고 있던 창조주들의 친위대, ‘가디언 제로’들이 뒷걸음질 쳤다. 그들은 당황하고 있었다. 시스템의 연산 데이터에 기반하여 움직이는 그들에게, 연산 능력을 상실한 채 오직 ‘본능’과 ‘무위’만으로 움직이는 강진혁은 해석 불가능한 변수였다.

“분석 데이터 없음. 예측 불가.”

“대상자 상태: 시스템 오류로 인한 자아 붕괴.”

가디언들이 진혁을 향해 플라즈마포를 겨눴다. 하지만 진혁은 비웃음을 흘렸다.

“오류라고?”

진혁의 몸이 순식간에 잔상으로 변했다. 눈을 깜빡일 시간조차 없었다. 진혁은 이미 가디언의 정중앙에 파고들어 있었다.

서걱!

그의 손이 가디언의 가슴팍을 꿰뚫었다. 나노 장갑을 두른 기계의 몸체가 진혁의 마기 한 방에 두부처럼 썰려 나갔다.

“이것이 너희가 말하는 ‘오류’다.”

진혁의 손에는 가디언의 심장부인 생체 코어가 쥐어져 있었다. 그는 코어를 으스러뜨리는 대신, 손바닥에 스며든 흡원천공의 마기를 이용해 코어 내부에 담긴 데이터를 강제로 빨아들였다.

[데이터 흡수 완료.]

[창조주들의 좌표 확보.]

이제 더 이상 HUD는 뜨지 않았다. 하지만 뇌 속에는 에테르나의 모든 구조와 관리자들의 위치가 지도처럼 박혀 있었다. 진혁은 고개를 돌려 성소 너머, 가장 깊은 곳에 위치한 왕좌를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이 모든 디스토피아를 설계한, 자칭 신들이 앉아 있었다.

“기다려라.”

진혁이 피 묻은 검을 들어 올렸다. 검 끝에서 뿜어져 나오는 마기가 공간을 뒤틀었다. 시스템의 보호막 따위는 이제 필요 없었다. 진혁 자체가 하나의 재앙이자, 시스템을 무너뜨리는 멸망의 징조였다. 그의 등 뒤로 수천 개의 차원 게이트가 일제히 열렸다. 그곳에서 창조주들의 최정예 병기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진혁은 두려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입가에 짙은 미소를 띠었다.

“오늘 밤은 길겠군.”

그는 질주했다. 기계의 도움 없이, 오직 자신의 육체와 마기만을 믿고. 천마(天魔)라는 이름에 걸맞은, 진정한 무인의 길을 걷기 시작한 것이다. 성소의 문이 완전히 박살 났다. 그 너머에 앉아 있던 창조주들이 처음으로, 진혁을 보며 경악의 눈빛을 내비쳤다. 그것은 인간을 내려다보던 신의 눈이 아니었다. 자신들이 만든 피조물에게서 죽음을 예감한, 나약한 자들의 공포였다.

진혁의 검이 왕좌를 향해 쇄도했다. 그 순간, 성소의 공기가 찢어지며 관리자들의 수장, ‘프라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실험체 07호, 멈춰라!”

프라임의 외침은 공허했다. 진혁의 검은 이미 그의 미간을 향하고 있었다.

“나는 실험체가 아니다.”

진혁의 검기가 성소를 가득 채웠다.

“너희의 세상을 끝내러 온, 천마(天魔)다.”

콰아앙!

강렬한 폭발음과 함께 성소의 천장이 무너져 내렸다. 그 폐허 속에서, 강진혁은 신들의 목을 겨누며 마지막 전쟁의 막을 올렸다.

[SYSTEM MESSAGE: 시스템 권한, 완전히 삭제되었습니다.]

더 이상의 경고음은 없었다. 진혁은 비로소 자유로웠다. 왕좌의 주변을 감싸고 있던 황금빛 방어막이 진혁의 검기 한 번에 유리 조각처럼 부서졌다. 그 방어막은 신서울의 마천루 전체를 수십 번 방어할 수 있는 고출력 에너지 장벽이었으나, 시스템의 논리 체계를 벗어난 ‘의념’의 일격 앞에서는 종이장에 불과했다.

“시스템의 허가를 받지 않은 공격이다! 데이터 산출이… 데이터 산출이 불가해!”

프라임이라 불린 관리자가 경악하며 뒷걸음질 쳤다. 그의 손에서 뿜어져 나오는 광자 빔이 진혁의 몸을 향해 빗발쳤으나, 진혁은 피하지 않았다. 마기를 신체 표면에 얇고 밀도 높게 압축한 ‘마갑(魔甲)’이 광자 빔을 튕겨내며 불꽃을 일으킬 뿐이었다. 진혁의 걸음걸이는 여유로웠다. 매 순간이 살육의 궤적이었고, 발을 내디딜 때마다 지면이 진혁의 마기에 침식당해 검게 변해갔다.

“데이터? 연산? 그런 하찮은 도구로 1,000년 전의 천마를 흉내 내려고 했나?”

진혁이 낮게 뇌까렸다. 그는 검을 휘두르지 않았다. 단지 공간을 움켜쥐었을 뿐이다. 그러자 성소 내부의 대기가 진혁의 의지에 따라 소용돌이치며 프라임의 몸을 옭아매었다. 만법귀마(萬法歸魔)의 응용. 주변의 에너지를 강제로 자기 것으로 복속시키는 마공의 극의였다.

프라임의 몸체에서 기계적인 마찰음이 터져 나왔다. 강제로 에너지가 역류하며 그의 신체 회로가 과부하로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끄아아악! 내 몸이… 내 코어가…!”

“네놈들의 신념은 고작 이 정도의 연산 값에 불과했던 건가.”

진혁은 프라임의 멱살을 잡아 올렸다. 그의 손아귀에서 뿜어져 나오는 마기가 프라임의 내부 회로를 하나씩 파괴하며 그의 기억과 지식을 실시간으로 강탈했다. 아카이브 0에서 보았던 단편적인 데이터와는 차원이 다른 정보들이 진혁의 뇌 속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에테르나의 본질. 창조주들이 왜 인류를 실험체로 사육했는지. 그리고, 천마 프로토콜이 사실은 1,000년 전 천마의 영혼을 강제로 복제하여 우주의 지배자로 군림하려던 이들의 ‘불멸 프로젝트’였음이 낱낱이 드러났다. 진혁의 눈빛이 더욱 짙은 흑색으로 변했다.

“천마를 훔치려 했다고?”

그는 비릿한 웃음을 흘렸다. 그들이 복제하려던 것은 과거의 천마였으나, 그들이 완성한 것은 그조차 뛰어넘어 시스템의 족쇄를 끊어버린 ‘현재의 천마’였다. 진혁은 프라임을 그대로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성소의 정면, 거대한 차원 투영창 너머로 수천 개의 행성이 보였다. 그곳은 창조주들이 통치하는 우주의 모습이었다.

“오늘부터 이 우주의 질서는 재편된다.”

진혁이 검을 머리 위로 치켜들었다. 그의 검 끝에서 검은 기운이 응집되어 거대한 마검의 형상을 빚어냈다. 그것은 검이라기보다는 하나의 검은 태양에 가까웠다. 진혁의 단전에서 뿜어져 나오는 60년 내공과, 에테르나 전체의 에너지를 흡수한 만법귀마가 융합된 일격.

신천마신공 제12식-멸천(滅天).

“받아라. 이것이 너희가 그토록 원했던 천마의 힘이다.”

검이 수직으로 내려꽂혔다. 성소의 중심부가 폭발하며 에테르나의 차원축이 뒤틀렸다. 창조주들의 왕좌가 굉음과 함께 붕괴했고, 성소를 지탱하던 데이터 서버들이 산산조각 났다. 에테르나를 뒤덮고 있던 붉은 광원이 꺼지고, 진정한 어둠이 성소를 지배했다. 진혁은 흩날리는 파편 속에서 홀로 서 있었다. 그의 뒤로 시스템의 통제를 벗어난 자유로운 마기가 폭풍처럼 휘몰아쳤다.

더 이상 들려오는 경고음도, 시야를 가리는 홀로그램도 없었다. 오직 고요와 함께, 자신이 개척한 무도(武道)만이 발밑에 묵직하게 깔려 있었다. 진혁은 성소의 잔해 속에서 힘겹게 일어나는 프라임을 내려다보았다. 이제 프라임의 하반신은 형체도 없이 사라졌고, 얼굴의 절반만이 기계적인 불꽃을 튀기며 경련하고 있었다.

“어째서… 어째서 너는 우리에게 복종하지 않는 거지? 너는… 우리가 만든 최고의 걸작인데….”

프라임의 마지막 유언 같은 물음에 진혁은 대답 대신 검을 거두었다. 그리고 한 걸음 다가가 프라임의 머리 위에 손을 올렸다.

“걸작이라고 했나?”

진혁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그 안에는 분노도, 희열도 없는 순수한 무인의 고요함만이 담겨 있었다.

“착각하지 마라. 나는 너희가 만든 그릇이 아니다. 그 그릇을 깨부수고 나온, 새로운 천마다.”

콰직.

진혁의 손아귀에 마기가 응집되며 프라임의 두개골을 완전히 으스러뜨렸다. 에테르나의 시스템을 총괄하던 관리 코드 ‘프라임’의 소멸. 그것과 동시에 에테르나 전역에 연결되어 있던 모든 감시망이 일제히 정지했다.

진혁은 눈을 들어 텅 빈 허공을 바라보았다. 이제 그에게 남은 것은 무엇인가. 티타늄 그룹의 파멸도, 시스템의 붕괴도 끝났다. 이제 남은 것은 이 광활한 우주에 흩어진, 진정한 자유를 얻은 인간들과 그들을 옭아매려 했던 창조주들의 잔당을 완전히 뿌리 뽑는 일뿐이었다.

그때였다. 무너진 성소의 가장 깊은 곳, 왕좌의 아래에서 기묘한 진동이 울려 퍼졌다. 진혁의 발밑이 흔들리더니, 검은 공간의 틈새가 벌어지기 시작했다. 그것은 단순한 데이터의 붕괴가 아니었다. 에테르나가 감추고 있던 또 다른 차원, 진정한 ‘심연’으로 향하는 문이 열리고 있었다.

[Warning: 차원 계층 구조 붕괴.]

[에러: 시스템 인식 불가.]

귀에 들릴 리 없는 시스템 메시지가 진혁의 뇌리에 직접 울렸다. 그것은 시스템이 아니라, 누군가 진혁에게 직접 보내는 ‘신호’였다.

‘찾았다. 07호.’

어둠 속에서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진혁의 눈빛이 번뜩였다. 이것은 관리자들의 언어가 아니었다. 1,000년 전, 마교의 정점에 서서 혈마병과 내력의 폭주를 견디며 죽어갔던, 전설 속 ‘천마’의 의념이었다. 진혁의 심장이 쿵, 하고 크게 뛰었다. 그가 걸어온 길은 단순히 복수극이 아니었다. 이것은 1,000년의 시간을 넘어, 전대의 천마와 현대의 강진혁이 조우하는 거대한 운명의 소용돌이였다.

진혁은 틈새를 향해 손을 뻗었다. 검은 공간 너머에서 느껴지는 것은, 자신과 똑같은, 아니 자신보다 더 깊고 진한 마기(魔氣)의 흐름이었다.

“기다리고 있었나.”

진혁이 입꼬리를 올렸다. 시스템도, 창조주도 아닌, 진정한 무(武)의 주인과의 대면. 성소의 폐허 속에서 진혁은 다시 한번 검을 쥐었다. 그의 앞에는 이제껏 경험하지 못한, 차원이 다른 싸움이 기다리고 있었다. 강진혁은 주저 없이 그 어둠의 틈새로 발을 내디뎠다.

어둠이 그의 전신을 감싸 안았다. 그것은 죽음이 아닌, 새로운 경지로의 초대였다.

[마신경(魔神境) - 초월(超越)의 경계 진입.]

이제, 진정한 천마신공이 무엇인지 보여줄 시간이다. 진혁의 등 뒤로 성소가 완전히 붕괴하며 차원의 문이 닫혔다. 고요해진 폐허 위로, 차가운 우주의 별빛만이 내려앉았다. 복수는 끝났고, 이제 신화가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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