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7화 아카이브 0의 파수꾼
에테르나의 성소는 고요했다. 하지만 그 적막은 생명체의 숨소리가 거세된, 기계적인 진공의 정적이었다.
강진혁의 앞을 가로막은 것은 거대한 데이터 타워였다. 신서울의 모든 생체 코어 데이터가 집약된 곳이자, 천마 프로토콜의 원천이 봉인된 ‘아카이브 0’.
진혁이 발을 들이자마자, 천장의 냉각관이 요란한 파열음을 내며 터져 나왔다.
쿠구구구!
액체 질소와 함께 쏟아져 내린 것은 살점이 기괴하게 뒤틀린 육체들이었다. 이현도가 마지막 순간까지 배양하던 유전자 개조 괴수들. 놈들은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었으나, 그 골격은 티타늄 합금으로 보강되어 있었고 혈관 대신 고압의 전류가 흐르는 회로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경고: 침입자 확인. 프로토콜 ‘정화(Purification)’를 실행합니다.]
허공에 뿌려진 붉은 홀로그램. 시스템의 기계적인 음성이 성소 전체를 울렸다.
진혁은 피식, 차가운 냉소를 흘렸다.
“정화? 지들이 썩어 문드러진 주제에.”
놈들이 달려들었다. 짐승처럼 네 발로 바닥을 박차고 튀어 오르는 속도. 찰나의 순간에 십여 마리의 괴수가 진혁의 전방위에서 살기를 내뿜었다. 일반적인 초인이라면 신경 반응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고 토막이 났을 공격이었다.
하지만 진혁의 눈동자는 고요했다.
‘분석은 필요 없다.’
시스템의 보조 HUD는 꺼져 있었다. 하지만 진혁의 뇌 속에는 이미 수만 번의 전투로 다져진 ‘무도(武道)의 감각’이 각인되어 있었다.
[만법귀마(萬法歸魔).]
진혁의 단전에서 끓어오른 마기가 혈관을 타고 전신으로 퍼져 나갔다.
파앗!
그의 주변으로 붉은 파동이 일렁였다. 괴수들의 유전자 개조 회로 속에서 흐르는 고압 전류와, 그들의 심장부에 박힌 저급 생체 코어의 파동이 진혁의 마기와 공명했다.
“잡았다.”
진혁의 손가락이 허공을 툭 튕겼다.
콰아아앙!
기괴한 굉음과 함께 쇄도하던 괴수들의 몸이 공중에서 정지했다. 정확히는, 그들의 몸속에 심어진 생체 코어들이 과부하를 일으켜 스스로 폭발한 것이다.
피와 전류, 파편이 뒤섞여 비처럼 쏟아졌다. 놈들의 육체는 뼈대만 남은 채 허공에서 분해되어 바닥으로 처박혔다.
“고작 이 정도인가.”
진혁은 핏물이 뚝뚝 떨어지는 손을 털며 성소의 안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가 지나갈 때마다 바닥에 깔린 케이블들이 마기에 짓눌려 지직거리며 타들어 갔다.
성소의 가장 깊은 곳, 거대한 유리관 속에 반투명한 푸른 빛을 내뿜는 뇌(腦)가 떠 있었다.
1,000년 전, 마교의 지존이라 불렸던 ‘천마’의 유골에서 추출한 기억의 파편.
진혁은 그 앞에 섰다. 시스템이 그토록 감추려 했던, 그러나 진혁이 평생을 쫓아온 기원의 실체였다.
“이게… 네놈들이 탐내던 그릇인가.”
유리관 너머의 뇌가 미세하게 진동했다. 진혁의 흑안에 은빛 회로가 짙게 명멸했다.
그때였다.
성소의 벽면이 웅장하게 갈라지며, 그 너머에서 거대한 기계 병기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단순한 개조 괴수가 아니었다. 티타늄 그룹이 보유한 최고 등급의 파수꾼, ‘아카이브 가디언’ 셋이 진혁을 포위했다.
놈들은 말을 하지 않았다. 다만, 그들의 눈에서 뿜어져 나오는 붉은 레이저 조준선이 진혁의 심장을 노리고 있었다.
[개체명: 강진혁. 실험체 07호.]
[창조주들의 이름으로 명한다. 육체와 자아를 반납하고 ‘천마’의 그릇으로 귀환하라.]
가디언들의 목소리는 하나같이 똑같았다. 수천 명의 실험체가 내뱉는 다중적인 음성.
진혁은 검을 뽑지 않았다. 그저 주먹을 쥐었을 뿐이다.
“귀환이라… 내가 돌아갈 곳은 너희가 만든 지옥이 아니다.”
진혁의 발밑이 무너져 내렸다. 마신경(魔神境)의 영역이 성소 전체를 덮치기 시작했다.
단전에서 뿜어져 나온 마기가 현실의 공간을 일그러뜨렸다. 가디언들이 일제히 돌격했다. 놈들의 손에서 전개된 플라즈마 블레이드가 진혁의 목을 향해 호를 그렸다.
쉭! 쉭!
공기가 찢어지는 소리와 함께 진혁의 머리카락이 흩날렸다. 하지만 진혁은 피하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적들의 중앙으로 파고들었다.
‘만법귀마, 제2식. 역류(逆流).’
진혁의 손이 가장 앞선 가디언의 가슴팍을 관통했다.
찌지지직!
가디언의 나노 회로가 진혁의 마기에 침식당하며 거꾸로 비명을 질렀다. 놈의 몸속에 흐르던 에너지가 진혁의 팔을 타고 역류했다. 가디언의 눈에서 나오던 붉은 빛이 일순간 파랗게 점멸하더니, 놈의 등 뒤에서 솟구쳐야 할 플라즈마가 자신의 몸 내부를 태우기 시작했다.
“내 힘을 빌려 남의 것을 부수는 게 마공의 정수지.”
진혁은 가디언의 몸을 방패 삼아 나머지 둘을 향해 던져 버렸다.
쾅! 콰광!
두 가디언이 충돌하며 거대한 폭발을 일으켰다. 하지만 진혁은 그 폭발의 불길을 뚫고 튀어 나갔다. 그의 손에는 이미 가디언의 코어에서 뽑아낸 고밀도 에너지 덩어리가 쥐여 있었다.
[오류. 연산 불가. 어떻게 시스템의 보조 없이 이 정도 출력을…]
가디언의 기계적인 목소리가 찢어졌다. 놈들이 다시 몸을 추스르려 했지만, 진혁은 이미 그들의 뒤에 서 있었다.
“보조? 그딴 게 왜 필요하지?”
진혁의 검지 끝에 응축된 마기가 검처럼 날카롭게 뻗어 나왔다.
“내가 곧 시스템이고, 내가 곧 법칙이다.”
퍼억!
진혁의 손가락이 가디언의 머리 코어를 정확히 꿰뚫었다.
단 일격.
가디언들의 몸이 굳어졌다. 그들의 붉은 눈이 서서히 꺼져갔다.
성소 안은 다시금 정적에 휩싸였다. 오직 진혁의 거친 숨소리만이 아카이브 0의 차가운 공기를 가르고 있었다.
진혁은 이제 유리관 속의 뇌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의 손끝이 유리관 표면에 닿는 순간, 아카이브 0의 모든 데이터가 진혁의 머릿속으로 폭풍처럼 밀려들어 왔다.
1,000년 전 천마의 마지막 기억.
진무극이 설계한 실험의 모든 과정.
그리고… 창조주들이 숨겨놓은 다음 차원의 좌표까지.
“이제야 제대로 보이는군.”
진혁의 눈에 비친 세상이 변했다.
현실의 벽이 겹겹이 쌓인 코드처럼 보였고, 그 코드를 이루는 근본적인 물리 법칙들이 마기에 의해 조종 가능한 실처럼 보였다.
[Warning: 사용자 강진혁의 마기 농도가 임계치를 초과했습니다. 육체 붕괴 위험 99%.]
어디선가 들려오는 기계음. 이제는 사라졌어야 할 AI 설화의 목소리였다.
[진혁 씨, 멈추세요. 그 기억을 전부 받아들이면 당신의 자아는 소멸합니다. 당신은 그저 ‘천마’의 복제본으로 남게 될 거예요.]
진혁은 뇌를 움켜쥐며 나직하게 읊조렸다.
“소멸? 웃기지 마라.”
그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마기가 성소의 천장을 뚫고 하늘을 찢었다.
진혁은 기억의 파편들을 억지로 삼키는 대신, 그 파편들을 자신의 마신경으로 짓눌러 완전히 분해하고 있었다. 복제본이 되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 모든 기억을 밑거름 삼아, 자신만의 새로운 진리를 완성하기 위해서다.
“나는 천마의 그릇이 아니다.”
진혁의 몸이 은빛으로 빛나기 시작했다.
“나는 그 모든 과거를 짓밟고 일어설, 새로운 하늘이다.”
그의 손끝에서 뿜어져 나온 마기가 유리관을 산산조각 내었다.
뇌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하지만 진혁의 눈빛은 그 어느 때보다 명료했다.
그때, 성소의 정면 벽이 통째로 열리며 거대한 차원 게이트가 입을 벌렸다.
그 너머에는 수천 개의 별이 떠 있는 차원 밖의 공간, ‘에테르나’의 진정한 왕좌가 기다리고 있었다.
진혁은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는 망설임 없이 게이트를 향해 발을 내디뎠다.
“기다려라, 창조주들.”
진혁의 목소리가 에테르나의 빈 공간을 가득 채웠다.
“네놈들이 만든 실험체 07호가, 이제 네놈들의 신화를 끝내러 간다.”
그가 게이트 속으로 사라지자, 아카이브 0의 모든 시설이 연쇄적으로 폭발하기 시작했다. 신서울의 지하를 지탱하던 시스템의 심장이 멈추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진혁의 질주는 이제 시작에 불과했다.
게이트 너머, 차원 전쟁의 서막이 열리고 있었다.
그곳에는 진혁이 평생을 바쳐 찾던 ‘진정한 적’들이, 오만한 미소를 지으며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 207화 끝 -
게이트의 끝은 차가운 우주의 진공과도 같았다.
진혁이 발을 내디딘 곳은 에테르나의 최상층, ‘신들의 정원’이라 불리는 성역이었다. 발밑으로는 신서울의 마천루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행성 단위의 데이터 회로가 푸른빛으로 맥동하고 있었다. 그곳의 공기는 순수한 에너지로 가득 차 있어, 일반적인 무인이라면 숨을 들이쉬는 것만으로도 내장이 녹아내릴 정도의 고농도 마기가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진혁은 잠시 걸음을 멈추고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실험체 07호. 버려진 폐기물. 티타늄 그룹의 장난감. 그가 짊어지고 있던 모든 낙인이 이제는 희미한 그림자처럼 느껴졌다. 시스템의 연산이 제거된 자리에는 오직 강진혁이라는 고유한 의지만이 단단하게 박혀 있었다.
“기다리고 있었나.”
성역의 중앙, 거대한 옥좌에 앉은 형체가 느릿하게 눈을 떴다.
그것은 인간의 형태를 하고 있었으나, 피부 표면 위로 수천 개의 좌표가 떠다니고 있었다. 창조주들이라 불리는 자들, 관리 코드 ‘ZERO’의 상위 개체이자 에테르나의 통치자. 그는 진혁이 아카이브 0에서 흡수한 천마의 기억을 낱낱이 훑어보듯, 차가운 시선으로 진혁을 응시했다.
[실험체 07호. 아니, 이제는 ‘천마’라 불러야 할까.]
그것의 목소리는 물리적인 진동이 아니라, 진혁의 뇌 속을 직접 긁어대는 데이터의 파동이었다.
[네놈이 여기까지 도달할 확률은 0.0001% 미만이었다. 시스템의 통제조차 거부하고, 스스로의 기혈을 뒤틀어 마신경에 도달하다니. 참으로 경이로운 오류로군.]
“오류라고?”
진혁이 검을 쥐었다. 손잡이 끝에서부터 시꺼먼 마기가 파도처럼 뿜어져 나와 성역의 바닥을 검게 물들였다.
“니들 눈엔 스스로 운명을 개척하는 게 오류인가 보지. 하지만 착각하지 마라. 나는 오류가 아니라, 너희들이 만든 지옥을 끝내러 온 심판자다.”
[심판자? 가소롭군.]
옥좌의 주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일어서자 성역의 중력이 급격하게 변했다. 수백 배로 증폭된 압박감이 진혁의 어깨를 짓눌렀다. 일반적인 생체 코어였다면 즉시 단전이 파열되었을 압력이었다.
하지만 진혁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심장 근처에 이식된 나노머신들이 폭발적으로 가동하며, 마기를 엔진처럼 펌프질했다.
‘심장부의 마기가 역류한다.’
진혁은 그 고통을 즐기듯 입꼬리를 올렸다. 마신경(魔神境)의 정점. 그곳에서 그는 자신의 몸을 고정된 그릇이 아닌, 매 순간 재구성되는 ‘흐름’으로 보았다.
[그 힘은 우리가 너에게 빌려준 것이다. 07호. 프로토콜을 활성화한다. 반환해라.]
그것이 손을 뻗자, 진혁의 내부에서 기이한 떨림이 발생했다.
심장에 박힌 생체 코어가 창조주의 명령에 반응해 강제로 회로를 개방하려 했다. 천마 프로토콜의 마스터 코드가 진혁의 육체를 외부에서 직접 제어하려 드는 것이다.
[명령어: 오버라이드. 사용자 권한 박탈.]
“윽…!”
진혁의 몸이 경직되었다. 팔이 멋대로 꺾이고, 발이 땅에 고정되었다. 전신의 나노머신이 적색으로 점멸하며 시스템의 통제권 아래로 다시 빨려 들어가려 했다.
‘설마, 마스터 코드가 아직 내 심장에 박혀 있었던 건가?’
아카이브 0에서 모든 데이터를 흡수했다고 생각했으나, 창조주들은 진혁의 육체 그 자체를 거대한 ‘수신 장치’로 만들어 놓았던 것이다.
하지만 진혁은 그 순간, 눈을 감았다.
“내가 준 건 기술이라고 했지.”
그는 명령어를 거부하려 애쓰지 않았다. 대신, 자신의 단전에 고여 있던 마기를 심장으로 밀어 넣었다.
혈관을 따라 흐르는 마기가 강제적인 명령 코드와 충돌했다.
치이이익!
마치 쇠가 타들어 가는 듯한 소리가 진혁의 가슴팍에서 울렸다. 그는 자신의 심장을 스스로 마기로 짓눌러 봉쇄했다. 외부의 신호가 닿지 않도록, 육체의 모든 입력을 단절시킨 것이다.
[무슨 짓을 하는 거냐! 그러다간 네 심장이…!]
“상관없어. 어차피 이 심장은 너희들이 준 거니까.”
진혁의 심장이 멎었다.
기계적인 박동이 멈추자, 역설적으로 그가 스스로 운용하는 마기의 흐름이 온몸을 휘감았다. 이제 그는 시스템의 전력에 의존하는 기계 인간이 아니었다. 심장의 박동 대신, 스스로의 의념으로 마기를 돌리는 진정한 ‘마(魔)’의 경지.
“이제야 조용하군.”
진혁이 다시 눈을 떴다. 그의 눈동자에는 더 이상 은빛 회로가 보이지 않았다. 칠흑 같은 어둠, 순수한 마기만이 일렁이고 있었다.
[실험체 07호가… 생체 코어 없이 가동되고 있다? 불가능하다!]
“불가능한 건 너희들 뇌 속에만 있는 거다.”
진혁이 바닥을 박찼다.
성역의 공간이 진혁의 발걸음 한 번에 쩍쩍 갈라졌다. 창조주를 향해 쏘아 올린 검강은 단순한 물리적 타격이 아니었다. 공간 자체를 붕괴시키는 ‘허공답보(虛空踏步)’의 극치.
콰아아앙!
옥좌가 반파되었다.
창조주는 방어막을 전개하려 했지만, 진혁의 검은 이미 그 방어막의 공진 주파수를 파괴하며 놈의 어깨를 베어 넘겼다.
[크아아악! 이럴 리가 없다. 데이터에 없는 무공이다!]
“당연하지. 이건 시스템이 계산할 수 없는, 내가 직접 쓴 새로운 프로토콜이니까.”
진혁은 멈추지 않았다. 그는 이제 단순한 복수자가 아니었다.
그는 스스로의 운명을 짓밟고 일어선, 차원 너머의 새로운 법칙.
진혁의 뒤로 신서울의 슬럼가에서부터 그가 겪어온 모든 투쟁의 기억들이 마기의 형상으로 겹쳐 보였다. 그것은 백무현의 강철, 독고운의 검의 의지, 그리고 그가 잃어버렸던 모든 이들의 한이 뭉쳐진 거대한 마신(魔神)의 모습이었다.
“다음은 네 놈의 차례다.”
진혁이 검을 다시 고쳐 잡았다.
에테르나의 하늘이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신들의 낙원이자 마신들의 무덤이 될 이 공간에서, 강진혁의 마지막 전쟁이 비로소 그 서막을 올리고 있었다.
이제, 그 어떤 시스템도 그를 제어할 수 없었다.
그것이 바로 그가 증명하고자 했던, 진정한 천마의 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