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6화 감각의 고도화
에테르나의 공기는 차가웠다. 인공적인 정화 장치가 뿜어내는 공기에는 냄새조차 없었다.
그동안 강진혁의 시야를 지배하던 푸른색 HUD, 시스템의 친절한 수치화, 적의 약점을 찍어주던 붉은색 타겟팅 마크가 모두 사라진 자리에는 오직 날것의 현실만이 남았다.
‘고요하군.’
진혁은 눈을 감았다.
기계적 보조가 사라진 직후, 세상은 기묘할 정도로 이질적이었다. 평소라면 나노머신이 실시간으로 고도와 풍속, 적의 근육 움직임을 계산해 뇌에 직접 주입했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자신의 심장박동, 혈관을 타고 흐르는 마기의 점도, 그리고 대기 중에 미세하게 진동하는 에테르나의 에너지 파동만이 느껴졌다.
"07호, 시스템과의 연결이 차단된 상태로 생존 확률 0.00%를 기록하고 있다."
그림자 속에서 십수 명의 관리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기계와 인간의 경계가 모호한, 정교하게 다듬어진 살인병기들이었다. 그들이 내뱉는 소리는 인간의 언어였으나, 그 속에는 감정이라는 것이 거세된 차가운 연산만이 담겨 있었다.
진혁은 검을 고쳐 쥐었다. 마기(魔氣)가 손끝을 타고 검신으로 흘러 들어갔다. 예전 같았으면 나노머신이 알아서 마기의 출력을 조절하고 검신에 깃든 전하를 제어했겠지만, 이제는 오직 진혁의 의지만이 그 역할을 대신했다.
휘익―!
가장 먼저 달려든 관리자가 진혁의 목을 향해 전자기 칼날을 휘둘렀다.
보통의 인간이라면 반응조차 하지 못했을 속도. 하지만 진혁의 감각은 그보다 한 수 위였다. 근육이 수축하는 순간의 미세한 파동, 발바닥이 바닥을 짓이기며 발생하는 반발력의 미세한 차이까지.
진혁은 몸을 틀었다. 아주 짧은 움직임. 칼날이 옷깃을 스치고 지나갔다.
‘느리다.’
시스템의 연산 데이터에 의존하지 않으니, 오히려 적의 본질이 더 선명하게 보였다. 저들의 움직임은 완벽한 공식이었지만, 그렇기에 너무나도 뻔했다.
진혁의 검이 호선을 그리며 관리자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콰아앙-!
폭발적인 내공이 검 끝에서 터져 나왔다.
[신천마신공 제4식-뇌격마강]
단순히 나노머신의 출력을 빌린 것이 아니다. 단전에서 솟구친 마기가 직접 나노머신을 매개체로 삼아 물리적 형상을 띤 것이다. 관리자의 흉갑은 비명 한 번 지르지 못하고 산산조각이 났다.
"오차 발생. 타겟의 반응 속도가 시뮬레이션 범위를 초과했다."
관리자들의 눈에 붉은 빛이 점멸했다. 놈들은 즉시 대형을 정비하며 진혁을 포위했다.
진혁은 옅은 미소를 지었다.
“시뮬레이션?”
그는 발을 구르며 허공을 박찼다.
[마광신보(魔光身步)]
보조 연산 없이 펼치는 신법은 더욱 자유로웠다. 전에는 시스템이 지정한 최적의 경로만을 따라 움직여야 했지만, 지금은 내가 딛는 곳이 곧 길이 되었다.
진혁의 몸이 잔영을 남기며 적들의 한복판을 파고들었다.
그는 감각을 더욱 고도화했다. 근육 조직 하나하나에 흐르는 마기를 제어하여 신체 능력을 극한으로 끌어올렸다. 시스템이 보여주던 ‘4,500 MW’라는 수치는 이제 의미가 없었다. 그것은 숫자에 불과할 뿐, 진짜 강함은 그 숫자를 넘어서는 의지에 있었으니까.
‘지금이다.’
진혁이 검을 휘두르는 궤적에 푸른 뇌전이 얽혔다.
[뇌전마강(雷電魔剛)]
과거, 시스템이 자동으로 계산해주던 파괴력이었다면, 지금은 진혁이 직접 마기의 진동수를 조절하여 공진 주파수를 찾아내 파괴하는 방식이다.
적들의 나노 방어막이 종잇장처럼 찢겨나갔다.
"이건… 데이터에 없는 무공이다."
관리자 하나가 경악하며 뒷걸음질 쳤지만, 이미 진혁의 검은 그의 심장을 관통한 뒤였다.
진혁은 관리자의 시신에서 솟구치는 생체 에너지를 흡원천공으로 빨아들였다.
[흡원천공(吸元天功) 활성화]
상대의 생체 코어에서 추출한 에너지가 혈관을 타고 뜨겁게 흘러들어 왔다. 예전에는 시스템이 이 에너지를 정제하여 안전하게 저장했으나, 지금은 진혁이 직접 혈관 속에서 그 거친 에너지를 길들여야 했다.
혈관이 터져 나갈 듯한 통증. 하지만 진혁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이 통증이야말로 자신이 살아있다는 증거이자, 시스템의 노예가 아닌 진정한 천마(天魔)로 거듭나는 과정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데이터는 필요 없다.”
진혁이 나지막이 읊조렸다.
“무공은 계산하는 것이 아니라, 체득하는 것이니까.”
그의 몸 주변으로 검은 마기가 폭풍처럼 휘몰아쳤다. 보조 연산이 사라진 자리를, 오직 그가 평생을 바쳐 쌓아 올린 감각이 채우고 있었다.
어느덧 주변에는 쓰러진 관리자들의 파편만이 가득했다. 하지만 에테르나의 복도는 끝이 없었다. 어둠 저편에서 더 거대한 기계 장치들이 웅웅거리는 소리를 내며 다가오고 있었다.
진혁은 검을 가볍게 털어내며 정면을 응시했다.
그의 흑안이 어둠을 꿰뚫었다.
이제 시스템은 없다. 그를 지켜줄 보호막도, 친절한 조언도 없다.
오직 손에 쥔 검 한 자루와 자신의 의지만이 있을 뿐.
진혁의 입가에 서늘한 미소가 번졌다.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이다.”
그는 다시 발을 옮겼다. 에테르나의 심장부를 향해. 그곳에 숨겨진 창조주들의 왕좌를 부수고, 자신을 '07호'라 불렀던 오만한 신들에게 진정한 공포를 선사하기 위해서.
저 멀리, 거대한 철문이 열리며 십수 기의 차원 파괴 병기가 모습을 드러냈다.
진혁은 그 압도적인 무력 앞에서도 물러서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심장 속에 깃든, 1,000년 전의 그 천마조차 뛰어넘은 자신만의 진리를 믿었다.
한 걸음. 또 한 걸음.
진혁이 병기들을 향해 검을 겨누었다.
그 순간, 그의 몸 안에서 소용돌이치던 마기가 폭발하며 주변의 공간을 일그러뜨렸다.
이것은 연산된 결과값이 아니다.
강진혁, 그 자체가 하나의 법칙이 되어가고 있었다.
[시스템 메시지: 오류.]
허공에 떠 있던 시스템의 경고창이 마지막으로 한 번 깜빡이다가 완전히 소멸했다.
진혁의 앞길을 막아서는 것은, 이제 기계가 아닌 그가 직접 베어 넘겨야 할 운명뿐이었다.
"나와라."
진혁의 외침에 병기들이 일제히 포문을 개방했다. 하지만 진혁은 피하지 않았다. 그는 검을 휘둘러 차원의 틈을 갈랐다.
그것은 물리적인 검술이 아니었다.
존재의 법칙을 비트는, 신천마신공의 새로운 경지였다.
콰아아앙-!
에테르나의 복도가 비명처럼 울부짖었다.
진혁의 검 끝에서 뿜어져 나온 파동이 공간을 찢고 적들의 핵심 회로를 강타했다.
순식간에 병기들이 침묵에 빠졌다.
하지만 진혁의 눈은 여전히 굶주려 있었다.
그는 알고 있었다. 이것은 시작에 불과하다는 것을.
진혁은 더 깊은 어둠 속으로, 창조주들이 숨어 있는 진짜 왕좌를 향해 다시 발을 내디뎠다.
에테르나의 심연이 그의 발밑에서 떨고 있었다.
복도가 진동을 멈추고 정적이 감돌았다. 방금 전까지 진혁의 앞을 가로막았던 십수 기의 차원 파괴 병기들은 고철 덩어리가 되어 차가운 금속 바닥에 뒹굴고 있었다. 시스템의 오차 범위조차 계산할 수 없는, 철저히 파괴된 데이터의 잔해들.
진혁은 피 냄새와 타버린 회로의 퀴퀴한 향이 섞인 공기를 폐부 깊숙이 들이마셨다.
‘아직도 부족해.’
단순히 적을 섬멸하는 것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갈증이 있었다. 육체의 신경 회로 하나하나가 팽팽하게 긴장하며 더 큰 투쟁을 갈구하고 있었다. 예전이라면 시스템이 즉각적인 냉각제 투여와 나노머신을 이용한 피로도 제거를 제안했겠지만, 지금은 그 모든 것을 오직 정신력으로 억눌러야 했다.
그는 검을 가볍게 휘둘러 묻은 파편들을 털어냈다.
"07호, 네놈의 존재 자체가 이 차원의 오류다."
복도 끝 어둠 속에서 낮고 기계적인 음성이 들려왔다. 단순한 관리자가 아니다. 에테르나를 총괄하는 관리 코드, 그중에서도 상위 개체인 'ZERO-PRIME'의 파편이었다.
그림자가 걷히며 드러난 것은,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으나 몸체 자체가 차원 문을 형상화한 듯한 이질적인 존재였다. 놈의 몸 주변으로는 공간이 비틀리고 있었다.
"오류?"
진혁이 차갑게 되물었다.
"내가 오류라면, 너희는 그 오류를 만들어낸 설계의 실패작일 뿐이다."
"실패작은 폐기되어야 한다. 그것이 창조주들의 법칙이다."
ZERO-PRIME이 손을 뻗자, 주변의 공간이 진공 상태로 압축되기 시작했다. 숨조차 쉴 수 없는 기압이 진혁의 전신을 짓눌렀다. 뼈가 비명을 지르고, 나노머신으로 강화된 근육조차 한계치까지 수축했다.
시스템의 보조가 있었다면, 이런 상황에서는 즉시 방어막 출력을 최대치로 올리고 반격 좌표를 산출했을 것이다. 하지만 진혁은 그 대신, 자신의 심장박동을 강제로 늦췄다.
'법칙을 강요하는군.'
놈은 공간을 조작하고 있었다. 하지만 진혁이 익힌 신천마신공은 공간의 물리적 성질을 이용하는 것이 아니었다. 놈이 공간을 짓누른다면, 그 공간 자체를 마기로 오염시켜 놈의 통제력을 무력화하는 것.
[만법귀마(萬法歸魔)]
진혁의 단전에서 뿜어져 나온 마기가 순식간에 복도 전체를 잠식했다. 놈이 만든 진공의 공간은 마기에 의해 순식간에 난도질당했다. 짓눌리던 기압이 순식간에 역전되며, 이번에는 ZERO-PRIME의 신체 주위로 마기의 소용돌이가 휘몰아쳤다.
"이런 데이터는 없었다! 어떻게 인간의 연산력으로 차원의 중력을 거스르는 거지?"
"말했지. 계산하는 게 아니라고."
진혁의 몸이 허공을 밟았다.
그는 찰나의 순간에 관리자의 품 안으로 파고들었다. 마기가 응집된 검이 놈의 가슴팍, 차원 문이 열려 있는 핵을 향해 쇄도했다.
콰앙-!
예상치 못한 충격에 ZERO-PRIME의 신체가 뒤로 밀려났다. 놈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푸른색 에너지가 진혁의 마기와 충돌하며 섬광을 일으켰다.
"네가 가진 모든 데이터, 모든 경험치를 나에게 헌납해라."
진혁의 눈동자가 기묘한 흑색으로 타올랐다. 흡원천공이 극의에 달했다. 단순히 생체 에너지만을 빨아들이는 것이 아니었다. 관리자가 가지고 있는 차원 좌표의 데이터, 우주의 질서에 대한 기억까지 전부 갉아먹기 시작했다.
"아아아악! 이건… 고대 마교의 금기인가!"
"천마가 완성하지 못한 마지막 조각이다. 네놈들이 그토록 갈망하던 완벽한 육체."
진혁의 검이 한 번 더 궤적을 그렸다.
[신천마신공 제8식-멸세마검(滅世魔劍)]
차원을 찢는 일검. 복도 전체가 진혁의 검기에 의해 반으로 갈라졌다. 놈의 몸체는 더 이상 형태를 유지하지 못하고 파편화되어 흩어졌다. 하지만 진혁은 멈추지 않았다. 흩어지는 파편 속에서 놈의 핵심 코어를 낚아채듯 쥐었다.
"이제 말해라. 창조주들의 왕좌는 어디에 있지?"
코어는 지지직거리는 소음을 내며 진혁의 마기에 굴복하고 있었다.
"…에테르나의 최상층, 그곳은 이미 신의 구역이다. 너 따위 필멸자가 발을 들이는 순간, 네 육체는 원자 단위로 분해될 것이다."
"분해되든 말든 상관없다."
진혁은 코어를 으스러뜨렸다.
파앗-!
폭발한 에너지 파편이 진혁의 몸 안으로 흡수되었다. 차원 너머의 정보가 머릿속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창조주들이 거처한다는 '성소', 그곳으로 가는 좌표가 진혁의 뇌리에 깊숙이 각인되었다.
그는 피 묻은 검을 들어 올렸다.
앞을 가로막는 것은 이제 아무것도 없었다. 아니, 오히려 더 많은 병기가 몰려오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진혁은 두렵지 않았다.
그의 혈관 속에서 흐르는 마기는 이미 에테르나의 모든 에너지를 집어삼킬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창조주들.'
진혁이 고개를 들어 천장을 바라보았다. 아니, 그 너머에 있을, 오만한 신들의 왕좌를 응시했다.
'기다려라. 너희가 만든 이 비틀린 세상의 질서를, 내 손으로 직접 다시 써주마.'
그는 발걸음을 옮겼다.
복도 끝에 자리한 거대한 승강기, 그 너머로 보이는 빛의 계단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수만 대의 자동 포탑이 그를 겨냥하고 있었지만, 진혁은 검을 검집에 꽂지도 않은 채 유유히 걸어갔다.
이제 그는 시스템의 지배를 받는 실험체 07호가 아니었다.
이 우주 전체를 자신의 장기판으로 삼는, 새로운 천마(天魔)의 강림이었다.
승강기의 문이 열렸다. 그곳에서 뿜어져 나오는 눈부신 빛이 진혁의 검신을 더욱 날카롭게 비추었다. 진혁은 망설임 없이 빛 속으로 뛰어들었다.
그의 뒤로, 수없이 많은 관리자들의 잔해가 고철처럼 쌓여갔다.
에테르나의 밤은 이제 시작이었다.
그리고 강진혁이라는 태풍이, 그 밤의 모든 질서를 집어삼키고 있었다.
진혁의 앞에는 이제껏 본 적 없는 거대한 공간이 펼쳐졌다.
수천 개의 차원 게이트가 꽃처럼 피어 있는 곳. 그 중심에, 창조주들의 권좌가 위용을 드러내고 있었다.
진혁은 검을 고쳐 잡았다.
마침내, 신들을 도살할 시간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