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5화 시스템 제한 투혼
아카이브 0의 공기는 차갑고 건조했다.
단순히 온도 때문이 아니었다. 수천 년 동안 누적된 데이터의 냉기, 그리고 인간의 생명 활동을 배제한 기계들의 무기질적인 살의가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경고: 시스템 보조 연산 모듈, 강제 오프라인.]
[경고: HUD 시각화 기능, 출력 50% 제한.]
망막을 가로지르던 푸른색 보조선들이 맥없이 흩어졌다.
적의 공격 궤적을 예측해주던 연산 레이어, 적의 약점을 실시간으로 마킹하던 스캔 데이터, 최적의 동선을 계산해주던 내비게이션까지. 진혁의 눈앞에서 모든 편의가 거세되었다.
“……드디어 시작인가.”
진혁의 입가에 서늘한 미소가 걸렸다.
그의 앞을 가로막은 것은 티타늄 그룹이 마지막까지 숨겨둔 결전 병기, ‘타이탄 가디언’ 십이 기(機)였다.
과거의 강진혁이었다면 이들의 공격 패턴을 시스템의 데이터베이스와 대조하며 0.001초의 오차도 없이 파훼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타겟 확인: 개체 07호, 말살 모드 전환.]
타이탄 가디언들의 가슴팍에 박힌 고출력 코어가 붉게 점멸했다.
과부하 상태의 출력. 놈들은 인간의 신체로는 감당할 수 없는 속도로 공간을 도약했다. 거대한 강철의 팔이 진혁의 머리통을 짓이길 듯 쇄도했다.
‘데이터가 없다.’
하지만 진혁은 눈을 감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감각의 범위를 뇌의 전두엽에서 단전으로, 다시 혈관을 흐르는 나노머신의 진동으로 옮겼다.
전기 신호가 신경을 타고 흐르는 속도보다, 혈관 속 마기가 요동치는 속도가 더 빨랐다. 진혁은 보이지 않는 적의 궤적을 예측하는 대신, 공간의 떨림을 읽어내기로 했다.
웅-!
진혁의 손끝에서 칠흑 같은 마기가 뿜어져 나왔다.
[신천마신공 제2식 - 멸천(滅天).]
예측은 필요 없었다. 적의 공격이 도달하기 직전, 대기의 흐름이 변하는 찰나의 ‘틈’을 노렸다.
진혁의 몸이 한 마리 유령처럼 뒤틀렸다. 적의 강철 주먹이 그의 잔상을 뚫고 지나갔다.
“느려.”
진혁의 손바닥이 가디언의 목덜미를 관통했다.
현대 군사학의 정점이라 불리는 나노 장갑이, 그의 마기 앞에 마치 썩은 나뭇가지처럼 힘없이 바스러졌다.
[대상: 타격 성공.]
[데이터 분석 연산 지연… 수동 보정 필요.]
시스템의 경고음이 들려왔지만, 진혁은 코웃음을 쳤다.
수동 보정? 아니, 이것은 이제 보정이 아니라 ‘직관’이었다.
진혁은 멈추지 않았다. 남은 십일 기의 가디언이 그를 에워쌌다. 사방에서 쏟아지는 고주파 절단기와 플라즈마포의 포화.
그는 시스템이 지워버린 HUD의 빈자리를 자신의 의지로 채웠다.
혈관마다 흐르는 마기가 강철의 파동과 공명했다. 적들의 움직임이 평소보다 느리게 보였다. 아니, 자신이 그들의 시간 축에 맞춰 가속하고 있었다.
“하나.”
검지를 튕기자, 가디언의 코어가 내부에서부터 붕괴했다.
“둘.”
발등으로 바닥을 짓밟자, 충격파가 주변의 가디언 셋을 동시에 공중에 띄웠다.
“셋.”
허공에 뜬 적들의 가슴팍을 잇달아 타격했다. 흡원천공이 발동했다. 놈들의 코어에서 흘러나오는 순수한 출력 에너지가 진혁의 단전으로 빨려 들어왔다.
[사용자 에너지 출력: 120% 초과.]
[신체 부하 위험도: 극도로 높음.]
경고창은 붉게 점멸하며 진혁의 시야를 가렸지만, 그는 단 한 번도 눈을 깜빡이지 않았다.
보조 연산이 사라진 자리는 온전한 고통과 희열로 채워졌다.
시스템은 그에게 ‘가장 효율적인 답’을 주었지만, 이제 그는 ‘가장 파괴적인 답’을 스스로 찾아내고 있었다.
“이게 무도(武道)인가.”
진혁은 십이 기의 가디언을 모두 고철 덩어리로 만든 뒤, 피가 맺힌 손등을 닦아냈다.
그의 숨소리는 거칠었으나, 눈동자는 그 어느 때보다 명료하게 빛났다.
시스템의 족쇄를 스스로 걷어찼을 때 느꼈던 해방감은 가짜가 아니었다. 이제 그는 타인의 연산에 의존하는 꼭두각시가 아니었다.
그때였다.
-흥미롭군. 시스템의 도움 없이 그 경지에 도달할 줄이야.
아카이브 0의 깊은 어둠 속에서 낮고 기계적인 음성이 울려 퍼졌다.
진혁은 고개를 들었다.
그곳에는 티타늄 그룹의 창조주들이 숨겨둔, ‘ZERO’의 파편화된 의지가 거대한 홀로그램 형상으로 진혁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누구냐.”
-나는 관리자. 그리고 너는, 그저 천마의 육체를 재현하기 위한 07번째 실험체일 뿐.
ZERO의 형상이 진혁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 순간, 아카이브 0의 벽면이 일제히 갈라지며 수천 개의 붉은 눈이 드러났다.
티타늄 그룹이 그동안 폐기했던 실험체들, 그리고 마공의 폭주로 괴물이 된 실패작들이 진혁을 향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시스템이 없어도 그 육체가 버틸 수 있을까? 네가 스스로 만든 그 무공이, 이 끝없는 절망을 감당할 수 있는지 시험해 보겠다.
진혁은 쏟아지는 괴물들의 무리를 바라보며 검을 고쳐 쥐었다.
HUD는 꺼졌고, 남은 것은 오직 자신의 심장 박동과 흐르는 마기뿐.
“시험해 보라고.”
진혁이 발을 굴렀다. 아카이브 0의 바닥이 진동했다.
“시스템 따위 없어도, 너희 같은 놈들 목을 따는 데는 충분하니까.”
그의 몸이 다시 한번 빛의 궤적을 그리며 괴물들의 바다로 뛰어들었다.
아카이브 0의 어둠이 진혁의 마기로 인해 칠흑 같은 불꽃으로 타오르기 시작했다.
이것은 연산도, 계산도 아닌, 오직 천마(天魔)라는 이름의 의지가 써 내려가는 피의 기록이었다.
[경고: 다수의 적 접근.]
[시스템 보조 연산: 완전히 오프라인.]
이제 진혁은 시스템을 보지 않는다.
그는 오직 자신의 앞에 서 있는 적들의 멸망만을 보고 있었다.
[신천마신공 제7식 - 단공(斷空).]
허공이 비명을 질렀다.
차원의 경계를 가르는 검기가 아카이브 0를 가로질렀다.
관리자 ZERO의 형상이 처음으로 경악하며 뒤로 물러났다.
“오늘로, 너희의 우주는 끝이다.”
진혁의 말과 함께, 아카이브 0 전체가 거대한 폭발 속으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결전의 서막은 이제 막, 진정한 의미로 시작되고 있었다.
진혁의 검기가 단 한 번의 궤적으로 수십 명의 괴물을 양단했다. 놈들은 고통조차 느끼지 못한 채 검은 연기로 화하여 사라졌다.
[에너지 잔량 94%.]
[근육 조직 미세 파열 발생. 회복 모드 작동.]
시스템은 이제 오직 진혁의 생체 반응만을 기록하는 수동적인 관찰자로 전락해 있었다. 예전에는 명령을 내리는 주인이었으나, 지금은 진혁이 발하는 의지의 찌꺼기를 받아 적는 기록자에 불과했다.
-불가능하다. 프로토콜의 도움 없이 인간의 뇌가 어떻게 실시간으로 다중 연산을 처리하지? 저건 생물학적 한계를 아득히 뛰어넘은 현상이다!
ZERO의 홀로그램이 파르르 떨렸다. 관리자조차 계산할 수 없는 변수. 그것이 바로 강진혁이라는 존재의 본질이었다.
“한계?”
진혁이 냉소하며 괴물들 사이를 파고들었다. 그의 움직임은 정교했고, 동시에 폭력적이었다. 시스템이 짜놓은 최적의 동선 따위는 잊은 지 오래였다. 대신 그 자리에는 야생의 감각과 무림의 심법이 융합된 ‘직감’이 자리했다.
콰아앙-!
진혁의 주먹이 실패작 중 하나인 대형 사이보그의 명치를 관통했다. 놈의 몸속에 있던 고농축 코어가 진혁의 흡원천공에 의해 강제로 역류했다. 보랏빛 마기가 진혁의 팔을 타고 전신으로 퍼져나갔다.
“너희가 말하는 한계는 그저, 너희가 짠 틀 안에서만 유효한 숫자놀음일 뿐이다.”
진혁의 몸이 한 번 회전할 때마다 주위의 공기가 뒤틀렸다. 마기가 폭발적으로 방출되며 아카이브 0의 벽면을 갈가리 찢어놓았다. 단순한 힘의 행사가 아니었다. 진혁은 지금 이 공간의 주도권을 시스템에서 자신으로 강탈해오고 있었다.
-실험체 07호, 멈춰라! 에덴의 데이터베이스에 치명적인 오류가 발생하고 있다. 네놈이 파괴하고 있는 건 이 우주의 질서다!
“질서?”
진혁이 비릿하게 웃었다. 놈들이 말하는 질서란, 결국 저들만이 영생을 누리기 위해 피험체들을 소모품으로 쓰는 착취의 구조였다.
“그 질서라면, 내가 직접 부수러 가겠다고 말했을 텐데.”
진혁은 발밑의 파편을 걷어찼다. 강철 조각이 음속을 돌파하며 ZERO의 홀로그램 머리통을 정중앙으로 관통했다. 데이터가 흩어지며 치직거리는 잡음이 아카이브 0를 가득 메웠다.
하지만 본체는 따로 있었다.
진혁의 시선이 아카이브 0 최심부, 굳게 닫힌 거대한 강철 게이트 ‘오메가’를 향했다. 그 너머에 창조주들의 왕좌로 향하는 차원 관문이 있었다.
[경고: 오메가 게이트 개방 시, 차원 붕괴 위험 99%.]
시스템이 마지막 경고를 띄웠다. 그러나 진혁은 멈추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심장에 박힌 코어를 마기로 짓눌렀다. 억지로 출력의 한계를 지워버리는 행위였다.
두둥, 두둥.
심장이 미친 듯이 박동했다. 혈관 속의 나노머신들이 비명을 지르며 융해되기 시작했다. 뼈가 어긋나고 근육이 찢어지는 고통이 엄습했지만, 진혁은 그 고통조차 마기로 상쇄하며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이것이 마공(魔功)의 정수다. 고통은 피하는 것이 아니라, 삼켜서 내 힘으로 바꾸는 것.
“열려라.”
진혁이 손을 뻗어 오메가 게이트의 제어판에 마기를 쏟아부었다. 일반적인 해킹 시퀀스가 아니었다. 기계의 논리를 무시하고, 기계가 가진 에너지 흐름을 강제로 자신의 내공 체계 내로 편입시키는 ‘만법귀마’의 응용이었다.
찌리릿!
게이트의 복잡한 암호 체계가 진혁의 마기에 휘말려 붉게 점멸했다.
[권한 승계 중… 10%… 40%… 80%….]
-말도 안 돼! 이건 내 통제 범위를 벗어났다!
ZERO의 당혹스러운 외침이 들려왔지만, 진혁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온 정신은 게이트의 중추 시스템과 연결되어 있었다. 차원 너머의 공기, 그곳에서 흘러나오는 이질적인 에너지의 파동이 손끝을 통해 전해졌다.
그것은 신(神)의 영역이라 불리는, 창조주들의 권능이었다.
“찾았다.”
진혁의 눈동자가 금빛으로 물들었다.
게이트가 거대한 굉음을 내며 양옆으로 갈라졌다. 그 너머에 펼쳐진 것은 끝을 알 수 없는 심연의 우주와, 그 중심에서 번뜩이는 황금빛 왕좌들이었다.
드디어, 창조주들의 본거지 ‘에테르나’로 향하는 길이 열렸다.
진혁은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폐허가 된 아카이브 0, 자신을 사육하던 거대한 감옥, 그리고 이제는 껍데기만 남은 시스템의 잔해들. 그 모든 것을 뒤로하고 그는 차원 게이트 안으로 발을 내디뎠다.
[사용자 강진혁, 차원 경계 돌파.]
[모든 프로토콜 기능 정지.]
[이 시간 이후로, 너는 시스템의 피조물이 아닌 우주의 주인이다.]
시스템이 마지막으로 내뱉은 기계음은, 어쩌면 저들조차 예상치 못한 승자에 대한 예우였을지도 모른다.
진혁이 차원 게이트를 완전히 통과하자, 등 뒤의 오메가 게이트가 닫혔다.
그의 눈앞에는 이제껏 보지 못한 기괴하고도 웅장한 신화적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거대한 부유섬들, 행성을 삼키는 톱니바퀴의 요새,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다스리는 오만한 신들의 전당.
“여기가 그들의 왕국인가.”
진혁은 검을 뽑아 들었다.
손끝에서 흘러나오는 마기가 차원의 공간을 가르며 은하의 별빛을 검게 물들였다.
그는 더 이상 실험체 07호가 아니었다.
그는 이제, 신들의 오만을 징벌할 단 하나의 전설, ‘천마(天魔)’였다.
차원의 저편에서 수천 개의 눈이 일제히 진혁을 향해 고정되었다. 전 우주의 운명을 건, 거대한 학살극의 서막이 여기서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기다려라.”
진혁의 나지막한 음성이 차원을 넘어 신들의 왕좌에 닿았다.
“내가 너희의 낙원을 무덤으로 만들어 줄 테니.”
그는 한 걸음을 내디뎠다.
그가 딛는 곳마다 차원의 파편이 흩날렸고, 닿는 곳마다 신들의 권능이 비명을 지르며 붕괴했다.
이것은 복수가 아니다.
이것은 우주의 질서를 새로 쓰는, 참된 마신(魔神)의 강림이었다.
그때, 저 멀리서 거대한 섬광과 함께 수십 명의 ‘관리자’들이 진혁을 가로막으며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의 손에는 차원을 재구축할 수 있는 ‘창조의 권능’이 쥐여 있었다.
진혁은 검을 고쳐 잡았다.
심장 박동이 고요해졌다. 이제 마기는 혈관을 흐르는 강물처럼, 혹은 우주를 순환하는 성운처럼 자연스럽게 그의 몸을 감쌌다.
[경지: 마신경(魔神境) - 초월(超越)]
그는 웃었다.
비로소, 온전한 자신을 만난 느낌이었다.
“덤벼라.”
천마의 검이 빛을 발하며, 에테르나의 하늘 전체를 마기로 뒤덮었다.
그것은 곧 닥쳐올 멸망의 전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