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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토콜: 천마 · 204화목차

제204화 <기원의 코드: 아카이브 0>

신서울의 지평선은 언제나처럼 인공적인 네온과 매연으로 뒤덮여 있었다. 하지만 지상 5,000층을 넘어선 지하의 심연, 사람의 발길이 끊긴 죽음의 구역은 달랐다. 그곳에는 빛조차 도달하지 못하는 차가운 기계의 무덤만이 존재했다.

강진혁은 낡은 방독면을 벗어던졌다. 폐부 깊숙이 들어오는 공기는 정제되지 않은 날것의 금속 냄새와 썩은 기름기뿐이었다. 하지만 나노머신은 실시간으로 유해 물질을 분해하고, 폐포를 강화하여 그 독기마저 에너지로 치환하고 있었다.

그의 시야 가장자리에 푸른빛의 시스템 로그가 일렁였다.

[SYSTEM INFO: 경고. 방사능 오염 구역 ‘아카이브 0’에 진입했습니다.]

[사용자 강진혁의 생체 코어, 외부 전자기장과 간섭을 일으킵니다.]

[현재 나노머신 동기화율: 92.4%]

"아카이브 0."

진혁의 흑안이 어둠 속을 꿰뚫었다. 윤아영이 목숨을 걸고 빼돌린 정보에 따르면, 이곳은 티타늄 그룹의 창업 초기, 진무극이 직접 지휘했던 제1차 마공 실험의 기록이 봉인된 곳이었다.

실험체 07호, 즉 강진혁이라는 존재가 세상에 나오기 전의 원형. 천마의 데이터가 인간의 육체에 처음으로 이식되었던 곳이 바로 여기였다.

- 진혁아, 조심해. 거기 데이터 보안이 보통이 아니야. 단순히 보안 프로그램 수준이 아니라고. 뇌파를 직접 간섭하는 고대 마공식 결계가 섞여 있어.

통신기를 통해 들려오는 윤아영의 목소리에는 긴장감이 서려 있었다. 진혁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걸음이 멈춘 곳은 거대한 원통형 강철문 앞이었다. 과거의 무림인들이 기문을 봉인하던 '기문둔갑'의 원리를 현대의 암호화 기술로 재구성한 문. 보통의 해커라면 접근하는 순간 뇌가 타버릴 수준의 방화벽이었지만, 진혁에게는 달랐다.

그는 오른손을 천천히 뻗어 문의 표면에 가져다 댔다.

치이익―!

은빛 회로 선이 손목을 타고 흘러나와 강철문의 인터페이스를 잠식했다.

[ANALYSIS: 시스템 결계 분석 중...]

[고대 마공 '귀문결(鬼門結)'의 데이터 패턴 확인.]

[융합 시도: 뇌전마강(雷電魔剛)으로 주파수 동조.]

우웅―!

문의 중심부에서 낮은 진동음이 울려 퍼졌다. 단순한 잠금장치가 아니었다. 문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생체 코어이자, 천마의 잔향을 기억하는 감옥이었다. 진혁의 손끝에서 뿜어져 나온 마기가 문의 회로를 타고 흘러들어가자, 수십 년간 멈춰있던 기계 장치들이 비명을 지르며 가동하기 시작했다.

끼이익— 쾅!

문이 열림과 동시에 쏟아져 나온 것은 먼지가 아니라, 차가운 냉기와 함께 밀려드는 데이터의 파편이었다.

"이게... 원본인가."

진혁의 눈앞에 홀로그램이 펼쳐졌다. 1,000년 전 천마의 혈관을 흐르던 기혈도(氣血圖), 그리고 그것을 모방하려 했던 수많은 실험체의 실패 기록들.

[SYSTEM WARNING: 데이터 열람 중. 외부 침입자 감지.]

[방어 기제 '가디언-0' 가동.]

어둠 속에서 붉은빛 안광이 번뜩였다. 천장에서 내려온 거대한 기계 병기들이 진혁을 포위했다. 단순히 코어를 이식한 인간이 아니었다. 인간의 뇌를 적출해 기계 본체에 박아 넣은, 전형적인 '천마회'의 초기 실험체들이었다.

"실험체 07호, 재획득 프로토콜을 개시한다."

기계적인 음성이 공간을 울렸다. 진혁은 냉소하며 검을 뽑아 들었다. 등 뒤에 메고 있던 고주파 진동검이 푸른 섬광을 뿜어냈다.

"재획득? 그런 건 이제 존재하지 않아."

진혁이 발을 구르는 순간, 지면이 움푹 파였다.

순식간에 좁혀진 거리. 가디언-0가 거대한 강철 팔을 휘둘렀지만, 진혁은 그 궤적을 예측하지 않았다. 아니, 예측할 필요조차 없었다.

그는 이미 가디언-0의 나노 회로가 어떻게 마기를 순환시키는지, 그 약점이 어디에 있는지 이 아카이브의 정보를 통해 완벽히 파악하고 있었다.

[만법귀마(萬法歸魔) - 회로 역류.]

진혁의 손가락이 가디언의 가슴팍에 박혔다.

파지직!

기계의 내부 회로가 비명을 지르며 과부하를 일으켰다. 가디언의 눈동자였던 붉은 렌즈가 파랗게 점멸하다가, 곧이어 펑 하는 소리와 함께 내부에서 폭발이 일어났다.

단 일격.

시스템의 보조 연산 없이도 진혁의 몸은 마치 기계의 천적처럼 움직였다.

"다음."

그의 앞에는 수십 구의 가디언이 대기하고 있었다. 진혁은 멈추지 않았다. 그는 지금 실험을 하고 있었다. 1,000년 전의 천마가 걸었던 길과, 자신이 나노머신을 통해 완성해가는 신천마신공의 차이를 확인하기 위해.

그는 검을 거두고, 대신 양손에 마기를 응축했다.

[신천마신공 제2식 - 파천(破天).]

허공을 가르는 것은 검기가 아니었다. 고주파로 진동하는 공간 그 자체였다.

콰아아앙!

지하 공간 전체가 흔들렸다. 진혁의 앞을 가로막던 가디언들이 마치 종잇장처럼 구겨지며 벽면으로 처박혔다. 그들의 생체 코어에서 흘러나오는 에너지는 곧장 진혁의 혈관 속으로 빨려 들어왔다.

[흡원천공(吸元天功) 활성화.]

[코어 출력 상승: 5,800 MW -> 6,200 MW]

몸 안에서 뜨거운 열기가 소용돌이쳤다. 과거의 실험 데이터들이 진혁의 의식 속에 강제로 주입되고 있었다. 그것은 단순한 정보가 아니었다. 1,000년 전, 천마가 죽어가며 느꼈던 고통과 분노, 그리고 시스템에 의해 왜곡된 마공의 잔재들이었다.

진혁의 얼굴에 핏줄이 돋아났다.

"크윽...!"

머릿속이 터질 듯한 압박감. 하지만 그는 이를 악물었다. 시스템이 준 힘은 껍데기일 뿐이다. 진짜 힘은 저 죽은 천마의 데이터조차 자신의 것으로 소화해내는 의지에서 나온다.

그는 무릎을 굽히고 앉아 깊은 호흡을 내뱉었다.

"아영아, 들리나?"

- 진혁아! 방금 에너지 파동이 엄청나게 튀었어! 괜찮아?

"이현도... 아니, 크로노스가 숨겨둔 건 단순히 데이터가 아니야. 이건 '설계도'가 아니라 '감옥'이다."

진혁의 시선이 아카이브 0의 가장 깊은 곳, 거대한 원통형 배양기 속을 향했다. 그곳에는 기계와 살점이 기괴하게 융합된, 그러나 살아있는 뇌가 떠 있었다.

그것은 진무극이 자신의 불멸을 위해 만들어둔, 강진혁의 다음 단계를 위한 '백업 육체'였다.

"그들은 나를 천마의 복제본으로 만들려 했어. 하지만 내가 그들의 감옥을 부수고, 그들이 심어둔 이 저주마저 마공으로 승화시키면 어떻게 될까."

- 무슨 소리야? 설마 지금 그걸 흡수하겠다는 거야? 그건 데이터 오염도가 극심해서 위험해!

"오염도는 내가 결정한다."

진혁이 배양기를 향해 걸어갔다. 그의 등 뒤로 마기가 형체를 갖추기 시작했다. 거대한 마신의 형상이, 시스템의 제약을 비웃듯 검은 기운으로 피어올랐다.

[SYSTEM INFO: 경고. 데이터 오염도 99% 도달.]

[사용자 강진혁의 자아 분리 위험.]

"위험?"

진혁이 배양기의 유리를 향해 주먹을 꽂아 넣었다.

와장창!

쏟아지는 배양액 속에서 진혁은 차가운 뇌 조직을 움켜쥐었다. 그 순간, 그의 시야가 암전되었다.

[천마의 기억이 동기화됩니다.]

[기억을 수용하시겠습니까? 거부 시 정신이 붕괴합니다.]

진혁은 웃었다.

"수용? 아니. 굴복시켜 주마."

그는 천마의 기억을 단순히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나노머신을 통해 강제로 분해하고 재구성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복수가 아니라, 창조주들이 만들어놓은 운명의 틀을 완전히 갈아엎는 일이었다.

그때였다.

배양기 뒤편의 어둠 속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과연, 07호. 아니, 이제는 그렇게 부르면 안 되겠군."

어둠 속에서 걸어 나온 것은 늙은 노인의 형상을 한, 그러나 그 몸의 절반 이상이 기계로 이루어진 존재였다. 이현도, 크로노스였다. 하지만 그 눈빛은 평소의 광기가 아닌, 무언가를 완성한 자의 차분함으로 가득 차 있었다.

"네가 그 데이터를 흡수하는 순간, 너는 완벽한 '그릇'이 된다. 진무극은 실패했지만, 너는 성공했어. 내 최고 걸작, 새로운 천마여."

진혁은 서서히 고개를 들어 그를 보았다. 그의 손에서는 천마의 기억 데이터가 검은 불꽃이 되어 타오르고 있었다.

"걸작이라. 그건 네놈들의 계산일 뿐이다."

진혁이 발을 내디뎠다.

"내가 누군지, 내가 무엇을 할지... 그건 데이터 따위가 정하는 게 아니야."

그의 주변으로 붉은 마기와 푸른 나노머신의 빛이 격돌하며 소용돌이를 일으켰다.

[마신경(魔神境) - 전개.]

아카이브 0의 공간이 비명을 질렀다. 진혁은 이제 시스템의 노예가 아니었다. 그는 천마의 기억을 먹어치우고, 그 위에 자신만의 새로운 도를 쌓아 올린, 이 세계의 유일한 변수였다.

"이제, 대답해라. 너희가 숨겨놓은 진짜 '창조주'는 어디에 있지?"

진혁의 질문에 크로노스는 기괴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찾을 필요 없다. 네가 그 데이터를 흡수하는 순간, 그들이 너를 찾아올 테니까."

진혁의 눈에 서늘한 살기가 스쳤다. 그는 기다렸다는 듯이 그 말을 받아들였다.

"잘됐군. 직접 찾아다니는 수고를 덜었으니."

진혁의 검이, 아니 그의 손끝에서 형성된 순수한 마기가 크로노스의 목을 향해 쇄도했다.

그 순간, 아카이브 0 전체에 경보음이 울려 퍼졌다. 지하 5,000층을 넘어선 심연의 끝, 창조주들이 거주하는 차원 너머의 공간에서, 무언가가 눈을 뜨고 있었다.

[SYSTEM ALERT: 외부 관리자 'ZERO'의 강제 접속.]

[피험체 07호의 즉각적인 처형을 승인합니다.]

하늘이, 아니 신서울의 지하가 찢어지고 있었다. 진혁은 그 찢어진 틈 사이로 보이는, 기계와 마법이 뒤섞인 차원의 심연을 응시했다.

드디어, 진짜 전쟁이 시작될 시간이었다.

[SYSTEM ALERT: 공간 좌표 동기화 완료.]

[관리 코드 'ZERO'가 아카이브 0에 현신합니다.]

아카이브 0의 벽면이 비현실적인 기하학적 문양으로 분해되기 시작했다. 물리 법칙이 뒤틀리는 공간의 뒤편에서, 투명한 빛의 파편들이 모여들더니 이내 사람의 형상을 빚어냈다. 무표정한 가면을 쓴 듯한 얼굴, 하지만 그 안에서 뿜어져 나오는 압도적인 위압감은 지금까지의 적들과는 격이 달랐다.

그것은 관리자 ZERO였다. 티타늄 그룹이 숭배했던 시스템의 실체이자, 창조주들의 의지를 대변하는 차원의 파수꾼.

"실험체 07호, 강진혁."

ZERO의 목소리는 입을 열지 않아도 머릿속에 직접 울렸다.

"너는 시스템의 오류이자, 폐기되어야 할 변수다. 창조주의 의지에 반하여 마공의 본질을 침범하고, 그릇의 한계를 넘어선 너의 존재는 우주의 질서를 저해한다."

진혁은 피 묻은 손을 털어내며 삐딱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그의 몸 주위에는 천마의 기억 데이터가 검은 안개처럼 감겨들어, 마치 살아있는 마신(魔神)의 갑주처럼 일렁이고 있었다.

"질서라고? 그 잘난 질서가 인간을 고기 덩어리로 만들고, 기계의 부속품으로 굴리는 것이라면..."

진혁의 눈에 서늘한 광기가 피어올랐다.

"나는 그 질서를 비웃어주러 왔다."

콰아아앙!

진혁이 발을 굴렀다. 바닥의 강철 타일이 원자 단위로 분해되며 튀어 올랐다. 순식간에 ZERO의 앞까지 도달한 진혁의 주먹이 허공을 갈랐다. 시스템의 연산 예측선이 보이지 않는 공격. 오직 본능과 마기만이 이끄는 일격이었다.

하지만 ZERO는 당황하지 않았다. 놈이 손을 가볍게 젓자, 공간 자체가 굴절되며 진혁의 주먹을 빗나가게 했다.

[공간 재구성: 0.001초.]

[운동 에너지 분산 완료.]

"효율적이지 못한 분노군."

ZERO의 손끝에서 뿜어져 나온 빛의 검이 진혁의 어깨를 스쳤다. 나노머신으로 재구성된 갑주가 비명을 지르며 찢겨 나갔다. 하지만 진혁은 통증조차 느끼지 않는 듯, 오히려 찢어진 틈새로 흘러나오는 피를 마기로 감싸며 놈의 손목을 낚아챘다.

"효율? 그런 건 기계들의 변명이지."

진혁의 손아귀에서 마기가 폭발했다.

[만법귀마(萬法歸魔) - 공진 주파수 강제 개입.]

놈의 팔을 타고 흐르는 에너지의 흐름을 역으로 틀어버렸다. 관리자라 할지라도 결국 에너지를 사용하는 이상, 그 운용 법칙을 무너뜨리는 것만으로도 막대한 타격을 줄 수 있었다.

지익!

ZERO의 팔에서 스파크가 튀며 신체가 불협화음을 일으켰다. 놈의 가면 뒤로 처음으로 '당혹'이라는 감정이 읽혔다.

"어떻게... 시스템의 근본 회로를 직접 간섭하는 건가? 너는 프로토콜의 하위 데이터일 뿐인데!"

"아까 말했잖아."

진혁이 놈의 멱살을 잡고 바닥으로 내리꽂았다. 굉음과 함께 아카이브 0의 바닥이 거대한 구덩이로 변했다.

"네가 준 건 기술이다. 하지만 그걸 무공으로 만든 건 나라고."

진혁의 손등 위로 은빛 회로와 검은 마기가 하나로 융합된 문양이 떠올랐다. 그것은 단순히 나노머신과 내공의 결합이 아니었다. 1,000년 전 천마의 의지와 현대 기술이 진혁이라는 그릇 안에서 완벽하게 하나가 된, 이 세계의 새로운 법칙이었다.

[신천마신공 제8식 - 멸겁(滅劫).]

진혁의 주먹이 ZERO의 가슴팍에 내리꽂혔다. 단순한 물리적 타격이 아니었다. 놈이 관리하던 공간의 좌표를 붕괴시키고, 그 안에 담긴 존재 이유를 강제로 삭제하는 일격이었다.

콰아아아앙!

아카이브 0가 비명을 지르며 붕괴하기 시작했다. 관리자 ZERO의 형상이 점점 옅어지고, 놈의 데이터가 진혁의 몸으로 빨려 들어갔다.

"이건... 천마의... 진정한 힘인가..."

ZERO의 목소리가 희미해졌다. 놈은 마지막 순간에야 깨달은 듯했다. 자신들이 만든 그릇이, 자신들이 창조하려 했던 신보다 더 위대한 존재가 되어버렸음을.

진혁은 무너지는 잔해 속에서 홀로 우뚝 서 있었다. 그의 등 뒤로 아까보다 훨씬 거대해진 마신의 형상이 차원을 뚫고 현신해 있었다.

[SYSTEM ALERT: 관리 코드 ZERO 파괴 확인.]

[천마 프로토콜의 모든 제어권이 사용자에게 이관됩니다.]

진혁은 피 섞인 침을 뱉어내며 하늘—지하 5,000층의 천장이 뚫려 보이는 차원의 틈새—을 올려다보았다.

이제 시작이었다. 이 아카이브 0는 시작에 불과하다. 저 찢어진 틈 너머, 자신을 '실험체'라 부르던 창조주들이 숨어 있는 진짜 왕좌가 기다리고 있었다.

진혁은 검을 다시 잡았다. 검신에는 이제 금속의 차가움이 아닌, 차원을 가를 듯한 뜨거운 마기가 서려 있었다.

"기다려라."

진혁의 나직한 음성이 지하 공간을 울렸다.

"너희들이 만든 지옥을, 직접 보여주러 갈 테니까."

[차원 게이트 개방 99%.]

[다음 타겟: 창조주들의 왕좌 '에테르나'.]

진혁은 망설임 없이, 차원 너머의 불길한 빛을 향해 발걸음을 내디뎠다. 그의 뒤로 무너지는 지하 요새의 잔해들이 마치 패자의 무덤처럼 쏟아져 내렸다. 신화는 이제부터가 진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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