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3화 숨겨진 백도어
티타늄 타워의 잔해는 여전히 불타고 있었다.
강진혁의 발치 아래, 세계의 지배자라 자부하던 진무극의 육신은 이제 그저 타버린 고철과 다를 바 없었다. 시스템의 관리 코드들을 모조리 소멸시킨 직후의 공기는 기묘할 정도로 고요했다. 모든 연산 장치가 멈춘 뒤에 찾아온 정적이었다.
진혁은 피 묻은 장갑을 벗어 던졌다. 그 안쪽, 은빛 회로가 흐르던 피부 위로 푸른빛이 희미하게 명멸했다. HUD(Head-Up Display)는 이미 사라졌지만, 그보다 더 선명한 감각이 신경계를 지배하고 있었다.
"윤아영."
정적을 깬 것은 진혁의 낮고 차가운 음성이었다.
[네, 진혁 씨. 신호 잡혔어요.]
공간을 비집고 들려온 윤아영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훨씬 다급했다.
[타워의 메인 서버와 연결된 데이터 패킷을 전부 끌어모으고 있어요. 그런데…… 이상해요. 천마 프로토콜의 핵심부에서 거대한 락(Lock)이 걸린 구역이 감지됩니다. 제 권한으로는 접근조차 불가능해요.]
진혁의 미간이 좁혀졌다.
이미 시스템은 삭제했다. 그가 마신경의 경지에 도달하며 펼친 '절멸'의 기운은 디지털화된 모든 명령 체계를 붕괴시켰을 텐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삭제되지 않은 데이터가 있다는 것인가.
"분석해. 내 몸에 심어진 나노머신과 프로토콜의 근간을 건드리지 말고, 그 락의 성질만 파악해."
[알았어요. 30초만요. 아니…… 잠시만, 이건 대체……?]
윤아영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해커로서 그녀가 이토록 동요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진혁은 묵묵히 폐허 위에 서서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았다. 단전에서 휘몰아치는 마기는 이제 인공적인 연산을 거치지 않고도 스스로 궤도를 그리며 회전하고 있었다.
이것이 마신경. 시스템의 도움 없이, 내 안의 진리를 구현하는 경지.
하지만 그 근본이 되는 '천마 프로토콜'이라는 그릇 자체에 결함이 있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진혁 씨, 찾았어요. 이건 '백도어'예요. 그것도 아주 고도화된, 창조주의 서명이 담긴 마스터 오버라이드 코드예요.]
"말해."
[진무극이 죽기 직전까지 사용했던 건, 프로토콜의 전체 기능이 아니었어요. 그는 줄곧 이 백도어를 통해 진혁 씨의 나노머신을 원격으로 강제 제어할 수 있는 루트를 확보하고 있었어요. 만약 진혁 씨가 시스템을 완전히 삭제하지 않았다면, 진무극은 언제든 버튼 하나로 진혁 씨의 신체 회로를 역으로 붕괴시킬 수 있었을 거예요.]
진혁의 눈빛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창조주들은 처음부터 그를 자신들의 장난감으로 길들일 생각이었다. 진무극은 그저 그 장난감을 관리하는 관리인에 불과했고, 그 관리인이 배신할 경우를 대비해 '즉결 처형 장치'를 심어두었던 것이다.
"지금 그 코드는 어디에 있지?"
[제어권은 진무극과 함께 소멸한 것처럼 보이지만…… 아니, 아니에요. 이 코드는 진무극의 생체 코어와 동기화되어 있었던 게 아니에요. 독자적인 무선 주파수로, 저 멀리 '에덴'의 심장부와 실시간으로 연결되어 있었어요.]
윤아영의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진혁 씨, 지금 그 백도어가 '활성 상태'예요. 진무극은 죽었지만, 그가 죽음과 동시에 발송한 트리거가 프로토콜의 심층 데이터를 차원 너머로 전송하고 있어요. 그들은 지금 진혁 씨가 마신경에 도달했다는 사실을 데이터화해서 수집하고 있어요!]
"창조주들이 내 무공의 원리를 학습하고 있다는 건가."
[네! 단순히 데이터만 빼가는 게 아니라, 역으로 진혁 씨의 마신경을 봉인할 수 있는 '역주파수'를 생성하고 있어요. 지금 즉시 프로토콜의 소스코드를 뜯어내지 않으면, 그들이 보낸 펄스에 의해 진혁 씨의 신경계가 마비될 거예요.]
진혁은 입가에 비릿한 미소를 머금었다.
사방이 적인 상황. 이제는 시스템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 이 시스템을 설계한 신(神)을 참칭하는 자들과 싸워야 한다.
"아영, 할 수 있겠나?"
[제 모든 해킹 실력을 쏟아부어서, 저들이 보내는 신호를 역추적할게요. 진혁 씨는 그 백도어의 '물리적 통로'를 닫아버려야 해요. 프로토콜이 진혁 씨의 혈관을 타고 흐르는 이상, 백도어는 심장 부근의 코어에 연결되어 있을 거예요.]
진혁은 가슴 중앙, 뜨겁게 고동치는 생체 코어에 손을 얹었다.
천마 프로토콜이 심어진 자리.
그곳에 박혀 있는 저들의 족쇄를 스스로 뽑아내야 한다.
"좋다. 시작하지."
진혁은 두 눈을 감았다.
외부의 소음이 차단되고, 온 신경이 신체 내부의 미세한 흐름으로 집중되었다.
[천마 프로토콜 제어권 분리 작업 시작합니다. 10초 뒤에 백도어의 위치를 강제로 개방할게요.]
숫자가 카운트다운을 시작했다.
10, 9, 8…….
진혁의 기운이 폭발적으로 팽창했다. 마신경의 경지에 도달한 그의 마기는 이제 파괴적인 에너지를 넘어, 신체 구성 요소 하나하나를 재배열하는 창조의 힘으로 변모해 있었다.
3, 2, 1.
[열렸어요! 심장 하단 0.5밀리미터, 나노 회로의 교차점!]
그곳이었다.
진무극이 자신의 불멸을 위해, 그리고 반란을 막기 위해 심어둔 악의적인 백도어.
진혁은 망설임 없이 손가락을 자신의 흉부로 찔러 넣었다.
"크윽……!"
살점이 찢어지고 피가 튀었지만, 진혁은 멈추지 않았다.
검지를 회로가 엉킨 부위로 밀어 넣어, 실처럼 얽힌 나노 섬유를 손끝으로 집어 올렸다.
[진혁 씨! 제발 멈춰요! 그건 코어와 직결되어 있어서, 잘못 뽑으면 코어가 쇼트를 일으켜요!]
"말했지."
진혁이 차갑게 읊조렸다.
"네가 준 건 기술일 뿐이라고."
그는 코어의 출력을 강제로 개방했다.
4,500MW의 출력이 단숨에 10,000MW를 넘어서며 요동쳤다. 고통은 차라리 축복이었다. 백도어가 연결된 회로를 마기로 감싸 쥐고, 그 안에서 저들이 심어둔 '강제 제어 신호'의 주파수를 분석했다.
위잉-!
신체 내부에서 비정상적인 소음이 들려왔다.
진혁의 눈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경고! 강제 제어 신호가 역류합니다! 진혁 씨, 정신 차리세요!]
"역류? 아니, 이건 기회다."
진혁은 그 백도어를 단순히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마기를 그 통로를 통해 역으로 쏘아 보냈다.
창조주들의 거처, '에덴'으로.
네놈들이 나를 관찰하고 있다면, 그 대가로 내 마기의 맛을 똑똑히 보게 해주마.
진혁의 손끝에서 뿜어져 나온 검은 불꽃이 백도어의 통로를 타고 순식간에 사라졌다.
동시에 타워 전체가 거대한 진동에 휩싸였다.
[성공했어요……! 백도어의 연결이 끊겼습니다! 그런데, 진혁 씨…… 에덴 쪽에서 엄청난 양의 데이터 오류가 감지돼요. 진혁 씨가 보낸 마기가 그들의 네트워크를 오염시키고 있어요!]
진혁은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흉부에서 피투성이가 된 나노 회로 가닥을 뜯어냈다.
바닥에 떨어진 은빛 실타래가 바닥에서 파르르 떨리더니 이내 재가 되어 사라졌다.
"이제 시작이다."
진혁은 찢어진 가슴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고개를 들었다.
그의 검은 눈동자에는 더 이상 시스템의 데이터가 아닌, 창조주들을 향한 살의가 서려 있었다.
[진혁 씨, 에덴에서 발신한 역추적 신호가 멈췄어요. 하지만…… 그들이 대규모 군사 병기를 신서울로 전송하기 시작했어요. 이건 단순한 실험체 회수가 아니에요. 전면전이에요.]
"상관없다."
진혁은 부러진 칼날을 주워 들었다.
그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마기가 타워의 잔해를 공중으로 띄워 올렸다.
"기다리고 있었으니까."
그때였다.
하늘이 갈라지며 신서울의 상공 위로 거대한 차원의 문이 열렸다.
그 안에서 쏟아져 나오는 것은 강철의 군단.
창조주들이 보낸 진정한 사냥꾼들이었다.
진혁은 그 광경을 보며 소름 끼칠 정도로 차분하게 웃었다.
이제 진짜 '천마'가 누구인지, 저들에게 똑똑히 가르쳐 줄 시간이었다.
"덤벼라."
그의 발밑에서부터 대지가 검게 물들기 시작했다.
신천마신공의 진정한 위력이, 이제 막 차원 너머의 신들을 향해 겨눠지고 있었다.
[진혁 씨, 정체불명의 신호가 도착했어요. '아카이브 0'…… 크로노스가 남긴 마지막 정보예요.]
진혁의 눈이 가늘어졌다.
창조주들과의 전쟁 한복판, 운명을 결정지을 진실이 그곳에 있었다.
[아카이브 0라.]
진혁의 뇌리 속에 크로노스, 이현도의 신경질적인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그는 단순히 미친 과학자가 아니었다. 티타늄 그룹의 심장부를 설계하고, 천마 프로토콜이라는 거대한 괴물을 잉태시킨 산파. 그가 왜 자신의 연구를 스스로 무너뜨리려 했는지, 그리고 왜 자신 같은 실험체에게 '아카이브 0'라는 단서를 남겼는지 이제야 퍼즐이 맞춰지는 듯했다.
[진혁 씨, 좌표를 보낼게요. 신서울 외곽, 버려진 폐기물 처리 구역 지하예요. 지금 창조주들의 군단이 상공을 덮고 있어서 정면 돌파는 불가능해요. 지하 수로를 이용해야 해요.]
"윤아영."
[네?]
"네가 보낸 좌표, 그게 단순한 데이터 센터가 아닐 거라는 확신이 든다."
[무슨 뜻이죠?]
"프로토콜의 원본은 티타늄 타워 메인 서버에 있었지. 그런데 굳이 폐기된 구역에 '아카이브 0'를 따로 숨겼다는 건, 그곳에 시스템의 통제를 받지 않는 '무언가'가 있다는 뜻이야."
진혁은 타워의 잔해를 박차고 나갔다. 등 뒤에서 몰아치는 차원 군단의 함포 사격이 건물을 가루로 만들었지만, 그는 마치 폭풍우를 가르는 신화 속의 존재처럼 흔들림 없이 나아갔다.
공중을 가득 메운 강철의 비행체들은 진혁을 향해 무차별적인 궤도 폭격을 퍼붓기 시작했다. 붉은 레이저가 신서울의 밤하늘을 난도질했다. 하지만 진혁은 방어막을 치는 대신, 마기를 검게 응축해 허공을 베어 넘겼다.
[신천마신공 제7식 - 단공(斷空).]
검기(劍氣)가 닿은 레이저 궤적이 허공에서 비틀리며 분쇄되었다. 공간 자체가 왜곡되는 파동은 주변의 비행체들을 고철 덩어리로 만들어 추락시켰다.
[진혁 씨! 서두르세요! 저들, 단순한 기계 병기가 아니에요! 진무극이 사용했던 차원 도약 기술을 장착하고 있어요! 곧 포위망이 좁혀집니다!]
"알고 있다."
진혁은 발밑의 대지를 밟고 구름을 타듯 도약했다. 마신경의 경지에 도달한 그는 이제 중력조차 자신의 의지대로 제어할 수 있었다. 신서울의 하층 구역, 햇빛조차 들지 않는 시궁창으로 몸을 날린 그는 지하 수로의 낡은 철문을 마기 한 줄기로 간단히 박살 내고 진입했다.
어둠이 짙게 깔린 지하 수로. 이곳은 그가 과거 실험체로 전락하여 짐승처럼 도망치던 시절의 냄새가 났다. 썩은 폐유와 녹슨 금속의 냄새. 하지만 지금 진혁의 감각은 그 모든 것을 데이터 이상의 진실로 읽어내고 있었다.
[진혁 씨, 아카이브 0의 입구에 도달했어요. 그런데 입구에…… 생체 반응이 감지됩니다.]
"생체 반응?"
[네. 한 명이에요. 그런데 생체 코어 출력이…… 측정 불가입니다. 이건 인간의 수치가 아니에요.]
진혁은 수로 끝에 위치한 거대한 보안문을 마주했다.
문 너머에서 느껴지는 것은 기계의 차가운 금속음이 아니었다. 아주 낮고, 깊고, 고대적인 무언가의 숨소리.
그는 문을 밀어 열었다.
거대한 홀이 나타났다. 수천 개의 홀로그램 화면이 사방을 뒤덮고 있고, 그 중앙에는 1,000년 전 천마의 유골을 바탕으로 재구성된 '최초의 프로토콜' 원형이 떠 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 낡은 도포를 입은 노인이 등을 돌린 채 앉아 있었다.
독고운.
구무림의 마지막 전승자라 불렸던 그 노인이었다.
"결국 여기까지 왔구나, 07호."
독고운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의 한쪽 눈은 기계가 아닌, 인간의 눈이지만 동시에 차원의 이면을 꿰뚫어 보는 듯한 기이한 빛을 띠고 있었다.
"독고운, 당신이 왜 여기에 있지?"
"나는 이 시스템의 관리자가 아니다. 그렇다고 창조주의 개도 아니지."
독고운은 씁쓸하게 웃으며 천마의 유골 데이터를 손으로 쓸어내렸다.
"나는 그저, 너처럼 버려진 찌꺼기들이 이 거대한 지옥에서 스스로의 진리를 깨닫기를 기다려온 '지킴이'일 뿐이다."
진혁은 검을 거두지 않았다. 그의 눈에는 경계심이 서려 있었다.
"이게 아카이브 0인가."
"이곳에는 기술이 없다, 진혁아. 여기 있는 건 네가 그토록 부정하려 했던, 1,000년 전 천마가 남긴 '마지막 비급'이다. 그리고……"
독고운은 진혁의 가슴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네가 방금 뽑아낸 그 백도어가, 사실은 너를 죽이기 위한 장치가 아니라, 너에게 천마의 영혼을 강제로 각인시키기 위한 '그릇의 봉인'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게다."
진혁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죽이기 위한 장치가 아니라, 각인을 위한 그릇의 봉인?
"창조주들은 천마를 되살리려 한 게 아니다. 그들은 천마의 힘을 훔쳐 우주의 질서를 다시 쓰려 했다. 네가 그 힘을 받아들이는 순간, 너는 강진혁이 아니라 천마의 숙주가 되는 것이다."
그때, 지하 홀의 벽면이 붕괴하며 차원의 틈이 벌어졌다.
창조주들의 사냥꾼들이 나타난 것이 아니다.
시스템의 정점, 관리 코드 'ZERO'가 홀로그램 형태로 모습을 드러냈다.
[실험체 07호. 아니, '천마'의 복제본. 봉인이 해제된 지금, 당신의 육체를 회수한다.]
진혁은 검을 고쳐 쥐었다.
그의 뒤로 신천마신공의 검은 마기가 폭풍처럼 휘몰아쳤다.
"복제본이라고 했나."
진혁의 입꼬리가 호선을 그렸다.
"천마가 누구든 상관없다. 내가 가는 길이 곧 마도(魔道)이고, 내가 쥐는 검이 곧 천마의 의지다."
공간이 진동했다. 진혁의 마기가 아카이브 0의 모든 데이터를 강제로 흡수하기 시작했다.
창조주들이 의도한 각인조차, 이제는 진혁의 힘이 되어 삼켜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