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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토콜: 천마 · 199화목차

제199화 폭풍 전의 정적

에덴의 심장부가 붕괴하고 있었다.

허공을 가득 메웠던 데이터의 파편들이 마치 흩날리는 벚꽃잎처럼 소멸해 갔다. 1,000년의 세월 동안 인류를, 아니 이 차원의 모든 생명체를 데이터의 노예로 묶어두었던 관리 코드 ‘ZERO’의 비명은 이제 들리지 않았다. 그저 묵직한 적막만이 공간을 지배할 뿐이었다.

강진혁은 그 폐허의 중심에 홀로 서 있었다.

그의 손에 들린 [신천마검]은 더 이상 인공적인 고주파 진동을 내뿜지 않았다. 그것은 순수한 마기(魔氣)와 혈기(血氣)가 응축된, 그야말로 실존하는 검강의 결정체였다.

[SYSTEM INFO: 경고. 연동된 모든 서버의 연결이 차단되었습니다.]

[SYSTEM INFO: 프로토콜 호환 모드 종료. 사용자 정보 동기화 불가.]

시야를 가로막던 푸른빛의 HUD가 마지막으로 명멸하다가 완전히 사라졌다. 진혁의 눈앞에 나타나던, 그를 실험체 07호라 부르던 시스템의 잔영조차 이제는 없었다.

"끝인가."

진혁의 나직한 음성이 공간을 울렸다. 입가에 흐르는 피를 닦아내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 피조차 자신의 마기로 정제해 단전으로 회수했다. 이제 그는 시스템이 정해준 수치에 의존하지 않았다. 자신의 호흡, 심박, 그리고 단전에서 요동치는 마기의 흐름만이 그를 증명할 뿐이었다.

그때였다.

-드디어, 여기까지 도달했구나. 피험체 07호. 아니, 강진혁.

공간이 뒤틀리며, 기계적인 음성이 아닌 차갑고도 오만한 의지가 진혁의 뇌리를 직접 파고들었다.

진혁의 눈빛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그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저 허공의 한 점을 응시하며 검을 고쳐 잡았을 뿐이다.

"직접 나타날 줄 알았는데. 잔챙이들만 보내놓고 이제야 모습을 드러내나?"

-잔챙이? 하찮은 진무극이나 에덴의 관리자들을 그리 칭하는 것인가? 그들은 너라는 ‘그릇’을 닦기 위한 도구에 불과했다.

허공이 열리며 거대한 형상이 드러났다. 그것은 물리적인 육체가 아니었다. 차원 너머에서 투영된, 순수한 에너지의 집합체이자 우주의 질서를 관장하는 자들. 소위 말하는 ‘창조주’들의 사절이었다.

진혁은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그릇이라. 천 년을 벼려 만든 그릇이 주인을 칠 줄은 몰랐겠지."

-천마의 혈통을 계승하여 현대의 기술로 완벽하게 재현된 육체. 네놈은 우리가 설계한 가장 아름다운 종말이다. 네가 도달한 마신경조차, 사실은 우리가 허용해 둔 데이터의 한계치일 뿐이지.

"지껄이는 소리가 길군."

진혁의 발끝에서 마기가 폭발했다. 바닥에 깔려 있던 잔해들이 순식간에 먼지가 되어 흩어졌다. [신천마신공]이 스스로 운기되기 시작했다. 시스템의 보조 따위는 필요 없었다. 오히려 시스템이 없을 때, 비로소 천마의 진정한 본질이 드러나는 법이었다.

-어리석은 것. 네가 부순 것은 에덴의 껍데기일 뿐이다. 진정한 ‘제네시스’는 지금 이 순간에도 신서울 전역에서 다시 시작되고 있다. 네가 지키려 했던 그 하층민들, 네가 손을 잡았던 그 배신자들. 모두가 다시 시스템의 데이터로 돌아갈 것이다.

진혁의 눈동자가 칠흑 같은 어둠으로 물들었다.

"착각하지 마라."

그가 천천히 검을 들어 올렸다. 검신을 따라 흐르는 마기가 주위의 공간을 일그러뜨렸다. 단순한 물리적 파괴가 아니었다. 인과율을 비트는, 오직 천마만이 도달할 수 있는 궤적이었다.

"내가 서 있는 곳이 곧 나의 법도이며, 내가 쥐고 있는 이 검이 곧 너희들의 종말이다."

-…!

-데이터 오류 발생. 사용자 강진혁의 행보가 예측치를 8,000% 상회함. 즉각 말살 프로토콜을 가동한다.

사절의 형상이 붉게 점멸했다. 순식간에 에덴의 잔해 속에서 수천, 수만 개의 살인 병기가 쏟아져 나왔다. 과거의 실험체들, 버려진 강철의 인형들, 그리고 진무극이 남긴 데이터의 파편들이 뒤섞인 괴물들의 군단이었다.

진혁은 그 압도적인 물량 앞에서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심장은 더욱 고동치고 있었다.

[경지: 마신경(魔神境) - 진천(眞天)]

[상태: 마기 융합율 100%]

그에게는 더 이상 상태창이 필요 없었다. 그는 자신의 몸 전체가 곧 하나의 거대한 코어이자, 마교의 정수였다.

"와라."

진혁이 검을 내리그었다.

[신천마신공 제10식 - 만상멸세(萬象滅世)]

허공을 가로지르는 일검.

단순한 검기가 아니었다. 공간 자체를 찢어발기며 나아가는 검의 궤적은, 그 길목에 있는 모든 데이터를 무(無)로 환원시켰다. 수천의 병기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증발했다. 에덴의 견고했던 바닥이 종잇장처럼 구겨졌다.

-이럴 리가 없다! 프로토콜의 하위 데이터인 네가 어떻게 이런 출력을…!

"말했지. 시스템은 기술을 줬을 뿐이다. 그 기술을 무공으로 완성한 건 나다."

진혁은 멈추지 않았다. 그는 공간을 도약했다. 순식간에 사절의 형상 앞까지 좁혀진 거리. [신천마검]이 사절의 핵을 향해 쇄도했다.

-제네시스는…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네놈이 아무리 발버둥 쳐도, 신서울은 결국 잿더미가 될 것이다!

"그 잿더미 위에서 다시 시작할 것이다."

진혁의 검이 사절의 가슴팍을 관통했다. 파열음 대신, 차원이 붕괴하는 듯한 굉음이 울려 퍼졌다.

사절은 비명을 지르며 흩어졌다. 그러나 진혁의 눈은 여전히 차갑게 빛나고 있었다. 사절은 사라졌으나, 그 너머에 숨겨진 더 거대한 무언가가 자신을 주시하고 있음을 직감했기 때문이다.

에덴의 붕괴가 가속화되었다. 진혁은 흩날리는 파편 속에서 검을 닦았다. 이제 신서울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그곳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동료들, 그리고 마침내 자신의 이름을 부르게 될 새로운 세상의 주인들을 향해.

'진무극, 그리고 창조주들. 너희들이 남긴 모든 잔재를 내 손으로 직접 짓밟아 주마.'

진혁은 공간의 틈새를 찢고 신서울 상공으로 발을 내디뎠다.

그의 눈앞에 펼쳐진 것은 불타는 도시가 아닌, 시스템의 족쇄에서 풀려나 비로소 혼란과 자유가 뒤섞인, 진정한 의미의 새로운 밤이었다.

그리고 그 밤의 정점에, 참된 천마가 군림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평화는 그리 길지 않을 터였다. 차원 함대의 잔해가 대기권을 뚫고 낙하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전쟁의 끝이 아닌, 더 거대한 차원 전쟁의 시작을 알리는 서막이었다.

진혁은 신서울을 내려다보며 굳게 다짐했다.

이제 시스템은 없다.

오직 강진혁이라는, 인간이 된 천마만이 있을 뿐.

그가 검을 치켜들자, 신서울의 시민들이, 그리고 살아남은 동료들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곳에는 신화의 시대가 다시 열리고 있었다.

[Warning: 차원 침식율 99%. 차원문이 완전히 열립니다.]

[Warning: 새로운 관리자가 당신의 존재를 확인했습니다.]

시스템의 셧다운은 끝이 아니었다. 그것은 거대한 우주의 질서에 던져진, 하나의 돌멩이가 일으킨 파문이었다.

진혁의 뒷모습 위로, 마신(魔神)의 그림자가 거대하게 드리워졌다.

차원문의 틈새에서 쏟아져 나오는 것은 데이터의 파편이 아니었다. 그것은 차원 그 자체를 부식시키는 검은 안개이자, ‘관리자’가 보내온 가장 근원적인 형벌이었다. 신서울의 상공이 기괴한 보랏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진혁은 발밑의 에덴이 완전히 붕괴하여 소멸하는 것을 무심하게 지켜보았다. 그가 남긴 ‘만상멸세’의 여파로 차원 공간 자체가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하지만 진혁의 표정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오히려 그의 호흡은 더 깊고 고요해졌다.

"이제 겨우 시작인가."

그의 등 뒤로 칠흑 같은 마기가 날개처럼 펼쳐졌다. 그것은 나노머신이 만들어낸 기계적인 날개가 아니었다. 단전에서 뿜어져 나온 순수한 마기가 물리적 형태를 갖추어, 공간을 박차고 나아갈 수 있는 의지의 발현이었다.

진혁은 지상으로 낙하하기 시작했다. 마치 한 마리의 매가 사냥감을 낚아채듯, 그는 신서울의 중심부를 향해 쇄도했다. 그가 지면과 닿기 직전, 거대한 마기 폭풍이 신서울의 밤하늘을 갈랐다.

쾅-!

진혁이 착지한 곳은 티타늄 타워의 잔해 위였다. 그곳에는 윤아영과 진세린, 그리고 살아남은 니르바나의 대원들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의 눈에는 경외와 두려움이 교차하고 있었다. 시스템의 지배를 받던 시대의 인간들에게, 시스템 없이 스스로 법칙이 된 진혁은 신화 그 자체였다.

"진혁 씨…!"

윤아영이 달려오려 했지만, 진혁의 몸 주위로 흐르는 살기 때문에 섣불리 다가가지 못했다. 진혁은 검을 칼집에 꽂는 대신, 손가락을 가볍게 튕겼다. 그러자 공중을 맴돌던 마기의 잔향이 흩어지며 도시 전체를 감싸고 있던 감시용 스캔 파장이 강제로 차단되었다.

"끝났다."

진혁의 말은 간결했다. 하지만 그 울림은 신서울 전체를 뒤흔들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아니, 이제 진짜 전쟁이 시작된 거다."

진혁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궤도를 이탈한 함대의 잔해가 유성우처럼 떨어지고 있었다. 그것은 단순한 파편이 아니었다. 함대 내부에 숨겨져 있던 ‘정화 프로토콜’이 가동된 결과였다. 적들은 신서울이라는 실험실을 폐기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진혁, 저건…?"

진세린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녀 역시 군용 코어를 통해 저 유성우의 성분이 무엇인지 감지하고 있었다. 저것은 단순한 금속이 아니라, 닿는 모든 유기물을 분해하는 나노 살포기였다.

"놈들이 신서울을 포기했군. 제네시스의 관리자가 내린 결정이다. 나를 죽일 수 없다면, 이 도시와 함께 나를 지우겠다는 거지."

진혁은 담담하게 대답했다. 그의 목소리에 공포는 없었다. 오직, 자신의 영역을 침범한 자들에 대한 차가운 분노만이 서려 있었다.

"세린, 니르바나의 모든 무장 병력을 지하 벙커로 대피시켜라. 아영, 네가 할 일은 하나다."

"말해, 진혁."

윤아영의 눈빛이 결연해졌다.

"신서울의 모든 에너지를, 지금 당장 내 단전으로 연결해."

"뭐? 미쳤어? 그건… 네 몸이 버틸 수 있는 출력을 수만 배는 초과하는 양이야! 시스템도 없는 지금, 그러면 너는…!"

"나는 이제 시스템의 그릇이 아니다."

진혁이 웃었다. 그 웃음은 오만했으나, 동시에 지독히도 고독했다.

"나는 나 스스로가 시스템이자 법칙이다. 저들이 신서울을 지우려 한다면, 나는 이 도시의 모든 에너지를 마기로 치환하여 저 하늘을 찢어버리겠다."

그것은 광기 어린 결단이었다. 하지만 진혁의 얼굴에는 확신이 있었다. 200화에 걸쳐 쌓아온 무도의 본질, 그리고 1,000년 전 천마의 혈통이 기억하고 있는 마공의 정수가 그의 혈관 속에서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도시의 지하 깊은 곳, 티타늄 그룹이 숨겨두었던 제2의 코어들이 진혁의 의지에 반응하여 가동되기 시작했다. 신서울의 지면이 진동했다. 거대한 에너지의 흐름이 진혁의 몸을 향해 역류했다.

"준비해라."

진혁이 하늘을 향해 [신천마검]을 치켜들었다.

"천마(天魔)란 무엇인가를 보여줄 테니."

하늘에서 쏟아지는 불길한 보랏빛 파편들이 진혁의 마기 방어막과 충돌했다. 찢어지는 듯한 금속음이 도시를 뒤덮었다. 하지만 진혁은 뒷걸음질 치지 않았다. 그는 도리어 폭풍의 눈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마기가 신서울 전체를 거대한 마방진으로 덮어버렸다. 이제 신서울은 기업의 도시가 아니라, 천마의 요새였다.

[Warning: 차원 침식의 근원이 파악되었습니다.]

[Warning: 사용자 ‘강진혁’의 마기 수치가 측정 불가능 범위로 진입합니다.]

어디선가 환청처럼 들려오는 시스템의 마지막 경고음. 진혁은 그것을 비웃듯 검을 휘둘렀다.

공간이 절개되었다. 하늘 위에 떠 있던 거대한 차원의 문이 진혁의 검기 한 번에 반으로 갈라졌다. 그 틈새로, 인간의 지성을 아득히 뛰어넘은 존재들이 자신의 군대를 이끌고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진혁은 검 끝에 마기를 모았다. 이것은 2부의 종착점이자, 곧 다가올 3부라는 지옥의 개막이었다.

"오너라. 너희들의 세계가 얼마나 허약한지, 내 검으로 직접 새겨주마."

진혁의 검이 작렬했다. 신서울의 밤이, 마치 대낮처럼 환하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그 빛은, 시스템이라는 족쇄를 끊어낸 한 인간이 신에게 도전하는 첫 번째 포효였다. 에덴이 무너진 자리에서, 진정한 천마의 전설이 다시금 혈로(血路)를 뚫고 있었다.

폭풍 전의 정적은 끝났다. 이제부터는, 오직 검과 마기만이 대화하는 시대였다. 진혁은 차원문의 너머를 응시했다. 그곳에 있을 진짜 창조주들의 왕좌를 향해, 그는 첫걸음을 내디뎠다.

이것은 끝이 아니다.

진정한 의미의, 신화의 시작이었다.

(제199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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