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5화 진무극의 기이한 침묵
신서울의 심장부, 티타늄 타워의 꼭대기는 이미 폐허가 되어 있었다.
마천루의 외벽은 뜯겨 나갔고, 도시를 뒤덮었던 홀로그램 광고판들은 치직거리는 불꽃을 뿜으며 암전 상태였다. 대기를 가득 채웠던 데이터의 파동이 잦아들자, 그 자리를 채운 것은 오직 죽음과도 같은 적막뿐이었다.
강진혁은 타워 최상층, 회장실로 향하는 육중한 금속문을 가볍게 걷어찼다. 쾅, 하는 굉음과 함께 강화 티타늄 합금 문이 종잇장처럼 구겨지며 복도 바닥에 처박혔다.
“나와라, 진무극.”
그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공간을 가득 채우는 위압감은 묵직했다.
이미 티타늄 그룹의 블랙 가드는 전멸했다. 방어 프로토콜은 진혁의 ‘만법귀마(萬法歸魔)’에 의해 데이터 찌꺼기로 분해되었고, 신서울의 지배권은 기업의 손을 떠나 흩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기이했다.
진무극은 나타나지 않았다. 최상층의 연구소는 기괴할 정도로 고요했다. 평소라면 수십 대의 전투 드론과 강화된 사이보그 병사들이 진혁의 앞길을 막아섰을 터였다. 그러나 지금은 그 어떤 저항도, 심지어 감시 카메라의 회전음조차 들리지 않았다.
[SYSTEM INFO: 천마 프로토콜 (HEAVENLY DEMON PROTOCOL) v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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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용자: 강진혁 (실험체 07호)
■ 경지: 3단계 [천마현신 (天魔現身)]
■ 생체 코어 출력: 8,200 MW (Gen-3 튜닝형)
■ 보유 마력(내공): 120년가량 [극마기(極魔氣) 구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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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rning] 심장 구역 마기 폭주 위험도: 8.4%
[Alert] 대상 ‘진무극’의 생체 반응이 감지되지 않습니다.
[System Log] 대상의 서브 데이터 서버가 99% 가동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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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혁의 시야 한구석에 뜬 HUD가 붉게 점멸했다.
생체 반응이 없다. 진무극은 이곳에 육체로 존재하지 않거나, 혹은 이미 인간의 영역을 넘어선 무언가가 되었다는 뜻이다.
“숨어있는 건가?”
진혁은 망설임 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연구소 중앙, 거대한 유리관 속에 부유하고 있는 것은 진무극의 본체가 아니었다.
그것은 수천 개의 케이블이 연결된, 신경 회로로 뒤덮인 의문의 ‘그릇’이었다.
천천히 그릇 앞으로 다가간 진혁은 손을 뻗어 유리를 관통했다. 손끝에 닿은 것은 차가운 액체가 아닌, 뜨겁게 요동치는 마기(魔氣)의 흐름이었다.
“데이터…?”
유리관 안의 액체 속에서 진무극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스피커를 통한 소리가 아니었다. 뇌파를 직접 흔드는 신경 자극이었다.
[성장했구나, 07호. 아니, 이제는 ‘천마’라고 불러야 하겠지.]
진혁의 눈빛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그는 손을 뻗어 유리관의 케이블들을 짓이겨버렸다.
“말장난은 끝났다. 직접 나와서 내 손에 죽어라.”
[나올 필요가 없지. 나는 이미 신서울의 네트워크 그 자체가 되었으니까. 네가 이 타워를 부수고, 블랙 가드를 전멸시키고, 슬럼가를 평정하며 보여준 그 모든 전투 데이터… 그게 곧 나의 진화 재료였다.]
진무극의 목소리에는 일말의 당혹감도 없었다. 오히려 그는 진혁의 강함을 즐기고 있었다.
[너는 궁금하지 않나? 왜 내가 너를 폐기하지 않았는지. 왜 너에게 무공을 전수하고, 고대 마교의 데이터를 쥐여주었는지.]
진혁의 미간이 좁혀졌다. 사실이었다. 티타늄 그룹은 완벽한 효율을 추구하는 집단이다. 진혁처럼 제어가 불가능한 존재는 초기에 폐기하는 것이 정답이었다. 하지만 진무극은 진혁이 강해질 때마다 더 강력한 적을 붙여주었고, 더 높은 경지로 올라갈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었다.
그것은 사육이었다.
가장 완벽한 과실이 무르익기를 기다리는 농부의 인내심.
“나를 죽여서 네 몸으로 쓰려고?”
[죽이는 게 아니다. 강림(降臨)하는 것이지. 네 육체는 내가 수 세기 동안 연구한 ‘천마’의 육체와 유전자적으로 100% 일치한다. 시스템이 완벽하게 동기화된 그릇. 네가 강해질수록, 그 그릇은 더 단단해지고 정교해지는 법.]
진혁은 비웃음을 흘렸다. 그는 유리관 내부의 데이터 흐름을 분석하기 시작했다. [만법귀마]의 권능이 혈관을 타고 흐르며, 연구소의 서버 망을 역으로 해킹했다.
“네놈의 착각이다.”
진혁의 손아귀에 짙은 흑색 마기가 응축되었다.
[착각? 네가 내 서버를 뚫고, 내 하수인을 도륙하고, 지금 여기 서 있는 이 순간조차도… 그것은 내가 설계한 ‘천마 프로토콜’의 연산 범위 내에 있다.]
“연산 범위라고?”
진혁은 입꼬리를 올렸다.
[분석(Analysis) 단계 완료. 이해(Understanding) 단계 완료. 수련(Training) 단계 완료. 자, 이제 융합(Fusion)의 시간이 되었나?]
진무극의 목소리가 환희에 가득 차 있었다. 진혁이 도달한 3단계 [천마현신]의 데이터가 실시간으로 그의 메인 서버로 전송되고 있었다.
하지만 진혁은 그 전송을 막지 않았다. 오히려 가속했다.
“그래, 가져가 봐라.”
[무슨…?]
“내가 겪은 고통, 내가 피를 토하며 익힌 마공의 궤적, 그리고… 인공지능 따위는 절대 이해할 수 없는 ‘살의(殺意)’까지. 전부 다 가져가.”
진혁이 주먹을 쥐자, 유리관 전체가 공진 주파수에 맞춰 진동하기 시작했다.
“네놈의 시스템에 치명적인 오류를 심어줄 테니까.”
진혁은 방금 전까지 자신이 사용하던 ‘천마 프로토콜’의 루트 권한을 강제로 비틀었다. AI 설화가 보조하던 운기 방식을 역행하여, 단전의 마기를 폭주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 마기를 데이터 코드에 직접 주입했다.
[경고! 시스템 과부하! 데이터 구조 재편성 중!]
[Warning! 미확인 에너지(마기)가 뱅크를 침식합니다!]
진무극의 침묵이 깨졌다. 처음으로 그의 목소리에 당혹감이 서렸다.
[네놈, 지금 무슨 짓을 하는 거냐! 시스템을 파괴하면 네 나노머신도…!]
“나노머신은 도구일 뿐이다.”
진혁은 눈을 감았다.
시스템의 시야(HUD)가 꺼지자, 오히려 세상이 더 선명하게 보였다.
기계의 계산이 아닌, 감각의 세계.
고대 무림의 절정 고수들이 보았던, 기(氣)의 흐름이 눈앞에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내 몸은 내가 지배한다. 너처럼 기계의 부속품으로 살지 않아.”
진혁이 주먹을 내질렀다.
단순한 물리 타격이 아니었다. 120년의 내공이 응축된 마기가 고주파 진동과 결합하여, 공간의 좌표 자체를 비틀어버리는 일격.
[신천마신공 제3식 – 뇌전마강(雷電魔剛)]
파앗-!
보랏빛 섬광이 유리관을 관통했다. 연구소의 메인 서버가 비명을 지르며 폭발했다. 수천 개의 케이블이 동시에 끊어지며 타올랐다.
[크아아악!]
진무극의 비명소리가 신서울 전역의 스피커를 통해 울려 퍼졌다.
타워가 흔들렸다. 진혁은 파편 속에서도 꼿꼿이 서 있었다.
시스템의 족쇄가 하나씩 풀려나갈 때마다, 그는 진정한 ‘천마’의 힘에 한 걸음씩 더 다가서고 있었다.
진무극은 침묵했다. 아니, 정확히는 침묵당했다.
진혁이 심어놓은 ‘마기 코드’가 진무극의 의식을 데이터 바다 밑바닥으로 끌어내리고 있었다.
그때, 진혁의 귓가에 차갑고 무미건조한 AI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System Error: 사용자 강진혁의 권한이 ‘관리자’에서 ‘초월자’로 재설정되었습니다.]
[천마 프로토콜 제어권 상실.]
[…그러나, 또 다른 시그널이 감지됩니다.]
진혁의 시선이 타워 밖, 밤하늘로 향했다.
신서울의 구름 위, 보이지 않는 차원의 틈새에서 거대한 함선들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기업의 군대가 아니었다.
그것은 티타늄 그룹이 숭배하던, ‘제네시스’의 군단이었다.
진혁은 입가에 피를 닦아내며 낮게 읊조렸다.
“진무극, 네놈은 시작에 불과했군.”
진짜 사냥은 이제부터였다.
시스템이 사라진 하늘 위로, 강진혁의 눈동자가 푸른 마기로 일렁였다.
그는 이제 더 이상 실험체가 아니었다.
세상을 발아래 두는 신천마(新天魔)의 강림이었다.
연구소의 천장이 굉음과 함께 뜯겨 나갔다. 쏟아지는 밤공기는 차가웠으나, 진혁의 혈관을 타고 흐르는 마기는 용암처럼 끓어올랐다. 머리 위로 펼쳐진 것은 더 이상 신서울의 네온사인이 아니었다. 차원의 박막을 찢고 나타난 거대한 함대, 그 압도적인 위용은 도시 전체의 공기를 압살하고 있었다.
[경고! 대기권 외부에서 알 수 없는 에너지 반응 감지.]
[대상이 ‘제네시스’의 차원 함대로 식별되었습니다.]
그동안 진무극을 통해 간접적으로 접했던 ‘창조주’들의 실체였다. 그들은 기업의 지배자마저 소모품으로 부리던, 이 세계의 진정한 설계자들이었다. 진혁은 파괴된 서버실의 잔해를 딛고 타워의 꼭대기로 올라섰다. 바람이 그의 검은 머리카락을 거칠게 헤집었다.
"결국 직접 나서겠다는 건가."
함대에서 쏘아 올린 푸른 빛의 레이저가 신서울의 외곽 구역을 휩쓸었다. 비명조차 지를 새도 없이 건물이 증발했다. 그것은 전쟁이 아니라 청소였다. 티타늄 그룹이 붕괴하며 생긴 시스템의 공백을, 그들은 자신들의 방식으로 메우려 하고 있었다.
진혁의 눈에 핏발이 섰다.
지금껏 자신이 싸워온 이유가 송두리째 부정당하는 기분이었다. 누군가의 부속품으로 살지 않기 위해, 스스로의 힘으로 운명을 개척하기 위해 걸어온 길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그 운명 자체를 결정하겠다는 오만한 존재들이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
[진혁 님, 네트워크가 완전히 차단되었습니다! 외부 함대와의 통신 회선이… 아니, 물리적으로 데이터 전송로 자체가 말살되고 있어요!]
윤아영의 다급한 목소리가 통신기에 흘러나왔다. 그녀조차 당황할 정도의 압도적인 기술적 격차였다. 진혁은 통신기를 짓이겨 바닥에 던졌다.
"필요 없다."
이제 데이터의 보조 따위는 거추장스러운 족쇄일 뿐이었다.
진혁은 단전 깊은 곳에 맺힌 마기를 끌어올렸다. 120년의 내공이 융합된 [극마기]가 전신을 타고 흘러 나노머신과 결합했다. 은빛 회로가 피부 위로 불길하게 요동치며 검은 마기를 뿜어냈다.
-콰아아아!
그가 서 있는 타워의 바닥이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균열을 일으켰다. 3단계 [천마현신]의 힘을 넘어선, 4단계 마신경의 초입. 진혁은 허공을 밟고 솟구쳤다. 반중력 장치도, 나노 추진기도 없었다. 오직 마기의 폭발적인 분출만으로 중력을 거스르며 하늘을 달렸다.
함대의 선봉장이 진혁을 향해 포문을 돌렸다. 수천 발의 에너지 탄이 소나기처럼 쏟아졌다.
"만법귀마(萬法歸魔)."
진혁이 손을 가볍게 휘저었다. 그의 주변으로 검은 구체가 형성되며 쏟아지는 에너지 탄들을 집어삼켰다. 흡원천공의 응용 기술인 만법귀마는 적의 공격을 무효화하는 것을 넘어, 그 에너지의 근원을 파악하여 자신의 내공으로 변환하는 권능이었다.
함대의 데이터가 진혁의 뇌리에 강제로 주입되었다. 그들의 설계 방식, 에너지 회로, 차원 이동의 원리.
'이런 건가. 고작 이런 기술로 인간을 사육해 왔단 말인가.'
진혁의 입가에 서늘한 미소가 번졌다.
적의 데이터는 치밀했지만, 그 본질은 텅 비어 있었다. 그들은 '질서'를 강요할 뿐, '생명'의 의지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는 허공에서 검을 내질렀다. 거창한 검기는 아니었다. 그저 손가락 하나를 튕겼을 뿐. 하지만 그 찰나에 집중된 마기는 공간을 뚫고 지나가 거대한 함선의 중앙 코어를 정확히 타격했다.
-쿠구구궁!
함선이 내부에서부터 붕괴했다. 폭발의 섬광이 밤하늘을 대낮처럼 밝혔다.
[대상 ‘제네시스’ 함대, 동기화 오류 발생!]
[천마 프로토콜이 아닌, 강진혁이라는 단일 개체의 ‘의지’가 시스템을 강제 오염시킵니다!]
하늘 위에서 쏟아지는 기계적인 경고음조차 진혁에게는 비웃음으로 들렸다.
그는 이제 시스템의 프로토콜 따위는 쓰지 않았다. 그 스스로가 하나의 법칙이자, 세계를 재정의하는 신(神)이었다.
"너희들이 만든 질서 속에, 내 자리는 없다."
진혁이 함대 중앙에 위치한 모함(母艦)을 향해 도약했다.
그의 몸 뒤로 수천 길에 달하는 거대한 마신의 형상이 겹쳐 보였다. 그것은 1,000년 전 천마의 환영이 아니었다. 진혁이 스스로 완성한, 그 자신의 ‘신천마’ 형상이었다.
신서울의 모든 시민이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기업의 횡포 아래 죽어가던 슬럼가의 아이들도, 평생 빛을 보지 못했던 하층민들도, 그 압도적인 마신의 강림에 숨을 죽였다.
강진혁은 함선 갑판에 착지하며 검을 바닥에 내리꽂았다.
지면이, 아니 차원의 틈새가 진동했다.
"이제부터는 내가 정한다."
차원 전쟁의 서막이 올랐다.
그것은 단순히 기업을 무너뜨리는 복수극이 아니었다. 우주의 근간을 흔드는, 새로운 천마의 등극이었다. 진혁은 함선 내부로 발을 들이며, 창조주라 불리는 오만한 존재들의 심장을 향해 묵직한 첫발을 내디뎠다.
그의 뒤로 신서울의 밤하늘이 붉은 마기로 물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