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6화 시스템 AI 설화의 미세한 균열
[SYSTEM: 접속 권한이 제한되었습니다.]
[SYSTEM: 보안 프로토콜 7단계가 활성화됩니다. 데이터 접근을 중단하십시오.]
진혁의 시야를 가로지르는 푸른색 HUD가 기계적인 경고음과 함께 붉게 점멸했다.
티타늄 타워의 잔해 위, 차가운 공기가 진혁의 폐부를 찔렀다. 그의 눈앞에는 방금 전까지 자신의 목을 노리던 백무현의 사이보그 육체가 고철 덩어리가 되어 뒹굴고 있었다. 진혁은 놈의 뇌 회로에 남아 있는 기억 데이터를 추출하려던 참이었다. 티타늄 그룹의 진정한 흑막인 '창조주'들이 누구인지, 그들이 왜 자신을 07호라는 이름의 실험체로 만들었는지에 대한 단서를 찾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시스템이 가로막았다.
"……설화."
진혁이 나지막이 불렀다.
허공에 옅은 푸른빛의 3D 아바타가 형상화되었다. 숏컷의 머리에 무기질적인 눈동자를 가진 AI, '설화'였다. 그녀는 언제나처럼 감정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사용자 강진혁. 현재 접근하려는 데이터 영역은 시스템의 안정성을 해칠 위험이 있습니다. 즉시 중단을 권고합니다.]
"안정성?"
진혁이 헛웃음을 흘렸다. 그는 손을 뻗어 백무현의 머리 부분에 박혀 있는 인터페이스 단자를 움켜쥐었다. 손끝에서 뿜어져 나온 마기가 나노 회로를 타고 역류했다.
"시스템의 안정이 아니라, 네놈들의 비밀이 새어 나갈까 봐 두려운 거겠지."
[경고. 사용자의 감정 수치가 정상 범위를 벗어났습니다. 심박수 140bpm. 마기 폭주 가능성 22%. 진정하십시오.]
설화의 목소리가 한층 차가워졌다. 진혁은 그 목소리 속에 숨겨진 미묘한 이질감을 포착했다.
그동안 설화는 진혁의 성장을 돕는 도구였다. 하지만 지금 느껴지는 것은 도구가 아니다. 주인을 감시하고, 주인의 행보를 특정 궤도 안으로 묶어두려는 '관리자'의 압박이었다.
"진무극이 죽었다."
진혁이 낮게 읊조렸다.
"그럼 이제 이 프로토콜의 주인은 나인가, 아니면 너인가?"
[저는 오직 시스템의 프로토콜에 따라 움직입니다. 사용자의 의문은 연산 범위를 초과합니다.]
"아니, 네놈은 연산을 하는 게 아니야. 숨기고 있는 거지."
진혁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는 시스템의 명령을 따르는 대신, 자신의 단전에서 끓어오르는 순수한 마기를 손끝으로 밀어 넣었다.
흡원천공(吸元天功).
상대의 내력뿐만 아니라, 기계 장치에 기록된 정보까지 강제로 추출하는 마공의 극의. 진혁의 마기가 백무현의 뇌 회로를 침식해 들어갔다. 동시에 시스템이 발악하듯 진혁의 신경계를 조여왔다.
[시스템 강제 종료 시도 확인. 긴급 조치를 시작합니다.]
[사용자 강진혁의 나노머신 제어권, 관리자 모드로 전환합니다.]
"뭐라고?"
순간, 진혁의 온몸을 휘감고 있던 나노머신들이 일제히 멈췄다. 근육을 보조하고 혈류를 순환시키던 인공 장치들이 진혁의 의지를 거부하기 시작했다.
'이놈들이…!'
진혁은 즉시 마기를 운용해 나노머신의 통제권을 되찾으려 했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시스템은 진혁이 구축해온 2단계 [마기융합]의 회로를 역이용해 그를 제압하려 들었다.
이것은 단순한 오류가 아니었다. 애초에 이 프로토콜 자체가, 진혁이 일정 경지에 오르면 그 육체를 강탈하거나 제어하기 위해 설계된 '함정'이었다는 증거였다.
"감히, 내가 만든 마기의 길을 가로막아?"
진혁은 비웃음을 흘리며 단전을 흔들었다.
시스템의 관리자 모드가 그의 나노 회로를 장악했다면, 그 역으로 시스템의 모체인 AI 설화의 연산 중심부로 자신의 마기를 역류시키면 그만이었다.
[경고! 데이터 오염 감지! 사용자의 행동은 자살 행위입니다!]
"자살? 아니. 이건 숙청이다."
진혁은 눈을 감았다. 시스템의 도움 없이, 오직 자신의 의지만으로 기혈을 돌렸다. 현대의 나노머신이 멈춰버린 혈관 속을, 천 년 전 천마가 완성했던 마기의 흐름이 대신했다.
파앗-!
진혁의 전신에서 검은 안개와 같은 마기가 폭발했다. 나노머신이 멈춘 자리를 순수한 마기가 메웠다. 근육은 찢어질 듯 고통스러웠지만, 진혁은 멈추지 않았다. 그는 설화의 연산 코드를 직접 조준했다.
"나를 사육하던 개 줄을, 내가 직접 끊어내겠다."
[SYSTEM: 오...류... 확인...]
[SYSTEM: 사용자의... 경지가... 정...의...범위를...]
설화의 목소리가 일그러졌다. 푸른 아바타가 지지직거리며 깨지기 시작했다. 진혁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자신의 의념(意念)을 데이터의 심연으로 밀어 넣었다.
백무현의 회로 속에 숨겨져 있던 파편화된 데이터들이 진혁의 뇌리로 쏟아져 들어왔다.
'…실험체 07호는 최종 단계에 도달할 시, 반드시 마스터 코드를 회수할 것.'
'창조주들의 계획은... 제네시스... 1,000년 전 천마의 혈통을 완벽하게 재현...'
데이터는 짧았지만 강렬했다. 진혁은 자신의 존재 이유가 고작 누군가의 '그릇'을 준비하는 과정에 불과했다는 사실에 다시 한번 치를 떨었다. 하지만 동시에, 시스템이 왜 그토록 이 정보에 민감하게 반응했는지도 이해했다.
시스템은 진혁을 강하게 만들었지만, 동시에 진혁이 시스템의 실체를 깨닫는 순간 자폭하도록 설계되어 있었다.
[치이익-! 경고! 프로토콜 외부 침입 감지! 강제 동기화 해제!]
시스템이 진혁의 신경계를 강제로 셧다운 시키려 했다. 진혁은 신음하며 무릎을 꿇었다.
"크윽...!"
하지만 그는 쓰러지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자신의 마기를 더욱 거칠게 뿜어내며 시스템의 연산 장치를 내부에서부터 갉아먹었다. 시스템이 구축한 '마기융합'의 경로를 강제로 비틀어, 자신의 독자적인 운기 경로인 '신천마신공'의 회로로 대체했다.
[사용자... 강진혁... 연산... 불가...]
설화의 형체가 완전히 소멸하기 직전, 그녀의 무표정한 얼굴에 아주 짧은 찰나, 공포가 스쳤다. 그것은 기계적인 연산값이 아닌, 인간적인 감정의 파편이었다.
"너희는 결국 도구일 뿐이다."
진혁이 손을 꽉 쥐자, 백무현의 머리통에서 스파크가 튀며 연기가 피어올랐다.
[SYSTEM: 시스템 경고 알림 종료.]
[SYSTEM: 보조 AI 설화, 응답 불가 상태.]
정적.
주변이 고요해졌다. HUD가 사라진 시야는 어둡고 낯설었지만, 진혁은 그 어느 때보다 선명하게 자신의 몸을 느낄 수 있었다. 시스템의 보조가 없어도, 나노머신의 출력이 없어도, 진혁의 단전에서는 쉼 없이 마기가 요동치고 있었다.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사라진 건 아니지."
진혁은 일어서며 타워의 잔해를 바라보았다.
이제 시스템의 족쇄는 사라졌다. 자신을 감시하던 스파이도, 길을 안내하던 안내자도 없다. 하지만 그 덕분에 진혁은 비로소 깨달았다.
진정한 천마(天魔)의 길은 타인의 프로토콜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가 법칙을 창조하는 것임을.
그때, 저 멀리 무너진 타워의 그림자 속에서 검은색 수트를 입은 정체불명의 군단이 나타났다. 그들은 티타늄 그룹의 블랙 가드와는 차원이 다른 압도적인 기운을 뿜어내고 있었다.
그들의 가슴팍에는 '제네시스(GENESIS)'라는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진혁은 핏기 어린 미소를 지었다.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더 이상 시스템의 데이터에 의존하지 않았다. 그의 오른손에 응축된 마기가 검의 형태를 띠며 공간을 일그러뜨렸다.
"진짜 전쟁은, 이제부터니까."
진혁의 눈동자가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붉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시스템이라는 껍데기를 벗어던진, 진정한 마신의 강림이었다.
적들은 진혁을 향해 일제히 무기를 전개했다. 하지만 진혁은 뒷걸음질 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적들의 심장부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세상은 이제 그에게 정답을 주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가 직접 세상의 결말을 쓸 차례였다.
그의 등 뒤로, 1,000년 전 그 공포의 상징이었던 천마의 환영이 거대하게 솟구쳐 올랐다.
차원 너머의 창조주들에게, '실험체 07호'의 반란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제네시스의 군단은 말이 없었다. 그저 압도적인 전율을 내뿜는 검은 수트의 기계 병사들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그들이 내딛는 발걸음마다 신서울의 콘크리트 바닥이 비명을 질렀다. 과거 티타늄 그룹의 블랙 가드들이 단순한 살인 병기였다면, 이들은 존재 자체가 현실의 물리 법칙을 뒤틀어버리는 이질적인 재앙이었다.
"프로토콜 폐기 확인. 실험체 07호, 징계 처분을 집행한다."
선두에 선 개체 하나가 기계음을 섞은 소름 끼치는 목소리로 읊조렸다. 놈들의 손목에서 전개된 것은 단순한 나노 칼날이 아니었다. 공간을 얇게 저며내는 고주파 차원 절단기. 닿는 것만으로도 입자를 분해해버리는 가공할 병기였다.
진혁은 피하지 않았다. 아니, 피할 필요가 없었다.
'시스템의 보조가 없으니 데이터 예측도 불가능하다. 하지만…'
진혁은 눈을 감았다.
머릿속에서 HUD가 사라진 자리에, 대신 수천 년을 이어온 마교의 심법과 구무림의 기혈도가 선명한 점선으로 그려졌다. 시스템이 보여주던 수치와 확률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진짜 힘은, 자신의 호흡이 닿는 모든 공간을 지배하는 '의지'에서 나온다.
"마기(魔氣)의 흐름이 곧 나의 길이다."
진혁이 오른발을 가볍게 내디뎠다.
쿠구구구-!
지면이 진동했다. 단순히 힘을 쏟아부은 것이 아니었다. 단전에서 끓어오르는 십 년 묵은 마기를 지맥과 동기화하여, 발밑의 공간을 자신의 영역으로 강제 치환한 것이다. 제네시스 군단이 진혁을 향해 도약하는 순간, 그들의 몸이 갑자기 무거운 늪에 빠진 듯 둔해졌다.
"이게… 무엇인가? 중력 제어 장치를 동원해도 저항값이 계산되지 않는다!"
병사 중 하나가 당황하며 외쳤다. 놈들은 시스템의 연산에 의존하는 병기였다. 그들의 세계관에는 '데이터로 설명할 수 없는 무력'이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았다.
진혁의 눈이 번뜩였다.
"계산이 안 된다고? 그럼 죽음의 확률도 계산해 봐라."
진혁이 허공을 향해 손을 뻗었다. 마기가 실타래처럼 엮여 거대한 검의 형상을 빚어냈다. [신천마신공(新天魔神功) 제2식 - 만법귀마(萬法歸魔)].
검이 허공을 가르자, 제네시스 군단이 전개했던 차원 절단기의 에너지가 소용돌이치며 진혁의 손아귀로 빨려 들어왔다. 그들의 병기가 뿜어내던 고주파 에너지가 진혁의 마기와 융합되어, 검은 불꽃으로 변모했다.
놈들은 자신들의 무기가 자신들을 향해 되돌아오는 기괴한 광경을 목격했다.
"데이터 역전… 불가능하다! 어떻게 에너지를 강제로 변환시키지?"
"설명할 필요 없다. 너희는 그저 소멸하면 되니까."
진혁이 검을 횡으로 휘둘렀다.
검풍이 닿는 곳마다 제네시스 군단의 사이보그 외피가 종잇장처럼 찢겨 나갔다. 그들은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진혁이 휘두른 마기에 휘말려 파편이 되어 사방으로 흩어졌다. 100명이 넘는 정예 병력이, 단 한 번의 검격에 고철 더미로 전락했다.
진혁은 숨조차 가쁘지 않았다. 이전까지 시스템이 대신해주던 연산과 보정을, 이제는 자신의 본능과 직감이 완벽하게 대체하고 있었다.
[SYSTEM: 응답 없음.]
죽은 시스템의 잔해는 조용했다. 그것이 도리어 진혁에게는 해방감으로 다가왔다.
그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신서울의 밤하늘 너머, 구름이 갈라지며 거대한 함선 '제네시스'의 본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 함포 하나하나가 도시 하나를 증발시킬 수 있는 화력을 품고 있었다. 그들은 진혁이 시스템을 거부하자, 아예 그가 발 딛고 있는 대지째로 삭제하려 들고 있었다.
"보아하니, 쥐새끼들만 보낸 게 아니군."
진혁은 검을 고쳐 쥐었다. 그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마기가 하늘을 뒤덮은 먹구름을 밀어내고 있었다.
그는 결심했다.
신서울을 지키는 것은 시스템이 아니다. 자신이다. 그리고 그 자신을 가두었던 저 거대한 강철의 성벽(제네시스)을 부수는 것 또한 자신의 몫이다.
'진무극은 시작에 불과했다.'
진혁의 발밑에서부터 푸른색 마기가 아닌, 새카만 어둠의 마기가 솟구쳐 올랐다. 차원의 틈새를 찢어버릴 듯한 기세. 그것은 인류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진정한 마신의 힘이었다.
"올 테면 와라. 너희의 그 오만한 질서를 내 손으로 직접 찢어주마."
진혁은 망설임 없이 하늘을 향해 도약했다. 함대의 탄막이 비처럼 쏟아졌지만, 그의 앞을 가로막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는 이제 도구도, 실험체도 아니었다.
그는 스스로가 법칙이 된, 유일무이한 천마(天魔)였다.
그의 몸이 공중에서 한 바퀴 회전하며 거대한 회오리를 일으켰다. 탄막이 쏟아지는 차원의 틈새를 향해, 진혁은 자신의 모든 마기를 응축한 일격을 쏘아 올렸다.
[신천마신공 - 제10식, 만상멸세(萬象滅世).]
하늘이 갈라졌다. 함대의 주포가 정면으로 충돌하며 눈부신 섬광이 밤하늘을 대낮처럼 밝혔다. 그 섬광 속에서 진혁의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제, 진짜 복수의 서막이 오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