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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토콜: 천마 · 182화목차

제182화 한계에 다다른 나노회로

타워 최상층, 진무극의 집무실을 가득 채우던 고압의 정적은 백무현의 거대한 도끼가 바닥을 박살 내며 산산조각 났다.

콰아아앙-!

강진혁의 발밑에서 솟구친 플라즈마 화염이 천장을 뚫고 나갔다. 그 속에서도 진혁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그의 시야 좌측 상단, [SYSTEM INFO] 창이 붉게 점멸하고 있었다.

[WARNING: 나노머신 동기화율 34% 급락.]

[CRITICAL: 신체 내구성 한계치 도달. 강제 재구성을 권장합니다.]

"지독하군."

진혁은 입가에 맺힌 검은 피를 닦아냈다. 단순한 혈액이 아니었다. 나노머신이 붕괴하며 배출되는 금속성 폐기물이었다. 백무현, 티타늄 그룹의 블랙 가드 총사령관. 그 거대한 살인병기가 뿜어내는 압력은 이미 인간의 범주를 아득히 넘어선 상태였다.

"실험체 07호, 아니, 강진혁."

백무현의 기계적인 음성이 집무실을 울렸다. 그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고주파 진동이 공기 중의 산소를 태우고 있었다.

"회장님의 명령이다. 네놈의 신경 회로를 추출하여 프로토콜의 마지막 퍼즐을 맞추겠다. 저항은 무의미하다."

백무현이 다시 한번 도약을 시도했다. 그가 밟은 바닥이 타일 단위로 가루가 되어 흩어졌다. 100톤에 달하는 압력이 진혁의 정수리를 향해 내리꽂혔다.

'분석은 끝났다.'

진혁의 흑안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지금껏 그는 시스템의 도움을 받아 공격을 예측하고, 회피하고, 반격했다. 하지만 지금 시스템은 진무극의 마스터 코드에 의해 반쯤 마비된 상태였다.

'시스템이 없으면 싸울 수 없다고 생각하나.'

진혁은 피하지 않았다. 대신 심연과도 같은 단전의 내공을 혈관을 따라 거꾸로 역류시켰다.

흡원천공(吸元天功).

그것은 단순히 남의 내공을 뺏는 기술이 아니었다. 대지, 공기, 그리고 적의 살기까지 모든 에너지를 자신의 틀 안으로 귀속시키는 마공의 극치였다.

콰아아아!

백무현의 도끼가 진혁의 머리 위 10cm 지점에서 멈췄다. 보이지 않는 막이 그 사이를 가로막고 있었다. 그것은 나노머신이 만들어낸 보호막이 아니었다. 진혁이 스스로의 의지로 응축한, 순수한 마기의 장막이었다.

"뭐…?"

백무현의 안광이 거칠게 일렁였다. 시스템 데이터에 기록된 강진혁의 반응 속도를 상회하는 물리적 방어였다.

"내 나노머신을 봉쇄하면, 내 무공까지 봉쇄될 줄 알았나?"

진혁이 낮게 읊조리며 손을 뻗었다. 백무현의 팔뚝에 이식된 고출력 생체 코어, 그곳에서 뿜어져 나오는 거대한 에너지가 진혁의 손아귀로 빨려 들어오기 시작했다.

[WARNING: 기혈 역류 시작. 신체 붕괴 위험도 78%.]

경고 문구가 눈앞을 가렸지만, 진혁은 시야를 차단해 버렸다. 이제 HUD는 필요 없었다. 감각, 오직 자신의 심박동과 혈관을 타고 흐르는 뜨거운 마기에만 집중했다.

'만법귀마(萬法歸魔).'

상대의 기술을 분석하고, 그 근간이 되는 공학적 설계도를 마기로 교란한다. 백무현의 나노 회로 속으로 진혁의 마기가 파고들었다. 마치 바이러스처럼, 회로의 주파수를 강제로 변조했다.

"커헉!"

백무현이 비명을 지르며 뒤로 밀려났다. 그의 전신을 감싸고 있던 플라즈마 갑주가 제멋대로 팽창과 수축을 반복했다. 자신의 의지가 아닌, 강진혁이 주입한 마기에 의해 시스템이 해킹당하고 있는 것이다.

"회, 회장님...!"

백무현이 비틀거리며 허공에 손을 휘저었다. 하지만 진혁은 그에게 자비를 베풀 생각이 없었다. 진혁의 검지가 백무현의 가슴팍, 생체 코어가 박힌 부위를 정확히 겨눴다.

"네놈들이 나를 '그릇'으로 키운 덕분에, 나는 이 세계의 모든 에너지를 내 것으로 만드는 법을 배웠다."

진혁의 손끝에서 푸른색의 검강(劍剛)이 응축되었다. 그것은 단순한 예기가 아니었다. 현대의 플라즈마 기술과 고대 마공의 내공이 물리적 극한에서 융합된, ‘신천마신공’의 초석이었다.

파지직, 파지직-!

공간이 비틀렸다. 백무현의 갑주에서 뿜어져 나오던 화염이 진혁의 검강 속으로 빨려 들어가며 소용돌이를 만들었다.

"끝이다."

검지가 백무현의 심장부를 꿰뚫었다.

콰앙-!

폭발음과 함께 백무현의 거구가 뒤로 튕겨 나갔다. 3톤에 달하는 그의 전신 사이보그 바디가 벽을 뚫고 밖으로 처박혔다. 하지만 진혁은 멈추지 않았다. 그는 등 뒤에 숨겨진 진무극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진무극은 여전히 우아한 자세로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의 눈빛에는 당혹감 대신, 기이할 정도의 환희가 서려 있었다.

"훌륭하다, 07호. 아니, 나의 천마."

진무극이 박수를 쳤다.

"시스템의 통제를 스스로 끊어내고, 기계의 에너지를 마기로 치환하다니. 데이터 수치로는 도저히 계산할 수 없는 영역이다."

진무극의 손가락이 허공을 튕겼다. 그러자 집무실 전체의 바닥이 거대한 회로판으로 변하며 푸른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잊지 마라. 네가 깨달은 그 '무공'조차, 내가 고대 마교의 데이터에서 추출한 프로토콜의 일부라는 사실을."

진무극이 쥐고 있던 리모컨 형태의 마스터 키를 꽉 쥐었다.

[SYSTEM: 마스터 코드, 강제 재설정 시작.]

[SYSTEM: 사용자 강진혁의 나노 회로, 100% 동기화 전환.]

"이제 시스템을 제어하는 것은 네 의지가 아니다. 내 명령이다."

진혁의 몸이 경직되었다. 혈관 속에서 날뛰던 나노머신들이 일제히 멈춰 섰다. 마치 누군가 스위치를 내린 것처럼, 단전의 마기가 급격히 식어갔다.

"자, 이제 무릎을 꿇어라. 너의 그 위대한 무공을 나에게 바치고, 영원한 안식에 들 준비를 해."

진무극의 오만한 선언이 집무실에 울려 퍼졌다. 진혁의 시야가 검게 변해갔다. 시스템이 그를 강제로 블랙아웃시키고 있었다.

하지만 그 어둠 속에서, 진혁은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착각하지 마라, 진무극.'

시스템이 꺼진 덕분에 이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HUD도, 분석 로그도, 경고창도 없다. 오직 어둠만이 가득하다. 하지만 그 덕분에, 진혁은 비로소 깨달았다.

내 몸을 움직이는 것은 시스템이 아니라, 뼛속 깊이 새겨진 마기(魔氣)라는 것을.

진혁이 닫힌 눈을 떴다. 그의 흑안에서 붉은 마기가 폭발하듯 뿜어져 나왔다.

"시스템이 죽어야, 천마가 산다."

진혁의 단전에서 거대한 폭풍이 일었다. 진무극의 표정이 처음으로 일그러졌다. 계산되지 않은 변수, 시스템의 연산 범위를 완전히 벗어난 '실존'의 힘이 그를 덮치려 하고 있었다.

[SYSTEM ERROR: 시스템 제어권 상실. 마스터 코드 강제 종료.]

진무극의 리모컨이 붉게 달아오르다 산산조각 났다.

"이, 이게 무슨...!"

진혁이 천천히 발을 내디뎠다. 한 걸음마다 집무실의 바닥이 쩍쩍 갈라졌다.

"이제부터 시작이다, 진무극."

진혁의 손에 다시 한번 검은 마기가 감돌았다. 이번에는 어떤 시스템의 보조도 없는, 순수한 진혁 자신의 의지였다.

그가 검을 들어 올리는 순간, 타워 전체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Warning: 타워 구조적 붕괴 시작. 외부 통신 단절.]

진혁은 웃고 있었다. 이제야 비로소, 진짜 지옥을 보여줄 준비가 끝났기 때문이다.

진무극의 얼굴이 처음으로 일그러졌다. 창조주가 피조물을 향해 가졌던 우월감은 온데간데없었다. 그의 눈앞에서 벌어지는 현상은 데이터베이스에 존재하지 않는 ‘오류’였기 때문이다.

“말도 안 돼. 나노머신의 동기화율이 0%인데, 어떻게 출력이 유지되는 거지? 심장 부근의 코어는 정지 상태다. 너는 지금 엔진 없는 기계를 움직이고 있어!”

진무극이 다급하게 손을 휘저으며 타워의 제어 시스템을 재가동하려 했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진혁이 내뿜는 마기는 현대 공학의 산물인 코어의 출력을 대체하는 것을 넘어, 공간 자체를 잠식하고 있었다.

“엔진?”

진혁이 낮게 읊조리며 천천히 발을 옮겼다. 그가 발을 딛는 곳마다 강화 타일이 비명을 지르며 가루가 되어 흩날렸다.

“그게 네놈들의 한계다. 모든 것을 수치로 환산하고, 동력원으로 정의하려 드는 오만함. 하지만 무공(武道)은 계산이 아니다. 내 안의 기(氣)를 태워, 우주와 소통하는 의지다.”

치익, 치이익.

진혁의 피부 위로 은빛 회로 선이 짙게 떠올랐다. 예전처럼 시스템의 제어를 받는 은은한 빛이 아니었다. 혈관을 타고 흐르는 마기가 강제로 나노머신을 각성시켜, 세포 단위에서부터 신체를 재구성하고 있었다. 고통은 극에 달했다. 신경을 긁어내는 듯한 작열감이 전신을 지배했지만, 진혁은 그 고통을 ‘살아있음’의 증거로 받아들였다.

‘이게… 마신경의 진짜 힘인가.’

시스템이 제시하던 5단계의 경지는 일종의 가이드라인이었을 뿐이다. 그 가이드를 부수고 나갔을 때, 비로소 인간의 육체가 마(魔)를 품는 용기로서 완벽하게 거듭난다.

진혁이 검을 쥐지 않은 왼손을 가볍게 허공으로 뻗었다. 그러자 진무극의 주변을 감싸고 있던 방어용 레이저 배리어가 파르르 떨리더니, 그대로 형체를 잃고 분해되었다.

“으윽!”

진무극이 뒤로 물러나며 자신의 전신 슈트에 탑재된 방어 기제를 최대치로 가동했다. 하지만 진혁이 뻗은 손끝에서 뿜어져 나온 마기는 이미 물리적인 결계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그것은 만물을 굴복시키는 천마의 위압이었다.

“진무극, 기억하나? 1,000년 전 천마의 비급을 네놈이 처음 손에 넣었을 때 했던 말.”

진혁이 한 걸음 더 좁혔다. 압도적인 살기에 눌려 진무극의 호흡이 가빠졌다.

“인간은 불완전하기에 신을 갈구한다고 했지. 그리고 그 신의 힘을 얻기 위해 나를 실험체로 썼다.”

진혁의 눈동자가 붉게 타올랐다.

“틀렸다. 인간은 불완전하기에 스스로 신을 뛰어넘는 법을 깨닫는 법이다. 너는 그 깨달음을 얻을 자격이 없다. 네놈의 그릇은 기계로 가득 차 있으니까.”

콰아앙!

진혁이 단 한 걸음으로 집무실의 중심부를 가로질렀다. 거리가 순식간에 좁혀졌다. 진무극은 반사적으로 허리춤에서 고주파 나노 블레이드를 뽑아 휘둘렀다. 0.001초 만에 음속을 돌파하는 참격. 하지만 진혁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캉-!

날카로운 금속음이 울렸다. 진혁이 맨손으로 블레이드의 날을 잡아채 버린 것이다.

“이, 이게…!”

“나노 블레이드? 훌륭한 무기지. 하지만.”

진혁의 손아귀에 마기가 집중되었다.

파삭!

티타늄 합금으로 제작된 최상급 나노 블레이드가 과자 부스러기처럼 바스러졌다. 그 잔해들이 바닥으로 떨어지기도 전에, 진혁의 주먹이 진무극의 복부를 강타했다.

쿠구구궁-!

집무실의 벽면 전체가 굉음을 내며 밖으로 튕겨 나갔다. 진무극의 몸이 그대로 건물 밖, 수천 미터 상공의 허공으로 날아갔다. 진혁은 망설임 없이 창밖으로 몸을 던졌다.

신서울의 야경이 발밑에서 소용돌이쳤다. 수많은 마천루가 불야성을 이루고 있었지만, 지금 진혁의 눈에는 오직 공중에서 중심을 잡으려 애쓰는 진무극의 모습밖에 보이지 않았다.

“도망칠 곳은 없다. 네놈이 만든 이 세계가 곧 너의 무덤이다.”

진혁이 허공을 밟았다. [마광신보]의 극의. 공기 중의 입자를 밟고 서는 경지였다. 진무극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는 등 뒤의 추진 장치를 최대 출력으로 가동해 공중을 비행하려 했지만, 진혁은 이미 그의 뒤를 점령했다.

“시스템의 노예로 살다 간 자에게는, 마공의 끝을 보여주마.”

진혁의 손에 아까 전보다 훨씬 더 거대하고 선명한 검기가 맺혔다. 그것은 단순히 파괴를 위한 에너지가 아니었다. 진혁이 지난 수백 화 동안 겪었던 고통, 분노, 슬픔, 그리고 스스로를 통찰하며 깨달았던 모든 진리가 담긴, 이름 없는 ‘신천마신공’의 제10식이었다.

“만상멸세(萬象滅世).”

진혁의 검기가 호를 그렸다.

그것은 검이 아니었다. 허공을 가르는 차원의 균열이었다.

진무극의 눈에 공포가 서렸다. 평생을 기계와 데이터로 세상을 통제해 왔던 그가, 처음으로 마주한 ‘초월적 실체’. 그는 비명을 지르며 가지고 있던 모든 에너지를 방출해 방어막을 형성하려 했다. 하지만 그 모든 시도는 진혁의 검기 앞에서 무력하게 흩어졌다.

“아, 아니…! 이건 계산에…!”

진무극의 비명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휘익-!

정적.

세계의 소리가 일순간 멎었다. 진혁이 진무극을 지나쳐 허공에 멈춰 섰다. 진무극의 몸 중앙에 가느다란 붉은 선이 생겨났다.

“결국, 너는 나를 완성하기 위한 부속품에 불과했다.”

진혁의 말이 떨어짐과 동시에, 진무극의 전신이 눈부신 빛의 입자로 분해되기 시작했다. 1,000년 전의 비급, 현대의 나노머신, 인간의 욕망이 뒤섞인 결과물이 소멸하는 순간이었다.

[SYSTEM: 마스터 코드, 소멸.]

[SYSTEM: 모든 실험체 제어 모드, 영구 중단.]

머릿속에서 들려오던 시스템의 잔재마저 완전히 침묵했다. 진혁은 텅 빈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드디어, 고요했다.

하지만 그 고요함 속에서, 진혁은 무언가 다른 기운을 감지했다. 신서울의 지하 깊은 곳, 혹은 이 차원을 넘어선 ‘그 어딘가’에서 자신을 향해 뻗어 나오는 시선들.

진무극을 처단했다고 끝난 것이 아니었다. 이 세계는 거대한 실험장이었고, 이제 겨우 그 실험장의 관리자를 제거했을 뿐이다.

‘이제부터는 내 시대다.’

진혁은 피 묻은 손을 꽉 쥐었다. 시스템도, 진무극도, 1,000년 전의 천마도 없는, 오직 강진혁이라는 한 명의 인간만이 존재하는 세상.

그가 다시 타워를 향해 발을 내딛는 순간, 신서울의 밤하늘 위로 핏빛 오로라가 일렁이기 시작했다. 그것은 정복자의 강림을 알리는 서막이었다.

그때였다. 진혁의 등 뒤, 차원의 균열이 찢어지며 기괴한 소음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치지지직-!

"분석 결과, 실험체 07호의 자아 각성 확인."

"프로토콜을 이탈한 개체. 폐기 절차를 재가동한다."

익숙한 목소리가 아니었다. 시스템보다 훨씬 더 차갑고, 인간의 언어라고 보기 힘든 기계적인 울림.

진혁의 미간이 좁혀졌다.

"폐기 절차?"

그의 흑안이 다시 한번 차갑게 빛났다.

"폐기는 내 쪽에서 이미 시작했다."

진혁이 고개를 돌려 차원의 균열을 향해 검을 겨눴다. 그곳에는 신서울이라는 도시를 통째로 삼킬 듯한 거대한 ‘눈’들이 응시하고 있었다.

진정한 전쟁은, 이제부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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