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2화 강림의 전조를 찢다
지하 11층의 공기는 숨이 막힐 듯 무거웠다. 폐기된 실험체들의 악취와 살균제의 비릿한 향이 뒤섞인 공간. 붉은 비상등이 점멸하며 쇳소리를 내는 통로 끝에서, 강진혁은 멈춰 서지 않았다.
그의 발걸음마다 바닥의 강화 합금 타일이 짓이겨졌다. 단전에서 솟구치는 마기는 50만 MW를 상회하는 출력으로 나노머신 회로를 가열하고 있었다. 혈관을 타고 흐르는 것은 피가 아니라, 차원마저 침식할 기세의 끓는 마기(魔氣)였다.
"실험체 07호, 구역 이탈 시도 감지. 사살 프로토콜을 가동한다."
천장과 벽면의 틈새에서 수십 대의 자동 살상 드론이 튀어나왔다. 동시에 복도 양 끝에서 중장갑을 두른 블랙 가드 분대가 고주파 진동검을 전개하며 쇄도했다. 그들은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었으나, 이미 신경계 대부분이 기계로 치환된 살인병기들이었다.
강진혁의 흑안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시스템의 보조 없이, 오직 자신의 감각과 마신경(魔神境)의 직관만으로 전장을 읽었다.
[SYSTEM: 사용자 강진혁, 마기 동기화율 100% 돌파.]
[경고: 주변 공간 불안정. 차원 간섭 현상 발생.]
시스템의 경고음 따위는 이제 들리지 않았다. 진혁은 오른손에 쥐고 있던 검의 자루에 마기를 주입했다. 검신을 타고 푸르스름한 뇌전이 뱀처럼 휘감기며 고주파음을 내뿜었다.
[천뢰마강(天雷魔剛).]
휘둘렀다. 단 한 번의 단순한 횡베기였다. 하지만 그 궤적을 따라 공간 자체가 일그러졌다.
쿠구구구!
통로 전체를 메운 뇌전 폭풍이 블랙 가드들의 장갑을 종잇장처럼 찢어발겼다. 고주파 진동검은 마기의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분자 단위로 붕괴했다. 비명조차 지를 틈은 없었다. 복도에 배치된 모든 드론이 전자기장 교란으로 먹통이 되더니, 이내 가루가 되어 흩날렸다.
11층의 실험동 복도가 순식간에 진공 상태가 되었다. 진혁은 피 냄새와 섞인 매캐한 연기를 뚫고 구금실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진무극, 네가 준비한 제물은 여기서 회수한다."
그의 목소리는 낮고 건조했지만, 그 안에는 뼈를 깎는 듯한 살의가 서려 있었다.
구금실의 거대한 강화 유리관 너머로 희미한 빛이 감돌고 있었다. 그 안에는 티타늄 그룹의 후계자, 진세린이 무기력하게 매달려 있었다. 그녀의 전신에는 수십 개의 케이블이 연결되어 있었고, 그 케이블들은 타워의 중앙 코어를 넘어 보이지 않는 차원의 균열과 이어져 있었다.
진혁은 유리관 앞에 멈춰 서서 손을 뻗었다. 케이블을 타고 흐르는 데이터의 흐름이 느껴졌다. 단순히 생체 에너지를 빼앗는 것이 아니었다. 진세린을 매개체 삼아 차원 너머의 '무엇인가'를 이 세상에 강림시키려는 시도였다.
"이런 짓까지 해서 불멸을 얻고 싶었나."
진혁이 손바닥을 유리관에 밀착했다. 그의 손끝에서 뿜어져 나온 마기가 강화 유리의 분자 구조를 파고들었다. 진동을 억제하고 내부의 보안 시스템을 역으로 해킹했다.
치이익!
유리관이 비명 같은 파열음을 내며 갈라졌다. 시스템의 보안 코드가 진혁의 마기를 거부하며 붉은 경보를 띄웠다.
[경고: 관리자 권한 외 침입 발생. 자동 방어 시스템 가동.]
"관리자 권한?"
진혁이 비릿하게 웃었다. 그는 자신의 심장을 움켜쥐듯 단전의 마기를 폭발시켰다.
"내가 곧 관리자이자, 이 프로토콜의 주인이다."
만상귀일(萬象歸一). 주변의 모든 에너지와 데이터를 강제로 역류시키는 마공의 극의가 발현되었다. 유리관을 감싸고 있던 보안 방벽이 마치 빨려 들어가는 소용돌이처럼 진혁의 손 안으로 흡수되었다.
쿠광-!
유리관이 산산조각 났다. 액체가 쏟아져 내리고, 매달려 있던 진세린이 바닥으로 추락했다. 진혁은 찰나의 순간에 도약하여 그녀를 가볍게 품에 안았다.
흐릿한 눈을 뜬 진세린이 낯선 얼굴을 마주했다. 그녀의 눈동자 속에는 텅 빈 공허함만이 가득했다. 아직 차원 강림의 후유증으로 인해 자아의 경계가 무너져 있는 상태였다.
"……진혁?"
그녀가 갈라진 목소리로 읊조렸다. 그녀의 생체 코어는 이미 한계치까지 과부하가 걸려 있었다. 진혁은 곧바로 자신의 마기를 그녀의 혈관으로 흘려보냈다. 억지로 끊어진 기혈을 잇고, 폭주하는 코어의 출력을 강제로 진정시켰다.
"죽기엔 너무 이르다. 네 아버지의 몰락을 끝까지 지켜봐야지."
진혁이 그녀를 품에 안은 채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미 11층 전체가 붕괴하기 시작하고 있었다. 진무극은 강진혁이 여기까지 도달할 것을 예측했는지, 타워 자체를 무너뜨려 매몰시킬 작정인 모양이었다.
천장이 굉음과 함께 내려앉았다. 수천 톤의 콘크리트 잔해가 쏟아지는 그 아비규환 속에서, 진혁은 품 안의 진세린을 더욱 단단히 고쳐 잡았다.
"시스템은 꺼졌다. 이제부터는 오직 힘의 논리뿐이다."
진혁의 등 뒤에서 짙은 검은색 마기가 날개처럼 펼쳐졌다. 그것은 단순히 에너지가 형상화된 것이 아니었다. 차원의 공간 법칙을 찢고 나아가는, 진정한 '천마'의 형상이었다.
그가 지상으로 도약했다. 단 한 번의 도약만으로 11층의 천장을 뚫고, 10층과 9층의 바닥을 차례로 박살 내며 솟구쳤다.
지상으로 가까워질수록 신서울의 밤하늘이 붉게 물들어갔다. 진무극이 준비한 차원의 균열이 타워 상층부에서 거대한 소용돌이를 치고 있었다. 강진혁의 흑안이 타워 정상, 그 너머의 허공을 응시했다. 그곳에는 차원 너머에서 이 세상을 내려다보는 거대한 눈동자가 어렴풋이 형상을 드러내고 있었다.
진혁은 멈추지 않았다. 그는 진세린을 안은 채, 지옥의 문을 향해 거침없이 날아올랐다.
[SYSTEM: 전역 경보. 비정상적 에너지 반응 감지.]
[대상이 시스템의 통제를 완전히 벗어났습니다.]
이제 시스템은 그를 경고할 뿐, 더 이상 막을 수 없었다. 강진혁은 마기의 날개를 펄럭이며 타워 최상층을 향해 뇌전처럼 쏘아 올려졌다. 그의 손끝에서 맺힌 천마일검의 기운이 신서울의 밤을 가르고 있었다. 진무극의 계획은 이제 완벽하게 뒤틀리고 있었다.
'기다려라, 진무극.'
진혁의 입가에 서늘한 미소가 번졌다. 심연을 찢고, 그 끝에 있는 흑막의 목을 베어버릴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진혁이 타워 50층의 외벽을 뚫고 지상으로 도약하는 순간, 거대한 폭음과 함께 신서울 전체가 진동하기 시작했다. 최후의 결전이 시작되고 있었다.
진혁이 타워의 외벽을 뚫고 지상으로 솟구쳐 오르자, 신서울의 차가운 밤공기가 폐부로 쏟아져 들어왔다. 발아래로 펼쳐진 마천루의 불빛들이 마치 짓밟힌 벌레들의 눈동자처럼 아득하게 반짝였다. 품 안의 진세린은 여전히 의식을 찾지 못한 채, 미세하게 떨리는 숨만을 토해내고 있었다.
그녀의 생체 코어는 간신히 동력을 유지하고 있었으나, 몸 곳곳에 박힌 강림용 인터페이스가 마기와의 충돌로 끊임없이 불꽃을 튀기고 있었다. 진혁은 공중에서 몸을 회전시키며, 빗발치는 티타늄 그룹의 요격용 미사일 세례를 마기의 장막으로 튕겨냈다.
"성가시게."
진혁이 나직이 뇌까렸다. 타워의 옥상, 거대한 안테나 타워가 위치한 곳에서부터 붉은 빛의 차원문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그곳에서 뿜어져 나오는 압도적인 중압감은 일반적인 생체 코어의 출력을 아득히 상회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현대 기술의 산물이 아닌, 차원 너머의 '주인'들이 빚어낸 고위급 생명체의 강림 징조였다.
[SYSTEM: 경고! 차원 동기화율 88%. 해당 영역의 물리 법칙이 재구성됩니다.]
HUD는 이미 진혁의 시야에서 사라진 지 오래였다. 하지만 그는 시스템이 전해오던 그 기괴한 감각을 자신의 육체 감각으로 완벽하게 치환해내고 있었다. 공기의 밀도가 달라지고, 빛의 굴절이 비틀리는 그 찰나의 순간을 진혁은 읽어냈다.
그는 진세린을 한 손으로 지탱한 채, 허공을 딛고 도약했다.
콰아아앙-!
그가 지나간 궤적마다 대기가 폭발하며 충격파가 일었다. 타워의 방어막이 진혁의 접근을 막으려 했으나, 진혁이 휘두른 손날 한 번에 방어막은 유리 조각처럼 박살 났다.
정상부에 도달하자, 그곳에는 은발을 정갈하게 넘긴 진무극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마치 우아한 연주회를 관람하는 귀족처럼, 타워의 가장 높은 곳에서 차원문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의 주변으로는 십수 명의 블랙 가드 정예들이 호위하고 있었으나, 진혁의 위압감 앞에서 그들은 감히 움직이지도 못한 채 몸을 떨고 있었다.
"늦었구나, 강진혁."
진무극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의 눈동자는 인간의 것이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차갑고 데이터로 가득 차 있었다.
"너를 '그릇'으로 완성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과 자원을 쏟아부었는지 아나? 너는 마침내 내 의도대로 마신경에 도달했다. 이제 그 육체와 정신은 나의 새로운 안식처가 될 것이다."
진무극의 말투는 오만했다. 그는 진혁의 무력이 자신을 위협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음에도, 마치 장기판의 말 하나가 제자리에 놓였다는 듯한 안도감을 보이고 있었다.
진혁은 피식, 짧은 냉소를 흘렸다.
"안식처? 네놈은 평생을 데이터 쪼가리에 미쳐서 사리분별도 못 하는군."
진혁은 품에서 진세린을 내려놓았다. 그녀의 몸을 감싸고 있던 나노머신 보호막이 진혁의 의지에 따라 형상을 바꾸며 그녀를 안전한 곳으로 옮겼다. 이제 전장에는 진혁과 진무극, 그리고 그들 뒤에서 요동치는 차원문만이 남았다.
"진무극, 네가 나를 '그릇'으로 설계했다고 믿나? 아니, 너는 그저 나를 강하게 만들기 위한 '사육사'였을 뿐이다. 그리고 이제, 사육사는 사육당한 짐승의 발톱에 찢길 시간이다."
진혁이 발을 구르자, 타워의 옥상이 거미줄처럼 갈라졌다. 50만 MW의 출력이 진혁의 전신을 감쌌다. 뇌전마강이 온몸의 근육을 강제로 강화했고, 마신경의 경지가 공기 중의 마기를 자신의 내공으로 흡수하기 시작했다.
진무극이 가볍게 손을 들어 올리자, 그의 뒤편에 있던 차원문에서 거대한 기계 장치들이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현대 군사기술의 정점, S급 초인조차 순식간에 녹여버린다는 '천마 전술 병기'들이었다.
"이것이 네가 극복하지 못한 마지막 한계다, 진혁아."
진무극의 명령과 함께 수십 개의 레이저 포구가 진혁을 향해 조준되었다. 신서울의 밤하늘이 순식간에 붉은 레이저로 뒤덮였다. 하지만 진혁은 피하지 않았다. 아니, 피할 필요조차 없었다.
"한계?"
진혁이 검을 뽑아 들었다. 고대의 마공과 현대의 나노머신이 완벽하게 융합된, 이름 없는 검이었다.
"그건 네 좁은 시야 속에서나 존재하는 단어지."
진혁이 검을 찔러 넣었다.
[신천마신공(新天魔神功) - 제4식: 만상파멸(萬象破滅).]
검끝에서 뿜어져 나온 마기는 레이저와 충돌하는 순간, 물리 법칙을 역전시켰다. 붉은 레이저는 굴절되어 도리어 진무극이 설치해둔 차원문의 기계 장치들을 덮쳤다.
콰아아앙!
기계들이 연쇄 폭발을 일으키며 타워 상층부가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진무극의 얼굴이 처음으로 일그러졌다. 그는 황급히 자신의 코어를 가동해 방어막을 펼쳤지만, 진혁의 검기는 이미 그의 방어막을 뚫고 가슴팍에 닿아 있었다.
"네가 만든 프로토콜의 모든 결함은, 내가 이미 내 몸으로 직접 증명했다."
진혁의 검이 진무극의 어깨를 관통했다. 푸른 뇌전이 진무극의 전신을 타고 흐르며 내부 회로를 마비시켰다. 진무극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뒷걸음질 쳤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 차원 강림은 이미 시작되었어!"
진무극이 광기에 차 소리쳤다. 그의 말대로, 무너져 내리는 타워의 파편 사이로 거대한 손아귀가 차원문 너머에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차원의 균열이 더욱 커지며, 신서울의 밤하늘 전체가 보라색 번개로 뒤덮였다.
진혁은 도망치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거대한 손아귀를 향해 검을 치켜들었다.
"이 세상의 법도는 내가 정한다. 너희 같은 차원 밖의 잡것들이 감히 발을 들일 곳은 아니다."
진혁의 등 뒤에서 거대한 마신(魔神)의 형상이 떠올랐다. 그것은 천마(天魔)의 잔영이자, 진혁이 스스로 완성한 신천마신공의 정수였다. 그는 이제 더 이상 시스템의 데이터가 아니었다. 스스로가 하나의 신화이자, 이 시대의 유일한 전설이었다.
"진무극, 네가 그토록 원하던 천마의 모습이 바로 이것인가?"
진혁의 질문에 진무극은 답하지 못했다. 차원의 문틈에서 쏟아져 나오는 살기보다, 진혁 한 사람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마기가 더 깊고 어두웠기 때문이다.
진혁은 도약했다. 수천 미터 상공의 차원문을 향해, 오직 자신의 의지만을 믿고 날아올랐다. 그것은 인간의 영역을 넘어선, 신화적인 비행이었다. 신서울의 모든 이들이 올려다보는 그 밤하늘에서, 강진혁은 검을 높이 들어 올려 차원의 심장을 겨누었다.
"천마일검(天魔一劍)."
검이 휘둘러진 순간, 세상의 모든 소리가 사라졌다. 오직 뇌전의 굉음만이 신서울을 집어삼켰고, 차원문은 비명과 함께 산산조각 나기 시작했다. 진혁의 흑안이 번뜩였다. 이제, 진짜 사냥이 시작될 차례였다.
그의 눈앞에는 이제 시스템의 경고창 대신, 차원 너머에 숨어있는 '진정한 흑막'들의 당혹스러운 시선이 느껴지고 있었다.
"나를 불러낸 것을, 후회하게 만들어주지."
타워가 완전히 붕괴하며 진혁은 차원문의 파편 속으로 사라졌다. 신서울의 밤은 그렇게 가장 격렬하고도 짧은 폭풍을 맞이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진혁의 검은 이미 다음 차원을 겨누고 있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