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6화 전장에서의 운기조식
지옥도가 열려 있었다.
신서울의 하늘은 잿빛 먼지와 검게 그을린 연기로 뒤덮여, 낮인지 밤인지조차 구분할 수 없었다. 고막을 찢는 듯한 폭음과 비명, 그리고 육중한 금속이 부딪치는 소리가 대기를 진동시켰다.
"방어선 사수해! 놈들이 뚫고 들어오면 진혁 님께 방해가 된다!"
송수연의 절규가 전장에 울려 퍼졌다. 그녀의 대검이 휘둘러질 때마다 ‘아이언 윌’ 용병단의 사이보그 병사들이 불꽃을 튀기며 나뒹굴었다. 하지만 적은 끝이 없었다. 티타늄 그룹이 보낸 정예 추격대는 차원 틈새에서 흘러나온 심연의 기운을 받아 더욱 흉폭해져 있었다.
그 중심에 강진혁이 있었다.
그는 무릎을 굽히고 정좌한 채였다. 사방이 적에게 포위된, 죽음의 한복판에서 그는 눈을 감고 있었다. 주변을 에워싼 붉은 마기가 거대한 구(球) 형태의 막을 형성하며 빗발치는 총탄과 포격을 튕겨내고 있었다.
[SYSTEM WARNING: 생체 코어 출력 과부하. 임계치 98% 돌파.]
[경고: 내부 기혈 역류. 마기 과잉으로 인한 신경 회로 손상 가능성 84%.]
시야에 떠오르던 푸른색 HUD가 붉게 점멸하며 사라졌다. 시스템의 보조가 끊긴 지 오래였다. 인공지능 설화의 냉철한 연산 대신, 진혁의 귓가에는 오직 자신의 심장 소리와 혈관을 타고 흐르는 마기의 포효만이 들렸다.
‘천마의 길은 계산기가 가르쳐주는 것이 아니다.’
진혁은 이를 악물었다. 단전(丹田)은 마치 끓어오르는 용암처럼 요동쳤다. 심연의 주인에게서 강제로 흡수한 데이터와 마기가 뒤섞여 몸 안에서 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이대로 두면 자멸한다. 코어가 터지고, 혈관이 녹아내릴 것이다.
‘하지만… 이 정도의 격동조차 제어하지 못한다면, 천마(天魔)라는 이름은 가당치도 않지.’
진혁의 피부 위로 핏줄이 불거져 나왔다. 은빛 회로 선이 마기에 잠식되어 검게 번뜩였다. 그는 폐부 깊숙한 곳에서부터 한숨을 내뱉었다. 그것은 일반적인 호흡이 아니었다. 주위의 공기를, 아니 공간에 잔류한 마기를 단전으로 들이붓는 거대한 흡기(吸氣)였다.
콰아아앙!
진혁의 주위로 회오리바람이 일었다. 그 기세에 근처에 다가오던 용병들이 비명을 지르며 튕겨 나갔다.
"진혁 님께서 움직이신다! 다들 조금만 더 버텨!"
송수연이 피투성이가 된 얼굴로 악을 썼다. 그녀의 왼쪽 어깨는 이미 반쯤 날아가 있었고, 기계 의수가 덜렁거리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멈추지 않았다. 자신의 목숨이 꺼져가는 순간에도 시선은 오직 진혁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진혁은 그 모든 소리를 뇌리에 새겼다. 그들의 피가, 비명이, 의지가 공기 중에 흩어지지 않고 진혁의 기혈로 스며들고 있었다.
[마신경(魔神境) 2단계 진입 가속… 기혈 재구성 중.]
[연산 불가. 독자적 기혈 경로 생성.]
그는 의식을 더욱 깊은 곳으로 침잠시켰다. 외부의 적은 중요하지 않았다. 지금 진혁에게 남은 유일한 적은, 제어되지 않는 자신의 내공이었다.
마기는 본래 파괴적인 힘이다. 기계의 논리로는 통제할 수 없다. 오직 ‘의지’만이 그 거친 야수를 길들일 수 있다. 진혁은 의지를 한 점으로 모았다. 차가운 얼음처럼 단단하고, 태양처럼 뜨거운 검(劍)의 의지.
‘흡원천공(吸元天功)의 변주.’
그는 몸 안에서 충돌하는 두 힘을 억지로 짓누르는 대신, 서로 융합되도록 유도했다. 심연의 데이터가 가진 차원적 파동과, 자신이 수련해 온 마기가 뒤섞여 새로운 궤적을 그리며 단전을 회전했다.
그것은 마치 소용돌이치는 은하와 같았다.
“크윽…!”
진혁의 입가에서 검은 피가 한 줄기 흘러내렸다. 육체의 물리적 한계가 비명을 질렀다. 나노머신이 찢겨나가는 피부를 복구하려 발버둥 쳤지만, 마기의 흐름이 너무 거대했다. 하지만 진혁은 웃었다.
이 고통이야말로 살아있다는 증거이자, 신으로 나아가는 계단이었다.
그때였다. 전장 저편에서 거대한 진동이 일었다. 티타늄 그룹이 투입한 최종 병기, ‘아바돈의 사도’가 모습을 드러냈다. 수십 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강철 거인이 화염포를 충전하며 진혁을 조준했다.
“저 괴물을 막아야 해!”
윤아영의 절박한 목소리가 통신망을 뚫고 들려왔다.
“진혁 님, 일어날 수 없어요! 지금 무리하면…!”
대답은 없었다. 대신, 진혁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마기가 하늘을 찌를 듯 솟구치기 시작했다. 붉은 마기는 점차 푸른색을 띠더니, 결국 보랏빛 섬광으로 변해 대기를 가르고 있었다.
진혁이 서서히 눈을 떴다. 흑안(黑眼) 속에 담긴 것은 인간의 감정이 아니었다. 그것은 심연을 꿰뚫어 보는 절대자의 안광이었다.
그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좌했던 자리의 콘크리트 바닥이 진혁의 발끝에서 시작된 파동으로 인해 가루가 되어 흩어졌다.
“시간은 충분했다.”
진혁의 목소리는 낮고 차분했지만, 전장의 모든 이들에게 벼락처럼 울려 퍼졌다.
그의 손끝에 맺힌 마기가 마치 실체화된 검강처럼 길게 늘어났다. 고주파로 진동하는 마기는 주변의 공기를 찢고, 공간을 뒤틀었다.
아바돈의 사도가 화염포를 발사했다. 모든 것을 녹여버릴 듯한 플라즈마 광선이 진혁을 덮쳤다.
하지만 진혁은 피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검을 가볍게 휘둘렀다.
“천마일검(天魔一劍).”
단 한 번의 휘두름.
광선은 허공에서 분해되었다. 마치 물감이 번지듯, 플라즈마 에너지는 진혁의 검 끝에 닿는 순간 그 형태를 잃고 흩어졌다. 그리고 그 여파는 멈추지 않고 전진해, 수십 미터 크기의 아바돈의 사도를 정중앙에서부터 두 동강 내었다.
콰아아앙!
굉음과 함께 거대한 강철 거인이 불덩이가 되어 추락했다. 전장이 일순간 정적에 휩싸였다.
진혁은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시스템의 로그도, 보조 창도 없었다. 하지만 그는 알고 있었다. 자신의 단전이 어떤 상태인지, 마기가 어떻게 흐르고 있는지.
[마신경(魔神境) 완성.]
이제 더 이상 ‘프로토콜’은 필요 없었다. 강진혁 자신이 곧 천마였으며, 그가 행하는 모든 것이 법(法)이 되었다.
그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차원의 틈새 너머, 자신을 노리고 있는 진짜 ‘흑막’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나를 그릇이라 불렀나.”
진혁의 입가에 서늘한 미소가 걸렸다.
“그 그릇이, 너희들의 세계를 깨부수러 갈 차례다.”
그는 다시 한번 대지를 박차고 솟구쳤다. 북쪽 지평선을 향해, 그가 도달해야 할 최종적인 심연을 향해. 전장의 폐허 위로, 진정한 천마의 전설이 다시 쓰이고 있었다.
[Warning: 차원 저항 계수 급증.]
[알림: 천마의 의지가 공간을 재편합니다.]
진혁의 검 끝에서 붉은 번개가 타올랐다. 그것은 단순한 마기가 아니었다. 심연조차 공포에 떨게 할, 진정한 파멸의 서곡이었다.
“다음은 누구지?”
그의 음성이 차원의 틈새를 넘어 심연의 주인들에게 전달되었다. 전장은 이제 강진혁이라는 거대한 폭풍 속에 잠기고 있었다.
심연의 주인들은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그들의 시선이 닿는 곳마다 공간이 일그러지고 비명 섞인 허공의 울림이 쏟아져 내렸다. 차원의 틈새는 마치 굶주린 짐승의 아가리처럼 더욱 크게 벌어지며 진혁을 집어삼키려 들었다.
“말이 없군. 역시, 그저 구경꾼들에 불과했나.”
진혁은 비웃음을 흘리며 발아래의 대지를 걷어찼다. 그가 딛고 선 지면이 폭발하듯 솟구쳤고, 진혁의 몸은 보랏빛 궤적을 그리며 찰나의 순간에 차원의 문 앞까지 도달했다.
그의 검 끝에 머물던 붉은 번개가 뱀처럼 꿈틀거리며 허공을 후려쳤다.
[뇌전마강(雷電魔剛) - 개변(改變)]
단순한 파괴가 아니었다. 진혁은 흡수한 심연의 파동을 번개의 주파수와 강제로 동조시켰다. 푸른 뇌전과 붉은 마기가 엉키며 빚어낸 기괴한 섬광이 차원의 문 표면을 강타했다.
‘쿠구구궁—!’
차원의 틈새가 비명을 질렀다. 닫히지 않으려 버티던 공간의 장벽이 진혁의 마기에 짓눌려 쩍쩍 갈라지기 시작했다. 틈새 너머로, 수천 개의 눈을 가진 기괴한 형상들이 어둠 속에서 꿈틀거리는 것이 보였다. 그들은 진혁의 육체를 '그릇'으로 쓰기 위해 수백 년을 기다려온 고위 존재들이었다.
“내 육체는 너희들의 놀이터가 아니다.”
진혁은 검을 들어 틈새의 중심부를 정확히 겨누었다.
“이곳은 내가 태어난, 그리고 내가 지배할 땅이다.”
그의 등 뒤로 칠흑 같은 마기가 날개처럼 펼쳐졌다. 그것은 실체가 없는 기운이었으나, 보는 이들로 하여금 절대적인 공포를 느끼게 하는 마왕의 위용이었다. 니르바나의 대원들은 그 압도적인 기세에 눌려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했다. 윤아영은 멀리서 그 모습을 지켜보며 홀로그램 패드를 놓치고 말았다.
“인간의 범주를… 완전히 벗어났어.”
그녀의 읊조림은 전장의 적막 속에 묻혔다.
진혁의 검이 내려그어졌다. 그것은 무공이라기보다 하나의 법칙(法則)이었다. 공간을 단절하고, 차원의 결합을 끊어내는 일격.
‘멸세(滅世).’
검 끝에서 뿜어져 나온 보랏빛 파동이 차원의 틈새를 정면으로 관통했다. 틈새 너머에서 쏟아지던 기괴한 비명 소리가 일시에 끊겼다. 어둠 속에서 진혁을 노려보던 수천 개의 눈이 경악으로 물들며 차례로 소멸해 갔다. 차원의 문은 마치 종이장처럼 찢겨나가더니, 허공에서 가루가 되어 흩어졌다.
[경고: 차원 안정성 0.001% 미만.]
[SYSTEM: 모든 외부 간섭 회로가 차단되었습니다.]
마지막까지 남아있던 시스템의 잔재마저 완전히 침묵했다. 진혁은 허공에 떠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불타는 신서울의 폐허, 그 위에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동료들의 눈동자. 그들은 그를 영웅으로, 혹은 공포의 대상으로 보고 있었다.
진혁은 천천히 지상으로 내려앉았다. 그의 발이 닿는 곳마다 마기가 흙먼지를 잠재웠다.
“진혁 님…!”
송수연이 비틀거리는 몸을 이끌고 달려왔다. 그녀의 눈가엔 안도와 경외가 뒤섞여 있었다. 진혁은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전투는 끝났다.”
“하지만… 저 틈새 너머의 존재들이 다시 올 수도 있지 않습니까?”
진혁은 고개를 저었다. 그의 검 끝은 여전히 붉은 잔영을 남기고 있었다.
“그들은 이제 오지 못한다. 아니, 오더라도 내 손에 찢길 뿐이다.”
그의 말은 오만하게 들릴 수도 있었으나, 그 자리에 있던 누구도 반박하지 못했다. 방금 전 그가 보여준 힘은 이미 인간의 이해 범위를 넘어선 신의 영역이었으니까.
진혁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북쪽을 응시했다. 그곳에는 티타늄 그룹이 숨겨온 또 다른 진실, 그리고 자신을 실험체 07호로 만들었던 근본적인 원흉들이 머무는 ‘아크 솔리스(Arc Solis)’ 요새가 있었다.
“세린은?”
“본부로 복귀했습니다. 회장 진무극이 남긴 데이터 칩을 해독하고 있다고….”
“그래.”
진혁은 짧게 답하고는 몸을 돌렸다. 그의 발걸음은 거침없었다. 니르바나 대원들이 그의 뒤를 따르려 했지만, 진혁은 손을 들어 제지했다.
“각자의 위치로 돌아가라. 다음 전장은 너희들이 감당할 수 있는 규모가 아니다.”
“하지만!”
“내 명령이다.”
단호한 어조에 송수연의 입술이 굳게 닫혔다. 진혁은 다시 하늘로 솟구쳤다. 바람이 그의 머리카락을 거칠게 흩트렸다. 시스템의 HUD가 사라진 자리에, 이제는 세상의 이치가 직접 보이기 시작했다.
그는 북쪽 지평선을 향해 빠르게 날아갔다. 그가 지나는 길마다 구름이 갈라지고, 대기가 마기의 파동에 의해 진동했다.
‘진무극은 시작일 뿐이었다.’
진혁은 자신의 단전을 살폈다. 500,000 MW를 상회하는 기운이 혈관을 타고 흐르며 매 순간 세포를 재구성하고 있었다. 그는 더 이상 시스템의 데이터 보조가 필요 없었다. 심장 근처에 이식된 구형 코어는 이미 마기에 잠식되어, 그 자체가 영원히 꺼지지 않는 태양과 같은 내공의 원천이 되어 있었다.
그때, 진혁의 뇌리에 기억의 파편 하나가 스쳐 지나갔다.
어린 시절, 차가운 배양액 속에서 들려오던 기계음.
[실험체 07호, 의식 동기화율 0.01%. 인간의 감정 제거 시작.]
그 목소리의 주인공은 진무극이 아니었다. 그보다 더 깊은 곳, 티타늄 그룹의 뿌리라 불리는 고대의 그림자들. 1,000년 전 천마의 유골을 발견하고, 그 저주받은 마공을 현대 기술과 결합하려 했던 최초의 탐구자들.
“찾아내겠다.”
진혁의 눈빛이 더욱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는 단순한 복수를 넘어, 이 세계의 질서 그 자체를 다시 쓰려 하고 있었다.
북쪽 지평선 너머에서 거대한 폭풍이 몰려오고 있었다. 아크 솔리스 요새가 뿜어내는 강렬한 전자기파가 진혁의 마기와 충돌하며 하늘에 오로라 같은 빛을 만들어냈다.
그 빛은 마치 그에게 보내는 도전장 같았다.
진혁은 검을 허공에 세웠다. 그의 손에서 뿜어져 나온 붉은 뇌전이 검을 타고 흐르며, 주변의 공기를 순식간에 진공 상태로 만들었다.
“기다려라.”
그는 폭풍의 눈을 향해 날아들었다.
저 멀리, 거대한 강철 요새의 윤곽이 드러났다. 구름을 뚫고 솟아오른 아크 솔리스의 마천루들. 그 꼭대기에서 누군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진무극의 뒤에 숨어있던 진짜 주인, 자신의 운명을 조작하려 했던 자들.
진혁은 검을 길게 늘어뜨렸다. 그의 몸 주변으로 보랏빛 마기가 회오리치며, 마치 천마가 강림하는 듯한 환영을 만들어냈다.
“오늘, 이 지상에서 모든 프로토콜을 파기한다.”
그의 일갈은 요새 전체를 울리는 진동이 되었다. 요새의 방어막이 붉게 점멸하며 거대한 포탑들이 일제히 진혁을 향해 회전하기 시작했다. 수만 개의 레이저 유도탄이 그를 향해 쏟아져 들어왔다.
진혁은 눈을 감았다.
상태창도, 시스템도 없었다.
오직 내 안의 마기(魔氣)와, 그 마기가 가리키는 파괴의 궤적뿐.
“천마일검(天魔一劍) - 멸(滅).”
그가 허공을 내리그은 순간, 시간조차 멈춘 듯했다. 쏟아지던 미사일들이 공중에서 멈춰 섰고, 그 뒤로 보랏빛 검기가 요새의 전면 방어막을 거대한 파도처럼 덮쳤다.
방어막이 깨지는 소리는 비명보다 더 처절했다. 요새의 외벽이 종잇장처럼 구겨지고, 그 안에서 비상경보음이 신서울 전역을 뒤흔들었다.
진혁은 멈추지 않았다. 그는 파괴된 벽을 뚫고 요새의 내부로 직접 뛰어들었다. 이제 그곳은 그의 전장이자, 신천마신공이 완성될 시험대였다.
그의 등 뒤로 문이 닫히고, 요새 내부의 조명이 붉게 점멸했다.
진혁은 어둠 속에서 웃었다.
드디어, 가장 깊은 심연에 도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