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0화 광마(狂魔)의 망령들
아바돈의 심장부, 4,000층 아래로 내려올수록 공기는 더욱 무겁고 탁했다. 썩은 기름 냄새와 타버린 생체 조직의 악취가 섞여 숨을 쉴 때마다 폐부를 찔렀다. 칠흑 같은 어둠을 가르는 것은 오직 강진혁의 손끝에서 일렁이는 보랏빛 마기뿐이었다.
그때였다.
“실패작 07호, 네가 여기까지 올 줄은 몰랐군. 아니, 어쩌면 예정된 수순이었을지도.”
스피커 너머로 들려오는 닥터 베인의 신경질적인 웃음소리. 그와 동시에 지하 공간 전체가 붉은 경보등으로 물들었다. 치이익, 하는 기계음과 함께 벽면의 강철 수조들이 일제히 개방되었다.
"크아아아아!"
짐승의 울음소리가 동굴을 울렸다. 뇌 개조로 인해 시두(視頭) 회로가 밖으로 흉측하게 노출된 괴물들. 아바돈의 어둠 속에서 쏟아져 나온 것은 백여 대의 '양산형 광혈마'였다.
그들의 눈은 이성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핏빛으로 점멸하고 있었다. 한 명 한 명이 3등급 이상의 고출력 코어를 탑재한 살인 병기들이었다.
[SYSTEM INFO: 다수의 적 탐지.]
[경고: 고출력 마기 반응체 112개체 확인.]
[전술 예측: 현재 환경에서 물리적 회피율 0.04%.]
시스템의 냉정한 경고음이 머릿속을 파고들었다. 하지만 강진혁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는 천천히 허리춤의 검을 뽑아 들었다.
"망령들의 춤인가."
진혁의 검신에 보랏빛 마기가 서리며 주변의 공기가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먼저 튀어 나온 광혈마 하나가 레이저 포신을 가동하며 달려들었다. 놈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붉은 마기는 이미 통제 불능의 폭주 상태였다. 놈의 발이 지면을 짓이기며 순식간에 진혁의 품 안으로 파고들었다.
콰아앙!
진혁은 피하지 않았다. 아니, 피할 필요가 없었다. 그는 가볍게 검을 휘둘러 놈의 레이저 궤적을 튕겨내고, 왼손으로 놈의 관자놀이를 움켜쥐었다.
[흡원천공(吸元天功) - 역류(逆流) 활성화.]
"크윽!"
놈의 코어에서 뿜어져 나오던 폭주하는 에너지가 진혁의 손바닥을 타고 역류하기 시작했다. 놈의 신체가 마른 장작처럼 뒤틀리며 순식간에 재가 되어 흩어졌다. 하지만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와라."
남은 백여 명의 광혈마가 일제히 포문을 열었다. 붉은 광선과 플라즈마 탄환이 비처럼 쏟아졌다. 좁은 지하 통로가 폭발음으로 가득 찼다. 암석이 녹아내리고 강철벽이 종잇장처럼 구겨졌다.
진혁은 그 폭풍의 한가운데를 뚫고 나갔다. 마광신보(魔光神步)를 전개한 그의 몸은 잔상을 남기며 적들의 사이를 유령처럼 파고들었다.
그의 검은 단순한 무기가 아니었다. 만상귀일(萬象歸一)의 경지가 투영된 검격은 광혈마들이 뿜어내는 마기의 흐름을 강제로 비틀어버렸다.
서로의 공격이 서로를 향하게 만든다.
"비효율적이군."
진혁의 차가운 일갈과 함께 광혈마들의 진형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그는 적의 에너지를 단순히 흡수하는 것에 그치지 않았다. 흡수한 마기를 자신의 내부에서 정제해, 다시 놈들의 회로를 교란하는 전자기파로 변환해 쏘아 보냈다.
찌릿-!
광혈마들의 시두 회로가 과부하로 터져 나갔다. 기괴한 비명과 함께 놈들이 서로의 몸을 뜯어먹듯 엉겨 붙었다.
닥터 베인의 비명이 스피커를 통해 터져 나왔다.
“말도 안 돼! 저건 데이터상으로 불가능한 연산이야! 어떻게 마기를 전자 신호로 변환해? 저 녀석, 대체 정체가 뭐야!”
진혁은 대답하지 않았다. 놈들의 시체를 밟고 지나갈 뿐이었다. 그의 발걸음이 닿는 곳마다 핏빛 망령들이 쓰러졌다.
하지만 숫자가 너무 많았다. 백여 대의 광혈마는 단순히 숫자로만 위협적인 것이 아니었다. 놈들이 죽어가며 방출하는 폭주 마기가 지하 공간 전체를 독성 가스처럼 채우고 있었다.
[Warning: 체내 마기 오염도 상승.]
[Warning: 나노머신 동기화율 일시적 저하.]
진혁의 피부 위로 은빛 회로가 붉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놈들의 마기가 그의 혈관을 파고들어 나노머신과 충돌하고 있었다. 육체가 비명을 지른다. 하지만 그는 이를 악물었다. 여기서 멈추면 이 붉은 안개 속에서 영원히 잠들게 될 것임을 알고 있었다.
"겨우 이 정도인가."
진혁은 멈춰 섰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시스템의 연산 데이터, 닥터 베인의 비명, 광혈마들의 광기 어린 울음소리, 그리고 1,000년 전 천마의 잔재가 남긴 기억들. 그 모든 정보를 뇌리 속에서 강제로 융합했다.
기계와 마공. 현대의 공학적 데이터와 고대의 운기조법.
이 둘은 결코 다른 것이 아니다.
진혁의 단전이 우주를 품은 듯 거대하게 고동치기 시작했다. 그의 몸을 감싸고 있던 마기가 옅은 금빛과 보랏빛이 섞인 기묘한 파동으로 변했다.
"만상귀일(萬象歸一), 그 끝은 파괴가 아니다."
진혁이 검을 바닥에 내리꽂았다.
쿵!
지진이라도 난 듯 지하 공간이 흔들렸다. 진혁을 중심으로 거대한 마기의 파동이 퍼져나갔다. 광혈마들이 달려들던 기세가 꺾였다. 그들은 마치 거대한 중력에 눌린 듯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SYSTEM INFO: 사용자 강진혁의 경지 변화.]
[경지 단계 재측정...]
[경지: 마기융합 3단계, '천마현신(天魔現身)'으로의 전이 시작.]
진혁의 눈이 다시 떠졌다. 그의 눈동자에는 이제 인간의 안광이 아닌, 수만 개의 연산 회로가 겹쳐진 기괴하고도 아름다운 문양이 맺혀 있었다.
광혈마들이 공포에 질려 뒷걸음질 쳤다. 그들은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눈앞의 인간이 더 이상 자신들과 같은 '실험체'가 아니라는 것을. 그는 이미 그들의 '지배자'가 되어 있었다.
"너희들에게 안식을 주마."
진혁이 검을 들어 올렸다.
검강이 보이지 않는 파동이 되어 공간을 갈랐다.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찰나의 참격.
스슥-!
백여 대의 광혈마가 일제히 멈춰 섰다. 놈들의 몸 중심에 아주 미세한 균열이 생겨났다. 그 균열 속에서 보랏빛 빛줄기가 새어 나왔다.
"끄아아아아!"
단 한 번의 참격으로 백여 대의 양산형 광혈마가 원자 단위로 분해되어 증발했다. 지하 4,000층의 어둠이 한순간에 밝은 보랏빛으로 물들었다가 다시 사라졌다.
지독했던 핏빛 안개가 걷히고, 고요만이 남았다.
진혁은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단전 출력 210,000 MW를 상회하는 마기를 단 일격에 쏟아부은 대가는 컸다. 온몸의 근육이 비명을 질렀고, 생체 코어가 과열되어 하얀 김을 뿜어냈다.
하지만 그는 웃었다.
입가에 흐르는 핏줄기를 닦아내며, 그는 지하 심연의 더 깊은 곳, 닥터 베인이 숨어 있는 통제실을 응시했다.
그때였다. 통제실의 강화 유리가 박살 나며, 닥터 베인이 덜덜 떨리는 손으로 홀로그램 장치를 조작하고 있었다.
"괴물... 넌 괴물이야! 이게... 이게 시스템이 계산할 수 있는 무력이라고?!"
베인의 외침 속에는 광기와 공포가 뒤섞여 있었다.
진혁은 그를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한 걸음, 한 걸음이 닿을 때마다 지면이 움푹 파였다.
"너희들이 만든 지옥이다. 스스로 쳐다보라고."
진혁이 검을 거두고 통제실 앞에 섰다.
그의 눈앞에는 이제 시스템의 HUD가 없었다. 대신, 더 선명한 세상이 보였다. 통제실 내부의 모든 에너지 흐름, 닥터 베인의 심장 박동, 그리고 벽면 뒤에 숨겨진 또 다른 비밀의 좌표까지.
[SYSTEM INFO: 경고. 외부 차원의 관측자가 당신을 주목하고 있습니다.]
뇌리를 찌르는 낯선 경고. 하지만 진혁은 그조차도 무시했다.
그의 시선은 이제 신서울을 넘어, 북쪽 구구역 너머의 끝없는 심연을 향해 있었다. 그곳에서 자신을 '그릇'이라 부르며 기다리고 있을, 1,000년 전의 그 존재.
"왔나."
심연의 중심에서 들려오는 것은 목소리가 아니었다. 전율이었다.
진혁은 망설임 없이 통제실의 문을 박살 내고 내부로 진입했다. 그곳에는 닥터 베인이 아닌, 또 다른 무언가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것은 1,000년 전 천마의 형상을 흉내 낸, 그러나 인간의 육체가 아닌 순수한 기계와 마기가 결합된 괴물이었다.
"너를 기다렸다, 나의 그릇."
괴물이 붉은 눈을 번뜩이며 진혁에게 손을 뻗었다. 그 손끝에서 뿜어져 나오는 마기는 진혁이 지금까지 경험했던 그 어떤 마기보다도 순도가 높고 치명적이었다.
진혁은 검을 다시 고쳐 잡았다.
이번에는 놈의 코어를 파괴하는 것만으로는 끝나지 않을 터였다. 놈을 잡아먹고, 놈의 데이터를 흡수해, 자신의 육체를 다음 단계로 밀어 넣어야 한다.
[천마무상체(天魔無相體) 1차 가동.]
진혁의 피부가 금속성 광택을 띠며 경화되기 시작했다.
"그릇? 웃기지 마라."
진혁의 검 끝이 괴물의 가슴팍을 겨눴다.
"나는 그릇이 아니다. 너를 찢고 그 자리에 들어앉을, 새로운 천마(天魔)다."
지하 심연의 모든 마기가 진혁의 검으로 몰려들었다.
승부의 시간이었다.
그 순간, 괴물의 뒤편에 있던 거대한 차원의 문이 열리며, 신서울의 하늘 전체를 뒤덮을 만큼 거대한 보랏빛 오로라가 지하로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했다.
진혁은 그 빛을 향해 도약했다.
이것은 복수의 끝이자, 진짜 천마가 되기 위한 최후의 도약이었다.
괴물이 뻗은 손끝에서 응축된 마기가 구체(球體)를 이루며 폭발했다. 쾅! 소리와 함께 통제실의 벽면이 산산조각 났다. 놈의 마기는 파괴적인 질량을 품은 채 진혁의 가슴팍을 향해 쇄도했다. 평범한 초인이라면 뼈와 살이 형체도 없이 으깨졌을 위력. 하지만 진혁은 뒷걸음질 치지 않았다.
[천마무상체(天魔無相體) 1차 동기화.]
그의 피부 위로 흐르는 은빛 회로가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꿈틀거렸다. 마기가 충돌하는 찰나, 진혁은 근육의 밀도를 나노 단위로 재구성했다. 단단함이 아닌, 흐르는 듯한 유연함으로. 적의 타격을 튕겨내는 것이 아니라, 그 에너지를 체내로 받아들여 혈관을 타고 흐르게 했다.
“흡수(吸收)하는가?”
괴물의 붉은 눈이 기괴하게 일렁였다. 놈은 진혁이 자신의 마기를 일방적으로 받는 것이 아니라, 제 몸 안에서 정제하고 있다는 사실을 간파한 듯했다.
“그릇에 불과한 놈이 감히 신의 영역을 넘보는구나!”
놈이 포효하며 주먹을 내리찍었다. 통제실 바닥이 통째로 솟구쳤다. 진혁은 솟구치는 잔해를 밟고 도약하며 검을 휘둘렀다.
챙-!
금속성 마찰음이 고막을 찢을 듯 울렸다. 진혁의 검과 괴물의 팔이 부딪친 지점에서는 푸른 스파크가 튀었다. 진혁은 놈의 팔을 타고 흐르는 마기의 흐름을 감지했다. 이것은 기계적인 연산이 아니었다. 놈의 심장부에 박힌 '원본 코어'가 뿜어내는 절대적인 마기의 파동이었다.
‘데이터로 해석할 수 없는 마기인가.’
시스템의 보조가 끊긴 지금, 진혁에게 남은 것은 오직 자신의 통찰뿐이었다. 그는 놈의 마기가 혈관을 타고 놈의 단전으로 돌아가는 경로를 눈으로 쫓았다. 놈의 마기 체계는 완벽하게 닫힌 폐회로였다. 그 회로를 깨뜨리지 않는 한, 놈은 죽지 않는다.
“공간의 틈새가 보이는군.”
진혁이 낮게 읊조렸다. 그는 검을 고쳐 잡으며 마기를 폭발시켰다.
[마기폭발(魔氣爆發) 200,000 MW!]
주변의 공기가 진동했다. 통제실 전체의 기압이 급격히 낮아지며 산소가 희박해졌다. 진혁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마기가 금빛과 보랏빛이 뒤섞인 불꽃이 되어 놈의 몸을 휘감았다.
“크아아아!”
놈이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나려 했다. 하지만 진혁은 이미 놈의 품 안이었다. 놈의 가슴팍, 가장 깊숙한 곳에 자리한 원본 코어의 결함을 진혁은 똑똑히 보았다. 놈은 완벽을 추구했으나, 결국 시스템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해 생겨난 미세한 공백.
그것은 1,000년 전 천마의 의념이 남긴 유일한 '인간적인 흔적'이었다.
“끝이다.”
진혁의 검 끝에 모든 마기가 집중되었다. 놈이 뻗은 손이 진혁의 어깨를 관통하려 했지만, 진혁은 통증조차 무시했다. 오히려 관통당한 어깨를 놈의 팔에 고정하며, 남은 한 손으로 검을 놈의 가슴에 꽂아 넣었다.
푸욱!
검날이 놈의 기계 육체를 뚫고 원본 코어를 정면으로 타격했다. 놈의 몸이 굳어졌다. 놈의 눈에 서려 있던 붉은 광기가 서서히 사그라들었다.
“...어째서... 네놈에게는 시스템의 데이터가 없는데... 어찌하여 이리도 강한 거냐.”
놈이 피와 기름을 토해내며 물었다. 진혁은 놈의 귓가에 입을 맞추듯 나직이 속삭였다.
“계산된 힘 따위는 무공이 아니다. 내 안의 기혈이 흐르는 길, 내가 고통을 딛고 얻은 의지. 그게 바로 내가 너를 넘어서는 이유다.”
콰아아앙!
놈의 가슴에서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다. 통제실 내부가 화염으로 뒤덮였다. 진혁은 폭발의 여파를 뒤로하고 공중으로 솟구쳤다. 놈의 파편이 빗물처럼 쏟아지는 가운데, 진혁은 놈이 남긴 원본 데이터 코어를 손에 움켜쥐었다.
[SYSTEM INFO: 천마의 잔재 데이터 흡수 완료.]
[경지: 신천마신공, 마신경(魔神境)으로의 도약 준비.]
진혁의 몸이 차오르는 힘으로 터질 듯했다. 심연의 벽 너머에서 들려오던 보랏빛 오로라가 진혁의 몸속으로 빨려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것은 단순한 에너지 흡수가 아니었다. 1,000년 전 천마가 남긴 진정한 '마도의 본질'이 진혁을 주인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때였다.
지하 4,000층의 벽면이 완전히 허물어지며, 거대한 차원의 문이 활짝 열렸다. 그 너머로 보이는 것은 신서울의 풍경이 아니었다. 별들이 쏟아지는 우주, 그리고 그 우주를 지배하는 수천 개의 붉은 눈동자들이 진혁을 응시하고 있었다.
[Warning: 외부 차원(Outer Realm)의 경계가 무너집니다.]
[경고: 고위 존재들이 당신의 강림을 감지했습니다.]
진혁은 피 묻은 검을 털어내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시스템의 경고창은 더 이상 그에게 공포를 주지 않았다. 오히려 그것은 그가 정복해야 할 새로운 영토의 지도처럼 보였다.
“오너라.”
진혁이 도약했다. 심연의 끝에서 그는 더 이상 실험체 07호가 아니었다.
그는 이제 신서울을 넘어, 차원의 벽을 깨부수고 마도의 정점에 설 진정한 천마였다.
지하의 어둠이 걷히고, 진혁의 발끝에서부터 새로운 세상의 빛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다음 화, 전 우주적 대전쟁의 서막이 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