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9화 <유연한 파멸>
심연의 어둠은 끈적했다.
단순한 무채색의 공간이 아니었다. 마교의 심장이 고동칠 때마다 혈관처럼 뻗어 나온 검은 안개가 강진혁의 피부를 핥았다. 138화의 혈투 끝에 쓰러진 복제체의 파편들이 바닥에 흩어져 있었다.
강진혁은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복제체의 가슴팍에 박혀 있던 '5세대 생체 코어 파편'을 뽑아 들었다. 손가락 끝에 닿는 감각이 기묘했다. 단순히 딱딱한 금속이 아니었다. 그것은 마치 살아있는 근육처럼, 진혁의 나노머신 회로와 반응하며 박동하고 있었다.
[SYSTEM: 5세대 생체 코어 파편(유기 금속 고분자 합성체)을 감지했습니다.]
[SYSTEM: 해당 파편을 흡수하여 '나노마갑'의 구조를 재설계하시겠습니까?]
진혁은 망설임 없이 파편을 가슴 중앙의 코어 위치에 가져다 대었다.
치이익.
고열과 함께 파편이 녹아들며 진혁의 혈관을 타고 흐르기 시작했다. 5세대 코어의 핵심 기술인 '액체 금속 변형 데이터'가 뇌로 직접 전송되었다.
"흡수(吸收)."
단 두 글자와 함께 강진혁의 전신을 감싸고 있던 나노머신이 격동하기 시작했다. 기존의 나노마갑은 외부 충격을 '버티는' 방식이었다. 하지만 5세대 파편이 융합되자, 그 개념이 완전히 뒤바뀌었다.
딱딱한 갑옷이 아니었다.
흐르는 강물처럼, 혹은 뱀의 근육처럼.
진혁이 주먹을 쥐었다 펴자, 손등을 덮은 회색 금속이 마치 물결처럼 출렁였다.
"이거군."
그가 허공을 향해 가볍게 손을 뻗었다.
콰아아앙!
심연의 벽에서 솟구쳐 나온 검은 촉수가 진혁을 덮쳤다. 보통이라면 강한 충격이 전신을 강타했어야 했다. 하지만 진혁의 나노마갑은 촉수가 닿는 찰나의 순간, 그 부위를 미세하게 '액체화'시켰다.
충격은 갑옷 안으로 들어오지 못했다.
오히려 그 충격 파동은 갑옷의 유연한 표면을 타고 흘러, 촉수가 닿았던 반대 방향으로 그대로 튕겨 나갔다.
[SYSTEM: [천마무상체(天魔無相體)]의 기반 구축이 완료되었습니다.]
[SYSTEM: 유연성 응용 기술 - '반탄류(反彈流)'가 활성화됩니다.]
진혁의 입가에 서늘한 미소가 번졌다.
이제 단순한 무력의 강함이 아니었다. 적의 힘을 이용해 적을 부수는 경지. 강함과 부드러움이 하나로 융합된 무도(武道)의 극치였다.
그때, 심연의 심장부 깊은 곳에서 거대한 굉음이 울려 퍼졌다.
쿠구구궁!
진혁의 눈앞에 드리워진 어둠이 걷히며, 1,000년 전 천마의 흔적이 남긴 '진정한 재앙'의 실체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은 기계도, 인간도 아니었다.
수많은 생체 코어가 뒤엉켜 만들어진 거대한 살덩어리.
티타늄 그룹이 신서울 지하에 숨겨두었던, 모든 악의 근원.
"기다리고 있었나."
진혁이 검은 마기를 뿜어내며 발을 내디뎠다.
심연의 중심에서 솟아오르는 기운은 이미 100,000 MW를 훨씬 상회하고 있었다. 하지만 진혁은 두렵지 않았다.
그는 이제 시스템의 계산 따위는 필요 없었다.
오직 자신의 의지, 그리고 5세대의 파편으로 완성된 육체만이 그곳에 있었다.
진혁은 왼손을 뻗어 등 뒤의 흑검을 뽑아 들었다.
검신에 뇌전마강의 푸른 불꽃이 감돌았다.
"천마(天魔)란 무엇인가."
그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그리고 스스로 답했다.
"부서지지 않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흘려보내고 모든 것을 부수는 자."
진혁의 몸이 흑색 섬광이 되어 심연의 재앙을 향해 쇄도했다.
재앙이 수천 개의 촉수를 휘둘러 진혁을 짓누르려 했다.
쾅! 쾅! 쾅!
심연 전체가 진동했다.
진혁은 쏟아지는 공격을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한가운데로 뛰어들었다. 촉수가 몸에 닿을 때마다 그의 나노마갑은 유연하게 변하며 충격을 흘려보냈고, 그와 동시에 진혁의 검은 재앙의 중심핵을 향해 파고들었다.
"이게 바로, 5세대 파편이 가르쳐준 유연함이다."
진혁의 검 끝에서 터져 나온 뇌전이 심연의 재앙을 관통했다.
검은 안개가 비명을 지르며 흩어졌다.
그러나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심연의 문 너머, 신서울 전체가 흔들릴 정도의 거대한 마기가 지상을 향해 요동치기 시작했다.
[SYSTEM: 경고! 시스템 제어권 밖의 고에너지 반응이 감지되었습니다.]
[SYSTEM: 신서울 지하 2,000층, 봉인이 완전히 파괴되었습니다.]
진혁은 검을 고쳐 잡았다.
이제 신서울의 모든 이들이, 자신이 완성한 이 '신천마신공'의 참된 파괴력을 목격하게 될 것이다.
그는 심연의 밖을 향해, 지상을 향해 다시금 도약했다.
그의 뒤로 흩어지는 검은 안개가 마치 승리자의 날개처럼 펼쳐졌다.
진혁이 눈을 번뜩였다.
이제 티타늄 그룹의 시대는 끝났다.
진정한 천마가 올라가는 길에, 남은 것은 오직 파멸뿐이다.
그의 시선이 지상의 마천루, 진무극의 본거지를 향해 꽂혔다.
어둠 속에서 진혁의 웃음소리가 심연을 가득 채웠다.
"자, 이제 누가 사냥당할 차례지?"
심연의 문이 닫히고, 강진혁은 핏빛 검을 들고 지상으로 귀환하기 시작했다.
신서울의 밤이, 그 어느 때보다 차갑게 얼어붙고 있었다.
지상으로 향하는 통로는 비좁고도 험난했다. 1,000년 전 마교의 잔재들이 엉겨 붙어 만들어진 지층은 강진혁의 마기를 거부하며 끊임없이 붕괴하고 있었다. 하지만 진혁은 멈추지 않았다. 새로이 이식된 5세대 액체 금속 코어 파편은 그의 신체 밀도를 상황에 맞게 재구성하고 있었다. 지반이 무너져 내릴 때마다 진혁은 근육의 밀도를 극도로 압축해 탄성을 높였고, 좁은 틈을 지날 때는 액체처럼 몸을 유연하게 늘려 빠져나갔다.
[SYSTEM: 마기 소비율, 최적화 모드 진입.]
[SYSTEM: [천마무상체]의 유연성 응용, 분자 구조 재정렬 중.]
머릿속에 들리는 시스템의 알림음은 이제 동반자가 아닌 기록자에 불과했다. 진혁은 신경의 흐름을 시스템의 보조 없이 직접 통제했다. 뇌에서 전달되는 전기 신호가 나노머신을 타고 혈관을 흐르는 마기와 결합했다. 이것이 바로 마신경(魔神境)을 넘어선, 신천마신공(新天魔神功)의 진정한 위력이었다.
콰아아앙!
지하 1,500층 지점, 그곳을 지키던 수호병기들이 붉은 눈을 번뜩이며 앞을 막아섰다. 티타늄 그룹이 폐기된 실험체들을 재활용해 만든 '그림자 추적자'들이었다. 놈들은 진혁의 데이터를 기반으로 설계된 탓에 그의 움직임을 정확히 예측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데이터'일 때의 이야기였다.
"예측한다고?"
진혁이 차갑게 뇌까렸다. 그림자 추적자가 진혁의 목을 노리고 회전 칼날을 휘둘렀다. 그 속도는 음속을 상회했다. 그러나 진혁은 피하지 않았다. 아니, 피할 필요가 없었다.
칼날이 진혁의 목에 닿는 순간, 목 부근의 나노마갑이 물처럼 흩어지며 칼날을 자연스럽게 흘려보냈다. 동시에 그 틈을 파고든 진혁의 손바닥이 추적자의 가슴 중앙, 코어 노드를 정확히 타격했다.
퍼억!
[천마일검(天魔一劍) - 투(透)]
검을 뽑지 않고도 내뿜는 일격이었다. 추적자의 가슴에서 뿜어져 나온 고압의 마기가 놈의 내부 회로를 단숨에 짓이겼다. 놈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진혁은 멈추지 않고 잔상을 남기며 앞으로 나아갔다.
지상으로 가까워질수록 공기는 무겁게 가라앉았다. 신서울의 밤하늘을 수놓던 네온사인은 이미 마기와의 공명으로 인해 깜빡거리며 사그라들고 있었다. 하층 슬럼가의 시민들은 하늘에서 떨어지는 검은 비와 같은 마기의 잔해를 보며 공포에 질려 입을 틀어막았다.
"강진혁... 그가 정말 올라오는 건가?"
지하 벙커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송수연이 거친 숨을 내뱉었다. 그녀의 앞에 놓인 모니터에는 신서울 전역의 전력망이 붉게 점멸하고 있었다. 강진혁이 지나가는 경로를 따라 도시의 모든 전력이 블랙아웃되고 있었다.
[SYSTEM: 출력 145,000 MW 돌파.]
[SYSTEM: [만법귀마(萬法歸魔)] 시스템과의 동기화율 0%. 순수 마공 제어로 전환.]
진혁은 지상 100층, 티타늄 타워의 최하부 방어선에 도달했다. 그곳에는 1부 시절 자신을 짓밟았던 블랙 가드들이 도열해 있었다. 백무현이 이끄는 정예 사살조였다. 그들은 기계적인 눈빛으로 진혁을 응시했다.
"실험체 07호, 강진혁. 회장님의 명령에 따라 제거한다."
백무현의 거대한 사이보그 의수가 지면을 박찼다. 초고주파 진동을 내뿜는 거대한 대검이 진혁의 머리를 향해 내려꽂혔다. 그러나 진혁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는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려 대검의 옆면을 가볍게 툭 쳤다.
챙!
기괴한 소리와 함께 대검의 진동 주파수가 강제로 뒤틀렸다. 역반사된 파동이 백무현의 팔을 타고 들어가 그의 기계 팔을 내부에서부터 붕괴시켰다.
"끄아아악!"
백무현이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났다. 진혁은 그에게 다가가지 않았다. 그저 검은 안개를 흩뿌리며 한 걸음 한 걸음, 타워의 중심을 향해 걸어갔다. 그의 발걸음마다 바닥이 금이 가고, 벽면의 금속 타일이 뜯겨져 나갔다.
"백무현. 넌 예전이나 지금이나, 그놈들의 개 노릇만 하는군."
"닥쳐라! 이 배신자 놈!"
백무현이 남은 한 팔로 총구를 겨누었다. 플라즈마 탄환이 연사되었다. 수백 발의 탄환이 진혁을 향해 날아들었다. 진혁은 몸을 회전시키며 [마영신보]를 전개했다.
그의 몸이 액체 금속처럼 유연하게 굴절하며 탄환들 사이를 유영했다. 스쳐 지나가는 탄환마다 진혁의 나노마갑에 닿아 튕겨 나갔고, 튕겨 나간 탄환들은 오히려 백무현의 부하들을 향해 날아갔다.
"자멸(自滅)인가."
진혁이 손을 가볍게 튕겼다. 손가락 끝에서 뿜어져 나온 마기가 채찍처럼 변해 백무현의 목을 휘감았다.
"네 놈들이 믿던 그 자본과 기술, 그것이 얼마나 허망한지 보여주마."
진혁은 손을 잡아당겼다. 백무현의 육중한 몸이 허공으로 솟구쳤다.
"이곳은 이제 너희들의 무덤이다."
진혁의 검이 백무현의 심장부를 관통했다. 놈의 눈에서 붉은빛이 꺼지며 회색빛 죽음이 찾아왔다. 주위에 있던 블랙 가드들이 공포에 질려 뒷걸음질 쳤다. 그들은 보았다. 인간의 한계를 아득히 넘어선, 진정한 마왕의 강림을.
강진혁은 백무현을 바닥에 내팽개치고 타워의 중앙 엘리베이터를 뜯어냈다. 그는 엘리베이터 샤프트 안으로 몸을 던졌다. 지상을 향한 수직 질주.
그의 머릿속에는 오직 한 가지 생각뿐이었다.
'이젠 끝내야 한다. 진무극, 그리고 그가 세운 이 썩어빠진 신서울의 근간을.'
[SYSTEM: 최종 단계 진입. 티타늄 타워 마스터 서버와의 거리 500미터.]
진혁의 시야가 붉게 물들었다. 마신경의 경지에서 바라본 세상은 모든 것이 선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기계의 회로, 인간의 생체 코어, 도시의 전력망. 그 모든 것이 진혁의 손아귀 안에서 춤을 추고 있었다.
그는 흑검을 강하게 쥐었다. 검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마기가 타워의 벽면을 찢으며 올라갔다.
[경고! 타워 구조적 붕괴 시작.]
[경고! 하중 지지대 파손. 건물의 붕괴가 불가피합니다.]
"붕괴시켜라."
진혁이 낮게 읊조렸다.
"이 탑이 무너지는 것이, 곧 새로운 시대의 시작이다."
그의 발끝에서 터져 나온 마기가 타워의 중앙 지지대를 직격했다. 콰아앙! 거대한 폭발음과 함께 타워가 크게 흔들렸다. 신서울 전체가 그의 포효에 응답하듯 어둠에 잠겼다. 이제 그를 막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진혁의 검은 더욱 짙은 흑색으로 타오르기 시작했다. 1,000년 전 천마의 의념이 그의 몸속에서 소용돌이쳤다.
'이제, 왕의 귀환을 알릴 시간이다.'
진혁이 타워의 꼭대기, 진무극의 비서실이 자리한 층을 향해 마지막 도약을 시도했다. 그의 등 뒤로 마기의 날개가 펼쳐졌다. 그것은 단순한 환영이 아니었다. 마기가 물리적 형태를 갖추어 만들어낸, 파멸의 날개였다.
지상 100층, 타워의 정점. 그곳에는 이미 진무극의 잔당들이 최후의 방어선을 구축하고 있었다. 수천 대의 드론과 수백 명의 사이보그 병사들. 하지만 진혁은 웃었다.
"전부 덤벼라."
그가 흑검을 휘둘렀다. 타워의 천장이 통째로 날아갔다. 쏟아지는 밤하늘의 빗줄기가 진혁의 마기와 섞여 핏빛으로 변했다. 신서울의 모든 시선이 그곳을 향하고 있었다.
강진혁, 그가 돌아왔다.
복수를 위해, 그리고 자신의 세상을 만들기 위해.
진혁은 검은 날개를 펄럭이며, 마지막 사냥을 시작했다.
"준비됐나, 진무극. 네가 버린 실험체가 어떤 지옥을 가져왔는지."
그의 목소리가 타워 전체에 울려 퍼졌다.
신서울은 이제, 진짜 '천마'의 지배 아래 놓이게 될 것이다.
[SYSTEM: 최종 마기 해방. 200,000 MW 돌파.]
검은 안개가 신서울 전체를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이것은 전쟁의 서막이자, 신천마신공의 완전한 개화였다. 진혁은 쏟아지는 드론들을 향해 거침없이 검을 내리그었다.
단 한 번의 일격으로, 수백 대의 드론이 고철 조각으로 변해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 뒤로 진혁의 차가운 눈동자가 번뜩였다.
"다음은, 네 차례다."
그의 앞길을 막는 것은 무엇이든, 예외 없이 파멸뿐이었다. 신서울의 가장 높은 곳에서, 진정한 마왕의 위엄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이제, 결전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