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8화 공진 파쇄와 액체 금속의 증발
대지는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신서울 지하 2,000층, 그 금단의 심장부에서 솟구친 검은 안개는 단순한 기상 현상이 아니었다. 그것은 1,000년 전 천마의 잔향이자, 시스템이 통제하지 못했던 태초의 마기(魔氣)였다.
강진혁은 그 거대한 파도의 정점에서 중심을 잡았다.
쿠구구구!
발밑의 지반이 녹아내렸다. 바일(Vail). 티타늄 그룹이 내세운 마지막 보루이자, 액체 금속 나노머신의 집합체인 그 괴물은 형체 없는 파도처럼 진혁을 덮쳐왔다. 일반적인 물리 타격은 의미가 없었다. 놈의 몸체는 타격받는 순간 분자 단위로 흩어졌다가, 다시 진혁의 목을 노리고 뱀처럼 솟구쳐 올랐다.
"쓸데없는 짓이다."
진혁의 흑안이 서늘하게 빛났다.
시스템의 보조 없이, 순수한 육체의 감각과 마공의 통찰만으로 놈의 움직임을 읽어낸다.
[SYSTEM INFO: 경고. 적대 개체 '바일'의 공진 주파수 가변. 물리 파괴 불가능.]
HUD는 이미 진혁의 의지로 끈 지 오래였다. 대신, 단전에서 뿜어져 나오는 130,000 MW의 출력이 전신을 휘감았다.
'공진(共振)인가.'
놈의 몸을 구성하는 액체 금속은 특정 주파수로 진동하며 물리적 충격을 상쇄하고 있었다. 마법이나 무공이 아닌, 철저히 과학적인 방어 기제. 하지만 그건 역설적으로 놈의 유일한 약점이기도 했다.
모든 물질에는 고유 진동수가 존재한다. 그 공진 주파수를 찾아내어, 반대 위상의 에너지를 충돌시키면 분자 결합은 단숨에 붕괴한다.
진혁은 오른손을 뻗었다.
"만법귀마(萬法歸魔)."
손끝에서 뿜어져 나온 마기가 안개처럼 퍼져나가 바일의 몸체에 스며들었다. 놈의 액체 금속 회로가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진혁은 놈이 가진 진동의 파형을 단숨에 복사하고, 그 즉시 정반대의 파동을 실은 마기를 주입했다.
파아앗!
공기가 찢어지는 소리와 함께, 놈의 몸을 휘감고 있던 은색 액체 금속이 기묘한 소리를 내며 경직되었다.
"찾았다."
진혁의 발이 지면을 박찼다. 도약하는 순간, 놈의 형체가 일시적으로 굳어지며 빈틈을 드러냈다.
"뇌전마강(雷電魔剛) – 마염강기(魔炎剛氣)!"
두 가지 극단의 기운이 진혁의 검 끝에 응축되었다. 파괴적인 뇌전과, 모든 것을 태워버리는 검은 마염.
콰아아앙!
검 끝에서 쏟아져 나온 융합 검풍이 바일의 정중앙을 강타했다. 단순한 폭발이 아니었다. 놈의 분자 구조가 진혁이 주입한 반대 위상의 공진 파동을 견디지 못하고, 비명을 지르며 증발하기 시작했다.
"끄아아아악!"
액체 금속이 증발하며 뿜어내는 기괴한 비명. 놈의 몸체가 불타는 기름처럼 튀어 오르며 사방으로 흩어졌다.
한 번 붕괴하기 시작한 결합력은 멈추지 않았다. 증발하는 금속 파편들이 도미노처럼 연쇄 반응을 일으켰다.
"이게 네놈의 본질이다."
진혁은 흩어지는 파편들 사이를 파고들었다. 눈앞에 드러난 바일의 핵심 코어. 5세대의 기술력이 집약된 붉은 빛의 생체 코어가 공중에 노출되었다.
진혁의 왼손이 붉은 코어를 낚아챘다.
[Warning: 과부하 위험. 출력 상승 중.]
단전이 비명을 질렀다. 150,000 MW. 180,000 MW. 놈이 가진 모든 데이터를 흡수하는 과정에서, 진혁의 혈관이 터져 나가고 은빛 회로가 피부 위로 불거져 나왔다.
'더. 더 받아들여라.'
진혁은 멈추지 않았다. 놈의 데이터, 놈의 기술, 놈의 나노머신 제어권까지 전부 자신의 마기로 덮어씌웠다.
단순히 힘을 뺏는 것이 아니었다. 놈의 존재 자체를 자신의 신천마신공의 일부로 편입시키는 과정.
쿠웅-!
지하 2,000층 전체가 진동했다.
바일의 형체는 완전히 증발하여 사라졌다. 남은 것은 진혁의 손아귀 속에서 바들거리는 붉은 코어와, 공중에 흩날리는 미세한 나노 입자들뿐이었다.
진혁은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코어를 짓눌렀다.
우득, 우드득.
놈의 코어 껍데기가 부서지며 그 안에 담겨있던 고도의 변형 알고리즘이 진혁의 나노마갑 속으로 흘러 들어왔다.
[SYSTEM INFO: ...ERROR...데이터 강제 병합 완료.]
[공정: 천마무상체(天魔無相體) 2단계 진입.]
온몸의 근육이 비명처럼 재구성되는 통증이 엄습했다. 하지만 진혁은 웃고 있었다. 이제 자신의 나노마갑은 고정된 형태가 아니다. 바일이 그랬던 것처럼, 적의 충격을 받은 즉시 유동적으로 흘려보내고, 그 충격 에너지를 역으로 흡수하여 반사하는 경지.
이것이 마신경을 넘어선, 진정한 신천마의 육체다.
진혁은 고개를 들어 북쪽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신서울이 숨기고 있던 진짜 지옥이 입을 벌리고 있었다.
"기다려라."
진혁은 발밑의 붕괴하는 잔해를 뒤로하고, 다시 한번 도약했다. 이제 신서울 상층부의 그 거대한 태양마저 자신의 발아래에 두어야 할 시간이었다.
그의 뒤로 마기(魔氣)가 날개처럼 펼쳐졌다. 그 형태는 1,000년 전 전설 속에 기록되었던 천마의 그것과 똑같았다.
아니, 오히려 더 흉포하고 더 압도적이었다.
진혁의 눈에 북쪽 구구역 너머, 우주적 크기의 거대한 신호가 포착되었다.
티타늄 그룹조차 감히 건드리지 못했던, 신서울의 진짜 주인.
'이곳에 마교의 심장이 있다면, 저쪽에는 무엇이 있나.'
진혁은 망설임 없이 검은 빛의 궤적을 그리며 어둠 속으로 쇄도했다.
그의 발걸음이 지나는 곳마다 신서울의 콘크리트 바닥이 마치 물결처럼 요동쳤다. 시스템의 족쇄가 사라진 세상에서, 강진혁은 스스로의 의지로 역사를 다시 쓰고 있었다.
그런데, 쇄도하던 진혁의 발길이 문득 멈췄다.
[공진 파동 감지.]
자신이 방금 바일을 증발시켰던 그 파동.
그것과 완벽하게 일치하는 공진 주파수가 북쪽 심연 속에서 메아리치고 있었다.
놈들뿐만이 아니다.
이 신서울 지하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악기처럼 특정 주파수로 연주되고 있었다.
"연주자가 있나."
진혁의 입가에 서늘한 미소가 번졌다.
북쪽 구구역의 심연, 그 어둠 속에서 누군가가 진혁의 이름을 부르는 듯한 환청이 들려왔다.
- ...드디어... 도착했구나. 나의 그릇이여.
진혁은 코웃음 쳤다.
"그릇? 그건 네놈들이 착각하는 거다."
진혁이 손을 쥐자, 주변의 대기가 비명을 질렀다.
"나는 그릇이 아니다. 나는 이 세상을 뒤엎을 폭풍이다."
콰앙-!
그가 발을 구르자, 지하 2,000층의 암반이 수직으로 뚫렸다.
진혁은 심연의 가장 깊은 곳, 태초의 마교가 봉인된 장소로 몸을 던졌다.
그곳에는 티타늄 그룹이 결코 도달하지 못했던, 1,000년 전 천마가 남긴 최후의 비극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진혁은, 그 비극마저 집어삼켜 새로운 신화로 만들 준비를 마쳤다.
심연의 바닥에 도달한 순간,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진혁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곳엔 수만 명의 실험체들이 엉겨 붙어 만들어진, 하나의 거대한 '살덩어리'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그 중심에는, 진혁과 똑같은 얼굴을 한 사내가 눈을 감은 채 앉아 있었다.
'복제인가?'
아니었다.
그것은 단순히 진혁을 복제한 것이 아니었다.
진혁이 지나온 모든 세월, 모든 전투, 모든 데이터가 그 사내의 몸 안에서 그대로 재현되고 있었다.
마치, 진혁이라는 인물의 '미래'를 미리 찍어내듯.
사내가 천천히 눈을 떴다.
진혁과 똑같은, 그러나 훨씬 더 공허한 흑안.
"기다렸다, 강진혁."
사내의 목소리가 지하 공간을 가득 채웠다.
"네가 시스템을 부수고 여기까지 오는 동안, 나는 너를 완벽하게 학습했다. 이제 네 무공은 내 것이다."
사내가 손을 들어 올리자, 진혁이 방금 사용했던 [뇌전마강]의 잔영이 그 손끝에서 똑같이 재현되었다.
진혁의 눈빛이 더욱 깊게 가라앉았다.
"학습했나."
진혁은 검을 고쳐 쥐었다.
"그럼 이건 학습했겠지."
진혁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마기가 지상의 모든 빛을 차단했다.
"시스템도, 데이터도, 심지어 네놈의 기억 속에도 없는."
진혁의 검이 사내의 목을 향해 쇄도했다.
"오직 나만이 완성한, 참된 천마의 일격."
지하 2,000층의 정적을 깨는, 파괴의 서막이었다.
사내가 손을 휘저으며 진혁의 검을 비껴내려 했다. 그러나 진혁의 검격은 궤적이 고정되어 있지 않았다. 그것은 마치 살아있는 짐승처럼 대기 속을 헤엄치며 사내의 방어를 유연하게 비틀어 뚫고 들어갔다.
사내의 눈동자가 처음으로 흔들렸다.
"계산 외의 궤적이다. 나노머신 연산 처리 속도를 상회하고 있어!"
"연산? 그런 사치스러운 걸 왜 쓰지?"
진혁이 차갑게 읊조렸다.
"무(武)는 계산하는 것이 아니다. 상대의 숨통을 끊어내겠다는 의지를 현상으로 구현하는 것뿐."
챙-!
강철과 강철이 맞부딪히는 소리가 아닌, 공간 자체가 찢어지는 듯한 파열음이 마스터 돔을 가득 채웠다. 진혁의 검 끝에 맺힌 마염(魔炎)이 사내의 어깨를 훑고 지나가며 거대한 열기를 뿜어냈다. 사내의 왼쪽 어깨가 순식간에 녹아내리며 액체 금속이 끓어올랐다.
"이게… 네놈의 본질인가?"
사내가 고통스러운 듯 신음하며 뒤로 물러났다. 그는 진혁의 모든 것을 학습했다고 자부했으나, 단 하나, '죽음을 각오한 무인의 살기'만큼은 데이터로 치환할 수 없었다. 그것은 차갑고 정교한 알고리즘이 아닌, 1,000년의 증오와 24년의 고독이 빚어낸 응축된 에너지였다.
진혁은 멈추지 않았다. 그는 사내에게 틈을 주지 않고 다시금 도약했다. 공중에서 몸을 회전시키며 내리꽂는 일격. [천마일검-개(改)].
콰아아앙!
사내는 양손을 교차하여 방어막을 형성했지만, 진혁의 검은 그 방어막의 공진 주파수를 찰나의 순간에 파악해 내버렸다. 방어막은 유리 조각처럼 박살 났고, 충격파는 고스란히 사내의 몸체에 전달되었다.
"크윽!"
사내의 몸이 바닥을 뚫고 지하 2,001층까지 처박혔다. 진혁은 그 뒤를 쫓아 수직으로 낙하했다. 추락하는 와중에도 진혁의 손끝에서는 뇌전이 쉼 없이 일렁이고 있었다.
지하 2,001층의 폐허 한복판에서 사내가 기괴하게 뒤틀린 몸을 일으켰다. 그의 눈이 붉게 점멸하며, 주위에 흩어져 있던 폐기된 실험체들의 파편들을 끌어모으기 시작했다. 수천 개의 금속 부품들이 사내의 몸에 달라붙어 거대한 기계 갑옷의 형상을 갖추기 시작했다.
"강진혁, 네가 아무리 날고 기어도 결국은 이 거대한 기계 도시의 부품일 뿐이다!"
사내가 포효하며 수백 개의 금속 촉수를 사방으로 뻗어냈다. 지하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포탑처럼 변모하여 진혁을 향해 무차별적인 에너지를 쏟아붓기 시작했다.
[SYSTEM INFO: 경고. 적대 개체의 '중력 제어' 활성화. 공간 좌표 고정.]
주변의 공간이 압축되며 진혁의 몸이 무거워졌다. 마치 수만 톤의 강철이 어깨를 짓누르는 듯한 중압감. 움직임이 둔해진 그 틈을 타, 수천 개의 레이저 빔이 진혁의 심장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하지만 진혁은 눈을 감았다.
"중력이라…."
그는 시스템의 좌표 고정을 무시했다. 단전의 출력을 온몸의 혈관으로 강제로 분산시키며, 나노마갑의 밀도를 극한으로 높였다. [천마무상체-극].
몸을 짓누르는 중력을 역으로 이용해, 자신의 마기를 압축하고 또 압축했다.
'이 정도의 압력이라면, 내 마기도 단단해지겠군.'
진혁이 눈을 떴을 때, 그의 안광은 칠흑보다 깊은 심연으로 변해 있었다. 그는 중력을 뚫고 일어섰다.
"이런 압박감 따위, 내 마공의 연마제도 안 된다."
진혁이 주먹을 쥐자, 주변을 짓누르던 중력장이 비명을 지르며 붕괴했다. 사내가 경악하며 뒷걸음질 쳤다. 진혁은 거대한 기계 갑옷을 입은 사내를 향해 한 걸음씩 다가갔다. 그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지면이 갈라지고, 주위의 금속들이 진혁의 살기(殺氣)에 눌려 녹아내렸다.
"네놈이 학습한 것은 과거의 데이터뿐이다."
진혁의 검이 은은한 검은 빛을 내뿜으며 사내의 기계 갑옷을 베어 넘겼다.
"나는 매 순간 진화한다. 네놈의 연산 속도가 내 성장을 따라올 수 있겠나?"
진혁이 사내의 가슴팍, 가장 깊숙한 곳에 박혀 있는 메인 코어를 향해 검을 찔러 넣었다. 사내의 기계 갑옷이 필사적으로 저항했지만, 진혁의 검은 그 모든 저항을 분자 단위로 분해하며 파고들었다.
"이게… 진짜 천마의 검이다."
퍼억!
검끝이 사내의 코어를 관통했다.
사내의 눈에서 붉은 빛이 꺼져갔다. 몸을 이루고 있던 금속 파편들이 힘을 잃고 바닥으로 쏟아져 내렸다. 사내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진혁을 응시했다.
"어째서… 시스템의 도움 없이, 이 정도의 출력을…."
"답은 간단하다."
진혁은 검을 회수하며 차갑게 대꾸했다.
"너는 시스템을 믿었고, 나는 나 자신을 믿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사내의 몸체가 거대한 폭발을 일으키며 산산조각 났다.
진혁은 폭발의 화염 속에서 유유히 걸어 나왔다. 하지만 그는 안심하지 않았다. 폭발의 잔해 너머, 어둠 속에서 또 다른 무언가가 꿈틀거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고대 마교의 심장이, 진혁의 진정한 각성을 기다리고 있었다.
[Warning: 외부 신호 도달. 북쪽 구구역, 심연의 문이 완전히 개방되었습니다.]
진혁의 흑안이 북쪽을 향했다. 그곳에서 느껴지는 압도적인 마기. 그것은 지금까지 그가 상대했던 티타늄 그룹의 어떤 병기보다도 훨씬 거대하고, 불길한 무언가였다.
"끝이 아니군."
진혁이 흩날리는 검은 마기를 휘감으며 심연의 끝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제대로 된 사냥은 이제부터다."
신서울 지하 2,001층의 정적이 깨졌다. 진혁의 발걸음 소리가 마치 심장박동처럼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어둠 속에서 진혁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시스템이 지워진 세상에서, 강진혁의 진짜 이야기가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