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1화 한계를 넘어서는 운기
티타늄 그룹 최하층 심장부.
양자 서버실의 잔해 위로 짙은 핏빛의 마기가 폭류처럼 솟구쳐 올랐다.
쿠구구구구—!
사방으로 튀는 고전압 푸른 스파크와 칠흑의 연무.
그 중심에 선 강진혁의 몸 위로 은빛 회로 선들이 횃불처럼 타올랐다.
- [SYSTEM WARNING: 구형 프로토콜 네트워크 단절.]
- [SYSTEM WARNING: 호스트의 자율 제어 영역 확장. 시스템 보조 권한 0.0%]
머릿속을 찌르던 차가운 가상 인터페이스의 알림음은 이미 오래전에 꺼져 있었다.
더 이상 그의 시야는 기계가 점유한 HUD에 의존하지 않았다. 눈을 감아도 삼백만 하층민의 숨소리, 신서울 상층 마천루를 떠받치는 거대한 양자 파이프의 진동, 그리고 자신의 심장 박동까지 선명하게 뇌리에 각인되었다.
단전의 출력.
68,400 MW.
인간의 육신이 감당할 수 있는 한계를 아득히 넘어선 에너지 밀도였다.
만약 몇 달 전의 육체였다면 단 한 번의 호흡만으로도 혈관이 터지고 전신이 재로 변해버렸을 터였다. 하지만 지금, 진혁의 육체는 천 년 전 마교 최초의 천마가 남긴 원본 데이터와 자신의 손으로 찢어발긴 모체의 에너지를 동시에 포용하고 있었다.
"후우……."
진혁이 낮고 길게 숨을 내쉬었다.
그의 입술 사이로 터져 나온 백색의 기운이 양자 서버실의 차가운 공기를 단숨에 태워버리며 일그러진 열풍을 만들어냈다.
고대 천마 비급의 원본 데이터.
그것은 단순히 강해지는 법을 적어놓은 텍스트가 아니었다.
천 년 전, 천재적인 무인들이 육체적 한계와 기혈의 폭주를 견디지 못해 피를 토하며 죽어 나갔던 그 잔혹한 수련의 궤적이 고스란히 담긴 저주이자 구원의 서(書)였다.
과거의 마교 고수들은 대단했다.
그들은 단전의 내력을 키우기 위해 오직 의지와 고통으로 경맥을 뚫었다. 하지만 육체의 물리적 구조는 허약했고, 단전의 출력이 한계치를 넘는 순간 기혈이 거꾸로 솟구쳐 온몸의 혈관이 터지는 주화입마(走火入魔)를 피할 수 없었다.
그러나 지금의 강진혁에게는 현대의 산물인 '나노머신'이 있었다.
스으으으익…….
진혁의 피부 아래를 흐르는 수십억 마리의 미세 나노머신들이 일제히 미세한 진동을 시작했다.
혈관의 벽을 탄력성 높은 티타늄 합금 수준의 분자 구조로 재구성하고, 심장 박동에 맞춰 팽창하는 근섬유를 고강도 탄소 나노튜브로 직조해 나간다.
단전에서 맹렬하게 소용돌이치는 68,400 MW의 마기를 억누르는 것이 아니라, 온몸의 혈관과 경맥이라는 거대한 수로(水路)로 분산시키는 작업.
[마기-나노 융합 심법(魔氣-Nano Fusion Sim-beop)]의 진정한 기틀이 완성되는 순간이었다.
크르릉……!
진혁의 어깨와 등 뒤로 뿜어져 나온 마기가 불길처럼 치솟았다.
그 불길은 단순한 열기가 아니었다. 공간의 물리적 밀도를 왜곡하고, 주변의 중력장을 뒤틀어 바닥에 뒹굴던 철판들을 무중력 상태처럼 공중으로 떠오르게 만들었다.
"이게…… 내 안의 길이다."
진혁이 눈을 번쩍 떴다.
칠흑 같은 흑안(黑眼) 안쪽으로 푸른빛의 뇌전이 얽혀들었다.
과거 시스템이 지정해 주던 경지의 이름 따위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1단계 마공각성, 2단계 마기융합, 3단계 천마현신, 4단계 마신경, 그리고 5단계 초월천마경.
그 모든 단계의 계단을 밟고 올라와, 마침내 진혁은 그 어떤 기계의 프레임에도 갇히지 않는 자신만의 고유한 무도(武道)의 정점에 도달해 있었다.
체내의 기혈이 거대한 폭포처럼 쏟아지며 순환했다.
단전에서 출발한 마기는 대추혈(大椎穴)을 거쳐 백회(百會)로 치솟았고, 다시 전신의 수십만 개 모세혈관을 타고 흐르며 나노머신들과 완벽한 동기화를 이루었다.
찌릿-! 쩌저정-!
진혁의 손가락 끝에서 고주파 진동을 동반한 검은 뇌전이 스파크처럼 튀었다.
손을 가볍게 휘젓는 것만으로도 주변의 공기가 비명을 지르며 찢어졌다. 검강(劍剛)을 두르지도 않은 맨손의 휘두름만으로도 양자 서버실의 강화 티타늄 벽면에 수십 센티미터 깊이의 참흔이 새겨졌다.
- [ALERT: 호스트의 기혈 운행 안정화율 99.8%.]
- [ALERT: 나노머신 동기화 오류 0.0%. 생체 코어 출력 제어 최적화 완료.]
시스템의 HUD 기능은 꺼졌지만, 진혁의 뇌 속에는 스스로 진화한 연산 서브루틴이 각인되어 있었다. 그것은 더 이상 외부의 AI가 보내주는 명령이 아니었다. 진혁 자신의 의지가 곧 시스템이자 법치(法治)였다.
"후우……."
숨을 고르자마자, 신서울 최상층에서 거대한 지진 같은 진동이 울려 퍼졌다.
콰아아앙-!
지하 심장부의 모체가 파괴되면서, 신서울 상층부를 지탱하던 메인 전력망과 방어 그물망이 연쇄적으로 붕괴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와 동시에, 신서울 삼백만 하층민의 생체 코어를 볼모로 잡고 있던 최후의 자폭 프로토콜, 이른바 '아폴론의 심장'이 카운트다운에 돌입했다는 경고음이 도시 전역의 스피커를 통해 울려 퍼졌다.
[경고. 하층 구역 전력 공급 차단. 10분 이내에 자폭 시퀀스가 실행됩니다.]
[모든 생체 코어 소유자의 단전 오버로드 진행 중…….]
차가운 기계 음성이 신서울의 밤하늘을 갈랐다.
상층 마천루의 특권층들은 이미 도망치거나 숨었지만, 그 여파는 고스란히 햇빛이 들지 않는 슬럼가와 하층민들에게 쏟아지고 있었다.
지하 2,000층의 바닥이 거세게 흔들렸다.
진혁의 시선이 위를 향했다.
머나먼 수직의 공간, 아폴론의 요새가 위치한 신서울의 꼭대기.
그곳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잔당들과, 도시 전체를 구원하기 위해 부서뜨려야 할 마지막 방어선이 손짓하고 있었다.
"시간이 없군."
진혁이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그의 손끝에 쥐여 있던 개량형 천마검이 붉고 차가운 검강을 토해내며 요동쳤다.
쿠구구구구—!
단전의 출력 68,400 MW.
진혁이 무릎을 살짝 굽힌 순간, 그가 디뎌 서 있던 강화 티타늄 바닥이 순식간에 거미줄처럼 갈라지며 먼지로 화했다.
파앗-!
빛의 잔상조차 남지 않았다.
공기의 벽을 물리적으로 박살 내며 쏘아 올려진 진혁의 형체가, 신서울 최하층의 심장부에서 수직으로 뻗은 메인 샤프트를 타고 아폴론의 요새를 향해 거침없는 폭풍처럼 질주하기 시작했다.
콰아아아구궁-!
지하 심장부를 박차고 오른 강진혁의 몸이 메인 샤프트의 압축 공기를 찢으며 수직으로 솟구쳤다.
마영신보(極).
스펙터 부대의 광학 왜곡 회로와 칠흑의 마기가 완벽히 융합된 보법은 물리적인 공간의 거리를 완전히 무시했다. 눈을 깜빡이는 순간, 수십 개층의 철골 구조물과 고압 전력 파이프가 그의 등 뒤로 아득하게 멀어졌다.
- [WARNING: 섹터 4 진입로, 고출력 전자기 봉쇄망 감지.]
- [WARNING: 티타늄 특수 타격대 제 3중대, 요격 태세 돌입.]
머릿속에 박힌 자가 연산 서브루틴이 차가운 경고를 송출했다.
그와 동시에 수직 샤프트의 상단부, 거대한 철문이 찢어지며 사방으로 흩어졌다.
챙기기긱-! 콰창창!
티타늄 그룹의 정예 중에서도 최정예로 꼽히는 '블랙 가드' 특수 타격대였다.
그들의 전신을 뒤덮은 4세대 군용 파워드 수트는 눈부신 플라즈마 방어막을 두르고 있었고, 손에 쥔 레일건의 총구에서는 도시를 통째로 태울 수 있는 고주파 에너지탄이 장전되어 있었다.
"타겟 확인! 쥐새끼 같은 실험체 07호다! 사격 개시!"
타격대장의 고함과 함께 수십 정의 레일건이 일제히 불을 뿜었다.
슈우우우웅-! 콰콰쾅!
좁은 메인 샤프트 내부가 순식간에 눈이 멀 정도로 강렬한 백색 플라즈마 폭풍으로 뒤덮였다.
초전자기 봉쇄망이 진혁의 사방을 옥죄며 나노머신의 회로를 마비시키려 들었다. 일반적인 초인이었다면 그 전자기 충격파만으로도 단전의 코어가 쇼트를 일으켜 그 자리에서 심장이 멈췄을 터였다.
하지만 강진혁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시끄럽다."
진혁이 낮게 으르렁거리며 오른손을 허공으로 뻗었다.
그의 손끝에서 뿜어져 나온 칠흑의 마기가 나노머신과 결합하며 거대한 소용돌이, 즉 [흡원천공-개량(改)]의 역방향 파동을 형성했다.
슈아아아악-!
날아오던 플라즈마 에너지탄과 초전자기 충격파가 진혁의 몸 앞 1미터 지점에서 거짓말처럼 멈춰 섰다.
아니, 멈춘 것이 아니었다. 그 엄청난 고압의 전기에너지와 플라즈마가 진혁의 손바닥에 빨려 들어가듯 맹렬한 기세로 흡수되고 있었다.
- [에너지 흡수율 120%. 단전 출력 68,400 MW → 69,100 MW로 상승.]
"크…… 흡수하고 있어?! 저 괴물이 플라즈마 포를 먹어 치운다고?!"
타격대장의 얼굴에 경악과 공포가 서렸다.
그가 당황하며 전탄 발사를 지시하려던 그 순간, 진혁의 형체가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잔상은 남지 않았다.
오직 찢어지는 공기의 비명만이 남았을 뿐이다.
파지지직-!
"컥……?"
가장 앞에 서 있던 블랙 가드 대원의 파워드 수트 가슴팍이 쩍 소리와 함께 갈라졌다.
진혁의 맨손이 수트의 두꺼운 티타늄 장갑을 두부 썰듯 관통해 심장 부근에 박혀 있었던 것이다. 진혁의 손아귀에서 뿜어져 나온 마기가 대원의 3세대 생체 코어를 강제로 움켜쥐고 그 안의 에너지를 남김없이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파드득, 파스스……!
순식간에 생체 코어의 출력이 0으로 떨어지며 대원의 몸이 마른 잎처럼 바스러져 내렸다.
진혁은 돌아보지도 않았다. 그는 흡수한 에너지를 그대로 발판 삼아 마영신보를 재전개했다.
쾅! 콰아앙!
섹터 4의 철문이 안쪽에서부터 터져 나갔다.
진혁이 지나간 자리마다 블랙 가드의 잔해와 파괴된 파워드 수트의 조각들이 비처럼 쏟아졌다.
단 한 명의 적도 그의 전진을 가로막지 못했다. 방어선은 무너졌고, 철제 바닥은 그가 내딛는 발걸음마다 거대한 크레이터를 그리며 붕괴했다.
같은 시각.
신서울 상층부의 중앙 관제실.
"……괴물. 진짜 괴물이 올라오고 있어!"
요란하게 울리는 경보음 속에서, 해커 윤아영의 손가락이 키보드 위를 미친 듯이 질주했다.
그녀의 이슬 같은 이마 위로 굵은 땀방울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모니터 화면 속에는 진혁의 이동 경로와 함께, 신서울 전역을 뒤흔들고 있는 자폭 시퀀스의 카운트다운이 붉은색 숫자로 깜빡이고 있었다.
- [아폴론의 심장: 잔여 시간 07분 12초.]
- [하층 구역 생체 코어 과부하율 84% 돌파.]
"아영 씨, 진혁 오빠는 지금 어디쯤이죠?"
관제실 한쪽 구석, 니르바나의 총수 송수연이 거대한 대형 도검을 품에 안은 채 날카로운 눈빛으로 물었다.
그녀의 옷자락은 이미 수많은 블랙 가드들과의 교전으로 피투성이가 되어 있었다.
윤아영이 모니터 화면을 확대하며 숨을 몰아쉬었다.
"섹터 4를 돌파했어……! 예상보다 훨씬 빨라. 이 기세면 5분 안에 아폴론의 요새 입구인 '천상관문'에 도달할 거야."
"다행이네. 하지만 방심할 수 없어."
송수연이 차갑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창밖을 내다보았다.
신서울의 밤하늘은 이미 기업의 통제력을 잃고 폭주하는 방어 드론들과 불타오르는 마천루의 불빛으로 지옥도를 연상케 하고 있었다.
"티타늄 그룹의 잔당들이 마지막 발악을 준비하고 있어. 아폴론의 요새 내부에는 진무극 회장이 숨겨놓았던 최종 방어 시스템, '세라핌' 프로토콜이 대기 중이야."
"세라핌……?"
윤아영의 얼굴에 질린 표정이 떠올랐다.
"설마, 그 옛날 마교의 대형 마기 병기를 모방해서 만든……?"
"그래. 인간의 육신으로는 절대 버틸 수 없는 고순도 마기 폭풍을 광역으로 살포하는 자율형 병기지. 진혁 오빠가 그걸 뚫어야만 삼백만 하층민의 목숨을 구할 수 있어."
송수연의 주먹이 하얗게 부서지라 쥐여졌다.
그녀 역시 나가서 함께 싸우고 싶었지만, 지금은 관제실의 통신망을 유지하며 진혁의 후방을 서포트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오빠……."
윤아영이 마른침을 삼키며 모니터 속 붉은 점을 응시했다.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진혁의 경로를 열어주기 위해 메인 서버의 잔해를 해킹하고, 방어망의 우회로를 찾아내는 것뿐이었다.
콰르릉-!
신서울 상층 마천루, 1계급과 0계급의 경계인 '천상관문'.
거대한 백색 대리석으로 지어진 웅장한 아치형 문 앞에는, 이전의 그 어떤 적과도 비교할 수 없는 압도적인 존재감을 뿜어내는 기계 장치가 버티고 서 있었다.
세라핌(Seraphim).
그것은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었으나, 등 뒤에는 십이 개에 달하는 고주파 플라즈마 날개가 불타듯 이글거리고 있었고, 얼굴 대신 장착된 거대한 양자 센서 코어에서는 핏빛 붉은 광채가 사방을 스캔하고 있었다.
- [TARGET LOCKED: 강진혁.]
- [제작자 진무극의 유지를 받들어, 외부의 모든 침입자를 말살한다.]
세라핌의 입에서 차가운 합성 음성이 울려 퍼졌다.
그와 동시에, 세라핌이 들고 있던 거대한 대검형 플라즈마 캐논이 충전음을 내며 번쩍였다.
쿠구구구구-!
지반이 순식간에 녹아내리며 거대한 열풍이 진혁의 옷자락을 사정없이 짓눌렀다.
세라핌의 단전 출력.
무려 75,000 MW.
진혁이 걸음을 멈췄다.
그의 입가에 짙고 서늘한 미소가 걸렸다.
"진무극의 유해 따위가 아직도 기어오르나."
진혁이 손에 쥔 개량형 천마검을 가로로 들어 올렸다.
검신을 따라 흐르던 칠흑의 마기와 푸른 뇌전이 폭발하듯 엉겨 붙었다. 단전에서 뿜어져 나오는 69,100 MW의 출력이 심장 박동과 동기화되며 온몸의 세포를 비명을 지를 듯이 각성시켰다.
"네놈이 아무리 발악해봐야, 내가 밟아온 길의 잔해에 불과해."
진혁이 발을 구르는 순간, 대지가 두 쪽으로 갈라졌다.
콰아아앙-!
세라핌의 플라즈마 대검과 강진혁의 천마검이 정면으로 부딪친다.
세상을 뒤흔드는 거대한 충격파가 신서울의 밤하늘을 완전히 찢어발기며, 최후의 결전이 막을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