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5화 진세린의 기밀 제보
지직, 지지직―!
양자 서버 돔의 차가운 바닥 위로 흩어지던 붉은 안개의 잔재가 허공 속으로 스러져 내렸다.
시스템의 자동 보조 기능도, 인공지능 '설화'의 차가운 목소리도 들리지 않는 공간.
오직 강진혁 자신의 심장 박동과 혈관 속을 타고 흐르는 묵직한 마기의 파동만이 귀를 울렸다.
후우-.
진혁이 낮게 숨을 내쉬었다.
그의 단전 부근에서 소용돌이치는 에너지는 이미 41,000 MW의 경계를 넘어 시시각각 요동치고 있었다.
제프로스의 4.5세대 생체 코어와 중력 제어 모듈을 흡수한 후유증은 찾아볼 수 없었다.
오히려 [초월천마경(超越天魔境)]의 경지 속에서 그 모든 힘이 완벽하게 그의 피와 살, 그리고 뼈 깊숙이 안착해 있었다.
"후우……."
진혁의 검은 눈동자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시스템의 도움 없이, 완벽한 자신의 육체와 의념만으로 빚어낸 힘.
그것은 기계의 연산 결과가 아니라 순수한 무인의 경지에서 우러나온 참된 마기(魔氣)였다.
바로 그때였다.
-띠링, 띠디딕.
파괴된 줄 알았던 양자 서버 돔의 비상 통신 단말기 하나가 푸른빛을 깜빡이며 살아났다.
메인 네트워크는 이미 영구 셧다운 상태였음에도 불구하고, 지극히 아날로그적인 회로를 우회한 일점 통신이었다.
진혁은 시선을 돌리지 않은 채, 차가운 흑안으로 그 단말기를 응시했다.
"……."
통신 단말기에서 흘러나온 것은 기계음이 아니었다.
거칠면서도 미세하게 떨리는, 그러나 낯익은 여인의 목소리였다.
[……거기 있나, 강진혁.]
진세린이었다.
92층 아폴론의 회주랑에 부상당한 채 남겨졌던 티타늄 그룹의 후계자.
그녀의 목소리에는 이전의 오만함이나 차가움은 찾아볼 수 없었다.
오직 자신이 믿었던 모든 것이 허구였다는 것을 깨달은 자의 씁쓸함과, 짙은 회한만이 묻어날 뿐이었다.
진혁이 낮고 묵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말해라."
[목소리를 들으니 아직 죽진 않았군요. 그래, 네 녀석이 그 괴물 같은 늙은이의 잔해를 끝장냈다는 건 하층부의 전력 변동으로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진세린의 숨소리가 거칠었다.
그녀는 지금 이 순간에도 티타늄 그룹의 잔존 권력들이 자신을 처단하기 위해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녀가 이 통신을 연결한 이유는 단 하나였다.
[네가 찾는 게 있을 거다.]
"……."
[그 늙은이―― 진무극과 이현도가 목숨을 걸고 숨겨두었던 진짜 비밀 말이야. '천마 프로토콜'의 모체가 된 데이터. 그 자들이 1,000년 전 마교의 유골에서 직접 추출해 낸…… '고대 천마 비급의 원본 데이터' 말이다.]
진혁의 눈썹이 미세하게 꿈틀거렸다.
고대 천마 비급의 원본 데이터.
시스템이 분석해 내던 파편화된 데이터 조각들이 아니라, 천 년 전 진정한 천마가 남겼다는 마공의 뿌리 그 자체.
통신 너머에서 진세린의 자조적인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웃기지 않아? 나도 아버지의 서재 구석에 박힌 마스터 키를 해독하고서야 알았어. 그 늙은이는 처음부터 천마가 되려던 게 아니었어. 천마의 마공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으니까, 그에 걸맞은 '완벽한 그릇'을 만들려고 했던 거지. 너처럼 말이야, 강진혁.]
"알고 있었다."
진혁의 담담한 대답에 진세린의 숨이 툭 멎었다.
그녀는 진혁이 이 사실을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는 점에 잠시 말을 잃었다가, 이내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말을 이었다.
[그래, 네 성격에 모를 리가 없겠지. 하지만 그 비급의 원본 데이터가 어디에 숨겨져 있는지는 모를 거다. 그것만큼은 그 늙은이가 이현도조차 따돌리고 철저하게 격리해 두었으니까.]
"어디지."
[상층부 지하 섹터 4. 티타늄 그룹의 본사 빌딩에서도 가장 깊고 어두운, 구(舊) 공업용 격리 구역이야. 양자 서버마저 연결되지 않는 독립된 물리적 보안 구역이지. 그곳에 그 늙은이가 수집한 고대 천마 비급의 원본이 들어 있는 '블랙 박스'가 있다.]
치익――.
통신 너머에서 잡음이 섞여 들었다.
진세린이 보안 추적을 피하기 위해 스스로 통신 회로를 태우고 있는 소리였다.
[가서 가져가라, 강진혁. 그 늙은이가 네게서 빼앗으려 했던 모든 것의 근원을. 그리고…….]
잠시 멈칫하던 진세린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내 복수도 대신 해줘. 그 흉측한 실험체들을 만들어낸 이 역겨운 왕국을, 네 손으로 완전히 무너뜨려 달란 말이다.]
-뚜우, 뚜우…….
통화가 완전히 끊겼다.
단말기의 작은 화면이 완전히 꺼지며 암전되었다.
진혁은 더 이상 울리지 않는 통신기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진세린의 감정에 동조할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그녀가 건네준 정보의 가치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고대 천마 비급의 원본 데이터.'
시스템의 보조 없이 오직 자신의 의념과 마기로만 [초월천마경]을 구축한 진혁이었다.
하지만 그가 걸어가는 무도의 길은 여전히 끝이 없었다.
만약 1,000년 전 고대 천마가 남긴 진짜 비급의 원본을 손에 넣는다면, 현재 41,000 MW에 머물러 있는 단전의 출력과 심법의 한계를 완전히 다른 차원으로 끌어올릴 수 있었다.
'기계의 유산이 아니다. 순수한 마공의 근원…….'
진혁의 입가에 옅고도 서늘한 미소가 걸렸다.
그것은 도전에 대한 기대감이 아니었다.
자신을 한낱 소모품 그릇으로 취급했던 이들이 마지막까지 움켜쥐고 있던 '절대적인 권력'의 핵심을 직접 짓밟아 주겠다는 냉혹한 살기였다.
후웅-!
진혁이 가볍게 어깨를 움직였다.
그의 몸 주변으로 칠흑 같은 마기가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랐다.
더 이상 인공지능의 경고음도, 단전 과부하를 알리는 HUD의 붉은 경고창도 존재하지 않았다.
오직 자신의 감각과 심장의 고동만이 전신을 지배하고 있었다.
"움직인다."
진혁의 몸이 한 줄기 검은 잔상으로 변했다.
[마영신보 - 극(極)].
광학 왜곡 기술과 순수한 마기를 결합한 은형의 보법이 발동되는 순간, 그의 형체는 양자 서버 돔의 공간 속에서 완전히 지워졌다.
티타늄 그룹 본사, 상층부 지하 섹터 4.
지상 수천 킬로미터 위에서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야성을 이루는 상층 마천루와는 대조적으로, 이 구역은 철저한 어둠과 냉기 속에 잠겨 있었다.
1계급의 특권층조차 접근이 허용되지 않는 철저한 금단의 땅.
과거 티타늄 그룹이 고대 마교의 유골과 기술을 밀반입해 최초의 생체 실험을 감행했던 지하 연구소의 원형이 그대로 보존된 곳이기도 했다.
끼익- 쿠구구궁…….
무거운 티타늄 합금문이 열렸다 닫히는 소리가 거대한 지하 공간을 메웠다.
섹터 4의 내부 경비는 상층부의 어떤 정예 부대보다도 살벌했다.
인간의 감시망이 아니다.
구식 레이저 감지 그리드, 열원 탐지 센서, 그리고 공간의 압력 변화를 실시간으로 스캔하는 무인 자율형 방어 포탑들이 사방의 벽과 천장을 빽빽하게 메우고 있었다.
만약 일반적인 침투였다면, 그 어떤 최정예 잠입 요원이라도 단 3초 만에 수십 갈래의 레이저에 의해 벌집이 되었을 터였다.
하지만――.
-슈우우크.
허공의 공기 밀도가 미세하게 일그러졌다.
레이저 감지 그리드의 붉은 광선이 허공을 가로지르고 있었지만, 그 광선이 진혁의 어깨에 닿는 순간 기이하게 굴절되며 빗나갔다.
진혁은 시각조차 필요로 하지 않았다.
[천마마안(天魔魔眼)].
심법의 극의로 개안한 통찰의 안광이 전방 수백 미터 내의 모든 에너지 회로와 센서의 맥점을 꿰뚫고 있었다.
'저기다.'
진혁의 발끝이 바닥을 가볍게 스쳤다.
소리도, 바람의 결도 남기지 않는 완벽한 무음(無音)의 이동.
그가 스쳐 지나간 자리에는 오직 희미한 칠흑의 잔상만이 한 조각 남았다가 이내 스러져 내렸다.
천장에 설치된 무인 자율형 방어 포탑의 렌즈가 파직거리며 회전했다.
무언가 이상 감지를 느낀 듯 포탑의 총구가 진혁이 지나간 잔상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타겟 미아. 공간 압력 변동 감지. 방어 프로토콜――.
기계음이 채 완성되기도 전이었다.
파직!
진혁의 손가락 끝에서 뻗어 나온 칠흑의 마검강(魔劍剛)이 포탑의 중앙 코어를 정확히 관통했다.
폭발음조차 나지 않았다.
고주파 진동과 마기가 결합된 일격은 포탑의 분자 결합 그 자체를 순식간에 해체해 버렸다.
포탑은 소리 소문 없이 한 줌의 회색 가루로 변해 바닥으로 흘러내렸다.
"여기가 끝인가."
진혁의 걸음이 멈춰 섰다.
그가 도달한 곳은 지하 섹터 4의 가장 깊숙한 곳에 위치한 거대한 원형 격리실이었다.
방의 중앙에는 진무극 회장의 생체 인증과 양자 암호로 삼중 잠금된 거대한 '블랙 박스'―― 고대 천마 비급의 원본 데이터가 봉인된 저장고가 묵직한 위압감을 뿜어내며 버티고 서 있었다.
콰구구구궁……!
블랙 박스의 주변을 감싸고 있던 방어 필드가 진혁의 기척을 감지한 듯 푸른빛의 고압 플라즈마 장막을 전개했다.
동시에 블랙 박스의 상단에서 기계적인 경고음이 울려 퍼졌다.
[경고. 인가되지 않은 접근. 자폭 시퀀스 대기 중.]
[침입자의 생체 코어 출력 스캔…… 41,000 MW. 대상 '그릇'의 등급 초과. 방어 시스템 최대 출력 개시.]
쿠우웅-!
블랙 박스의 사방에서 티타늄 합금 벽이 갈라지며, 이현도가 남겨둔 최종 방어용 자율형 사이보그―― [팬텀 가드] 수십 기가 붉은 안광을 번뜩이며 스르륵 일어섰다.
그들의 손에 들린 고주파 플라즈마 블레이드가 어둠 속에서 시퍼런 살기를 뿜어냈다.
진혁은 물러서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입가에 짙고도 잔인한 미소가 걸렸다.
단전 속에서 끓어오르는 41,000 MW의 마기가 폭발하듯 전신의 혈관을 타고 손끝으로 집중되었다.
챙그랑――!
진혁의 손에 쥐어진 개량형 천마검이 푸른 뇌전과 칠흑의 마기를 동시에 휘감으며 울부짖었다.
시스템의 도움 따윈 필요 없었다.
오직 자신의 검과, 자신의 의념만이 존재했다.
"나와라."
진혁의 서늘한 음성이 지하 격리실의 공기를 얼어붙게 만들었다.
천 마디 말보다 무거운 참격이, 고대 천마의 진짜 비밀을 향해 거침없이 내리꽂히기 시작했다.
콰아아아앙-!
지하 섹터 4의 정중앙이 단 한 번의 참격으로 터져 나갔다.
수십 기의 팬텀 가드가 뿜어내던 고주파 플라즈마 블레이드의 빛은, 진혁의 검 끝에서 쇄도한 마기(魔氣)의 홍수 앞에서 속절없이 흩어졌다.
폭풍처럼 휘몰아치는 검강은 기계의 장갑을 종잇장처럼 찢어발겼고, 사방으로 튀는 스파크가 어둠을 푸르게 물들였다.
쾅, 쿠구구궁!
"크으윽……!"
기계 장치가 비명을 지르며 바닥으로 고철 덩어리처럼 무너져 내렸다.
팬텀 가드들의 코어가 파괴되는 소리는 마치 뼈가 부서지는 참혹한 메아리와도 같았다.
하지만 진혁의 눈빛은 조금의 흔들림조차 없었다.
그의 호흡은 흐트러짐 없이 깊고 고요했으며, 단전에서 뿜어져 나오는 41,000 MW의 출력은 오히려 방어 시스템의 에너지를 역으로 흡수하며 더욱 거대하게 요동쳤다.
[흡원천공 - 개량(改).]
파괴된 팬텀 가드들의 잔해 속에서 흘러나오는 잔류 생체 코어 에너지가 진혁의 손바닥으로 빨려 들어왔다.
찌릿한 전류와 함께 묵직한 내력이 혈관을 타고 단전으로 밀려들었다.
단숨에 41,500 MW를 넘어선 출력이 전신을 타고 짜릿하게 곤두섰다.
진혁은 가쁜 숨을 몰아쉬는 대신, 시선을 오직 방의 정중앙에 홀로 버티고 선 거대한 '블랙 박스'에 고정했다.
삼중으로 잠겨 있던 양자 암호와 생체 인증 시스템은 이미 진혁의 압도적인 마기 파동에 의해 내부 회로가 타들어 가며 기능을 상실하고 있었다.
지직거리며 파직이는 보안 경고등만이 붉은색과 푸른색을 교차하며 마지막 발악을 하고 있었다.
[경고…… 블랙 박스 외부 실드 붕괴율 89%. 데이터 유출 위험.]
[마스터 키 권한 상실. 비상 프로토콜――.]
"시끄럽다."
진혁이 낮게 뇌까리며 검을 치켜들었다.
더 이상의 경고음은 허락되지 않았다.
그가 허공을 향해 가볍게 검을 휘두르자, 공간 자체가 찢어지는 듯한 날카로운 풍음과 함께 [천마일검 - 개량(改)]의 파동이 블랙 박스의 정중앙을 강타했다.
콰아아앙!
기계음이 단발마의 비명과 함께 완전히 멎었다.
블랙 박스를 둘러싸고 있던 티타늄 합금 장갑이 거미줄 같은 균열을 내며 사방으로 튕겨 나갔다.
이어서―.
치익- 스으으윽…….
수백 년간 외부의 공기와 차단되어 있던 밀폐 구역의 압력이 해제되면서, 희뿌연 냉기와 함께 묘한 붉은빛을 띤 데이터 코어의 실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블랙 박스의 최심부.
그곳에는 차가운 철제 홀로그램 단상 위에 떠 있는 하나의 작은 구체가 있었다.
기계 장치와 고대 마교의 유골에서 추출된 생체 데이터가 완벽하게 결합된 형태.
그것이 바로 진무극과 이현도가 목숨을 걸고 숨겨두었던 '고대 천마 비급의 원본 데이터'였다.
진혁은 천천히 걸어가 그 구체 앞에 멈춰 섰다.
시스템의 인터페이스나 HUD 창은 꺼져 있었지만, 그의 [천마마안]은 그 구체 속에서 소용돌이치는 방대한 기(氣)의 궤적과 문자들을 생생하게 읽어내고 있었다.
그것은 단순한 데이터가 아니었다.
천 년 전,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어 마교의 정점에 섰던 천마가 자신의 모든 뼈와 피, 그리고 깨달음을 기록해 낸 순수한 '무공의 진리' 그 자체였다.
'과연…….'
진혁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어린다.
그가 지금까지 익혀온 흡원천공, 마광신보, 그리고 스스로 개척한 초월천마경의 모든 조각들이 이 원본 데이터를 마주하는 순간, 거짓말처럼 머릿속에서 하나로 아귀가 맞아떨어지기 시작했다.
진혁이 손을 뻗어 그 붉은빛의 구체에 손가락을 갖다 대었다.
투두두둑-!
순간, 진혁의 전신경락을 타고 비명이 터져 나오는 듯한 엄청난 충격이 밀려왔다.
시스템의 보조 없이 오직 자신의 육체와 정신력만으로 그 방대한 고대 마기의 정보를 받아들이는 과정.
혈관이 터질 듯한 압박감 속에서도 진혁의 눈동자는 오히려 더욱 선명하게 빛났다.
비급의 데이터가 그의 의식 속으로 폭포처럼 밀려들며, 단전의 출력이 다시 한 번 거세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42,000 MW…….
43,000 MW…….
출력의 상승이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그 속에서 진혁이 깨달은 것은, 무공이란 기계의 연산이나 기업의 자본으로 빚어낼 수 있는 부품이 아니라, 오직 목숨을 건 사투와 치열한 통찰 속에서만 완성되는 '자신의 진리'라는 사실이었다.
후우우우-.
지하 섹터 4를 가득 채우고 있던 냉기와 붉은빛이 일제히 진혁의 몸 안으로 흡수되며 사방이 어둠에 잠겼다.
고요함이 찾아온 지하 격리실.
진혁은 천천히 눈을 뜨며 손에 쥔 개량형 천마검을 거두었다.
그의 등 뒤로, 신서울의 가장 깊은 어둠을 뚫고 올라갈 새로운 참호의 문이 열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