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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토콜: 천마 · 106화목차

제106화 시스템을 끄다

시야가 서서히 어두워졌다.

눈을 감은 것이 아니었다. 망막을 채우고 있던 파란색 HUD 창, 틱틱거리며 남은 배터리 잔량을 표시하던 시스템 알림, 그리고 적의 움직임을 미리 계산해 궤적을 붉은 선으로 띄우던 전투 보조 프로토콜.

그 모든 것이 진혁의 의지에 의해 완벽하게 꺼졌다.

슈우우우-!

신서울 외곽, 차가운 빗방울이 섞인 밤바람이 구구역 협곡의 잿빛 모래바람과 엉켜 사방으로 휘몰아쳤다.

스펙터 암살 부대.

티타늄 그룹의 잔당들이 숨겨놓은 최정예 스텔스 저격수들이 펼쳐놓은 광학미채 결계는 주변의 빛을 왜곡하고 있었다. 일반적인 인간의 눈은 물론이고, 웬만한 첨단 센서조차 그들의 위치를 포착할 수 없는 완벽한 사각지대.

하지만 진혁은 더 이상 그런 기계적 감각에 의존하지 않았다.

‘……고요하군.’

심장의 박동이 귀 끝을 울렸다.

단전에서 웅크리고 있던 3만 MW의 마기가 혈관을 타고 흐를 때마다, 세포 하나하나가 살아 움직이는 듯한 생생한 전율이 일었다.

독고운과의 일전에서 깨달은 바가 있었다.

기계가 계산해 주는 궤적은 완벽할지 몰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과거의 데이터’를 짜깁기한 것에 불과하다. 살아 움직이는 적의 의념과 바람의 결, 그리고 허공을 가르는 살기(殺氣)는 그 어떤 알고리즘도 완벽하게 예측할 수 없다.

오직 온몸의 감각을 곤두세우고, 심법(心法)으로 호흡을 맞출 때만 비로소 세상의 진짜 결이 보였다.

파앗-!

진혁의 몸이 빗속을 갈랐다.

[마광신보(魔光神步) - 극(極)].

나노머신이 신경 전달 속도를 강제로 부스트하던 과거와는 달랐다. 지금의 움직임은 오직 근육의 탄성과 단전에서 뿜어져 나오는 순수한 마기의 폭발력으로만 이루어져 있었다.

지면을 박차고 나간 자리에 칠흑 같은 잔상이 찢어졌다.

비이익-!

그 순간, 사방의 어둠 속에서 은빛 섬광이 빗방울을 꿰뚫고 날아왔다.

스펙터 부대의 고주파 저격 탄환. 마의 속도로 날아든 탄환은 공기와의 마찰마저 지우며 진혁의 심장을 노리고 있었다.

시스템이 켜져 있었다면 탄환의 궤적을 0.001초 만에 계산해 회피 경로를 띄워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진혁은 아무것도 보지 않고 있었다.

다만, 느꼈을 뿐이다.

오른쪽 귓바퀴를 스치는 미세한 공기의 압력 변화.

그리고 등 뒤의 허공에서 뿜어져 나오는 날카로운 살의의 파동.

챙강-

진혁이 고개를 틀지도 않은 채 손을 뻗었다.

그의 손에 쥐여진 개량형 천마검이 허공을 횡으로 가로질렀다. 검신에 깃든 마기가 칠흑빛 호선을 그리며 날아오던 고주파 탄환을 정중앙에서 두 쪽으로 쪼개버렸다.

탄환이 터지며 발생한 플라즈마 불꽃이 진혁의 흑발을 붉게 물들였다.

“……!”

어둠 속에 숨어 있던 스펙터 부대 요원들 사이에서 미세한 경악의 숨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들의 광학미채 수트는 주변 환경과 완벽히 동화되어 있었다. 심지어 체온까지 완벽하게 차단하여 열화상 센서에도 잡히지 않는 일급 암살 병기들이었다.

그런데 진혁은 단 한 번의 오차도 없이, 날아오는 탄환의 궤적을 베어낸 것이다.

“타겟의 생체 반응이 이상하다!”

“시스템 경고가 없는데…… 저 자식, 시각 정보 출력이 안 잡힌다!”

“어떻게 내 위치를 안 거지? 사격 중단! 진형 유지해라!”

무전기를 타고 흐르는 다급한 목소리들이 진혁의 [천마마안(天魔魔眼)]에 고스란히 걸려들었다.

눈을 감고 있었지만, 진혁의 머릿속에는 사방의 풍경이 흑백의 파동으로 선명하게 그려지고 있었다.

인간의 심장박동.

나노머신 회로가 구동될 때 발생하는 미세한 고주파 전자기파.

그리고 그들이 뿜어내는 두려움의 냄새까지.

“시끄럽군.”

진혁이 낮게 중얼거렸다.

그의 입꼬리가 싸늘하게 말려 올라갔다.

시스템이 없어서 불편하다고 생각한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애초에 그 시스템이라는 것은 진무극과 이현도가 진혁을 ‘그릇’으로 부리기 위해 채워놓은 족쇄에 불과했으니까.

족쇄를 부수고 나니, 세상이 이토록 넓고 선명하게 보일 줄이야.

스으으…….

진혁의 단전에서 3만 MW의 마기가 폭발적으로 끓어올랐다.

이전처럼 시스템이 출력을 조절하고 과부하를 경고하는 알람 따위는 울리지 않는다. 오직 진혁 자신의 의지만이 마기의 양과 출력을 결정한다.

지면을 딛고 있던 진혁의 부츠 밑창이 바스러졌다.

콰아앙-!

소리보다 빠른 돌파.

[마광신보 - 극(極)]의 진수가 발휘되면서, 진혁의 형체가 아예 공기 중에서 지워졌다. 사방으로 튀어 오르던 빗방울들이 진혁이 지나간 자리의 진공 상태 때문에 둥글게 모여들었다가 터져 나갔다.

“어……?”

스펙터 부대의 리더로 보이는 자의 시야에 검은 잔상이 스쳤다.

이미 반응하기에는 너무 늦었다.

푸시식-

개량형 천마검이 광학미채 수트의 은빛 결계를 종잇장처럼 찢어발겼다.

수트의 방어 코어가 최대 출력으로 마기를 막아보려 했지만, 진혁의 검에 담긴 고주파 진동 파쇄력은 기계 장치의 분자 결합 자체를 무참히 박살 내버렸다.

“크윽……!”

요원의 몸이 상하로 반동강이 나며 핏물이 빗속으로 흩뿌려졌다.

진혁은 멈추지 않았다.

살아 움직이는 감각에 몸을 맡긴 채, 그는 허공을 차며 방향을 꺾었다.

[천마무상체(天魔無相體·개량)]로 강화된 육체는 빗속의 차가운 저항을 온전히 받아내며 오히려 더 폭발적인 가속을 만들어냈다.

챙-! 챙가방-!

어둠 속에서 암살용 블레이드를 꺼내 든 요원 두 명이 동시에 진혁의 측면을 파고들었다.

합동 공격. 수많은 실전에서 다져진 완벽한 연계 궤적이었다.

하지만 진혁은 그들의 움직임을 보지도 않고 검을 휘둘렀다.

콰지지직-!

검신에 엉겨 붙은 푸른 뇌전이 사방으로 튀어 오르며 암살자들의 수트를 강제로 쇼트시켰다.

[뇌전마강(雷電魔剛) - 십자참].

칠흑의 마기와 뇌전이 십자 형태로 얽히며 어둠을 반으로 갈랐다.

“커하……!”

두 명의 스펙터 요원은 비명조차 제대로 지르지 못한 채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그들의 전신 경로가 마기에 의해 완전히 타버려 숯덩이처럼 검게 변해 있었다.

순식간에 부하 셋을 잃은 암살 부대 리더가 경악에 찬 목소리로 소리쳤다.

“괴물……! 저 자식은 인간이 아니야! 전원 산개해서 화력 집중해! 저격 모드로 전환한다!”

그의 목소리에 남은 요원들이 사방으로 흩어지며 어둠 속으로 숨어들었다.

하지만 진혁의 발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진혁은 눈을 감은 채, 허공에 흩어진 피비린내와 호흡의 잔상을 쫓았다.

시스템의 유도선이 사라진 자리를, 순수한 무인의 ‘의념(意念)’이 완전히 채우고 있었다.

“숨어봤자 소용없다.”

진혁의 입술 사이로 낮고 무거운 음성이 새어 나왔다.

그의 손에 쥐여진 천마검이 은은한 청백색 광채를 뿜어내며 진동하기 시작했다. 적의 에너지를 베어낼수록 스스로 진화하는 검이, 주인의 각성된 의지에 호응하듯 미세하게 울부짖었다.

슈우우우-!

진혁이 다시 한번 대지를 박차고 상층 관문을 향해 수직으로 솟구쳤다.

시스템을 끈 그에게, 이제 두려울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신서울의 밤하늘을 가르는 칠흑의 잔상이 마천루의 거대한 어둠 속으로 깊숙이 파고들었다.

콰아아아-!

진혁의 몸이 허공을 차고 오르며 상층 관문 외벽의 강화유리를 문자 그대로 분쇄했다.

수천 킬로바이트의 연산 데이터나 기계적 보조 장치 따위는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오직 근육의 탄성과 마기의 응집력만이 그의 궤적을 완성했다.

파편이 비처럼 쏟아지는 그 중앙을 뚫고 나아가며 진혁은 [천마마안]을 더욱 깊게 개방했다.

눈꺼풀 안쪽으로 세상의 모든 에너지가 흑백의 파동으로 재편되어 들어왔다.

‘저놈들의 숨소리가 잦아들었다.’

스펙터 부대의 잔당들이 관문 내부의 통신망을 통해 공포에 질린 목소리를 주고받는 파장이 진혁의 고막을 때렸다.

- “타겟이 상층 관문 B구역 진입했다! 저격병, 전원 주파수 고정해!”

- “안 돼! 센서에 잡히지 않는다! 어디로 사라진 거야?!”

- “위다! 머리 위…… 크아악!”

챙기방-!

외마디 비명과 함께 통신이 끊겼다.

진혁은 이미 그들의 두개골 위를 밟고 지나간 뒤였다.

[마광신보 - 극(極)]의 여파로 공기 중에 남아 있던 진공의 잔상이 터져 나가며 주변의 철제 구조물을 종잇장처럼 우그러뜨렸다.

암살 부대의 리더가 식은땀을 흘리며 대형 저격총의 방아쇠를 당겼다.

그가 겨눈 곳은 진혁이 서 있던 자리가 아니라, 진혁이 ‘지나갈 것으로 예측되는’ 전방 15미터 지점이었다. 기계적인 탄도 계산 장치가 도출해 낸 최적의 사격 포인트.

하지만 진혁은 그 예측을 비웃듯 발걸음을 반 박자 죽였다가 폭발적으로 튕겨 나갔다.

피융-!

탄환이 진혁의 뺨을 스치며 지나쳤다.

바람결이 뺨의 피부를 찢었지만, [천마무상체]의 마기 방벽이 즉각 반응하여 상처를 메우고 피를 멎게 했다.

‘느려.’

머릿속에서 시스템이 경고음을 울리던 과거였다면 이 스침조차 치명적인 위협이었겠지만, 지금의 진혁에게는 그저 지나가는 바람 한 줄기에 불과했다.

적의 호흡과 심장 박동, 그리고 방아쇠를 당기는 손가락의 미세한 근육 수축까지 전부 진혁의 오감에 생생하게 각인되어 있었으니까.

파앗-!

진혁이 눈을 번뜩이며 암살 부대 리더의 정면으로 파고들었다.

리더의 눈동자가 극도의 공포로 잘게 떨렸다.

“이, 이 괴물 자식……!”

그가 반사적으로 허리에 찬 고주파 블레이드를 뽑아 들며 휘둘렀지만, 진혁의 검은 그보다 훨씬 빨랐다.

아니, 빠른 것만이 아니었다.

검에 실린 3만 MW의 마기가 단순한 물리적 참격을 넘어 주변의 공간 자체를 압박하고 있었다.

콰아앙-!

개량형 천마검이 리더의 블레이드와 정면으로 부딪쳤다.

챙강! 하는 날카로운 파열음과 함께, 티타늄 합금으로 만들어진 암살자의 무기가 분자 단위로 바스러지며 사방으로 튀어 올랐다. 검강에 실린 고주파 진동이 적의 손아귀를 거쳐 전신 경로까지 타고 올라갔기 때문이다.

“크윽……! 팔이……!”

“끝이다.”

진혁의 차가운 음성과 함께 천마검이 리더의 목을 가로질렀다.

스으으…… 툭.

수트의 방어 코어가 완전히 붕괴하며 리더의 목이 빗물 속으로 떨어져 내렸다.

남은 스펙터 요원들이 부하의 죽음을 목격하고는 전의를 상실한 채 뒤로 도망치려 발버둥 쳤지만, 이미 진혁의 마기 반경 안에 들어온 이상 그들의 생존 확률은 제로였다.

콰지지직-!

진혁이 검을 원형으로 휘두르자, 칠흑의 마기와 뇌전이 융합된 [뇌전마강]이 사방으로 방사되며 도망치던 요원들의 퇴로를 완전히 지워버렸다.

비명조차 터질 새 없이, 십수 명의 최정예 암살 요원들이 한순간에 잿더미와 핏물로 화하여 바닥에 흩뿌려졌다.

주변은 다시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들리는 것이라곤 빗방울이 철제 바닥에 부딪히는 소리와, 진혁의 심장에서 뿜어져 나오는 묵직한 고동 소리뿐이었다.

쿵, 쿵, 쿵.

진혁은 피 묻은 천마검을 바닥에 끌며 걸음을 멈추었다.

시스템의 HUD가 꺼진 검은 시야 속에서, 오히려 세상의 결이 더욱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상층 관문을 넘어선 그곳에는 티타늄 그룹의 진짜 심장부로 통하는 거대한 엘리베이터 게이트가 웅장한 자태를 드러내고 있었다.

게이트의 상단에는 푸른빛의 마크가 깜빡이고 있었다.

그것은 이전에 진혁을 옭아매던 ‘천마 프로토콜’의 잔존 메인 서버가 가동되고 있음을 알리는 신호였다.

‘아직 끝난 게 아니로군.’

이현도가 소멸하고, 복제체 00호가 바스러졌음에도 불구하고, 티타늄 그룹의 최상층에는 여전히 무언가가 도사리고 있다.

그것이 진무극이 남긴 유물이든, 혹은 그보다 더 깊은 어둠에 숨어 있는 진짜 주인이든 간에 상관없었다.

진혁은 단전에서 끓어오르는 3만 MW의 마기를 가라앉히며 천마검을 꽉 움켜쥐었다.

슈우우우-!

검신이 붉고 검은 투기를 뿜어내며 진동했다.

기계의 계산에 의존하지 않고, 오직 자신의 심법과 의지만으로 단전을 다스리는 경지.

그것이 바로 지금의 강진혁이 도달한 진정한 [초월천마경(超越天魔境)]이었다.

진혁은 망설임 없이 거대한 엘리베이터 게이트 앞으로 걸어가, 마기가 깃든 검을 그대로 게이트의 중앙에 박아 넣었다.

콰아아아궁-!

수 미터 두께의 티타늄 장갑문이 진혁의 참격 한 방에 맥없이 반으로 쪼개지며 안쪽의 어두운 통로를 드러냈다.

통로의 끝, 신서울의 가장 높은 곳에서 흘러나오는 서늘한 바람이 진혁의 흑발을 거칠게 헤집었다.

진혁은 핏물이 뚝뚝 떨어지는 검을 치켜들며 한 걸음 내딛었다.

그의 발걸음 속에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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