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화 작은 찬사
가마솥 아래에서 타오르는 푸른 불꽃이 침묵에 싸인 아카데미 실습실의 어둠을 옅게 비추었다. 뭉근하게 피어오르는 은빛 수증기 사이로 달콤 쌉싸름한 시약 향이 온 방 안을 가득 채워 나갔다.
"온도 유지 수치가 아주 완벽하네요. 이 정도 열조절이면 용액이 재결정화되어 굳어 버릴 일은 절대 없겠어요."
리아나가 가마솥 위로 증발하는 마력 수증기를 동제 측량기로 재며 덤덤하게 말했다. 지난번 중간 평가에서 받은 C+라는 참담한 학점을 씻어 내기 위해 시작된 야간 재실험은 놀라울 정도로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다.
실험대 한편에는 카이엘이 밤을 새워 작성한 이론 보반 메모지가 정갈하게 놓여 있었다. 깃펜으로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밀하게 적어 내려간 수식들과 마법 진인의 배치가 촛불 빛을 받아 묵직한 존재감을 드러냈다.
리아나는 측량기를 가볍게 내려놓고 카이엘의 노트로 시선을 옮겼다. 평소라면 귀족 특유의 허례허식과 자존심이 섞인 쓸데없는 수식이라며 치부했을지도 모르는 미려한 필체였지만, 그 안에 담긴 연금술적 논리만큼은 흠잡을 데가 없었다.
"기존 학설에서는 미세 배합 시 발생하는 열 손실을 방지하는 게 불가능하다고 봤잖아요. 그런데 가마솥 하단부에 이중 제어 진인을 배치해서 에너지 순환을 유도하다니……."
리아나가 손가락으로 노트를 천천히 짚어가며 수식을 꼼꼼히 읽어 내려갔다. 카이엘은 옆에서 유리 집게를 든 채 꼿꼿하고 완벽한 자세로 서 있었지만, 그의 은빛 눈동자는 불안하게 리아나의 손끝을 쫓고 있었다.
"이건 인정할 만하네요."
리아나가 노트를 살짝 덮으며 무심하게 한마디를 던졌다. 정말이지 지나가는 바람처럼 가볍고 짧은 칭찬이었다.
하지만 그 순간, 카이엘의 세계가 그대로 멈춰 버렸다.
카이엘의 머릿속에서는 수십 가지의 고상한 반박과 완벽한 귀족적 답변이 폭풍처럼 휘몰아쳤다. '아카데미 수석의 이론을 이제야 알아본 겁니까', '당연한 결과이므로 새삼스럽게 굴지 마십시오' 따위의 엄격한 문장들이 뇌리를 스쳤다.
그러나 정작 그의 입 밖으로 나온 것은 터무니없는 손짓이었다.
달칵, 챙강!
"앗."
카이엘이 손에 쥐고 있던 달빛 정수 시약병을 삐끗하며 놓쳤다. 맑고 은은한 실버빛 시약이 매끄러운 실험대 위로 철퍽 소리를 내며 넓게 쏟아졌다. 언제나 한 치의 오차도 없던 완벽주의자의 손끝이 눈에 띄게 떨리고 있었다.
"……쯧."
카이엘은 황급히 마른 헝겊을 집어 들고 쏟아진 시약을 닦아냈다. 귀족으로서의 위엄과 품위를 유지하려 어깨를 쫙 폈지만, 귓바퀴부터 시작된 선명한 붉은 기운은 이미 뺨까지 빠르게 번져 나가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손이 조금 조잡했군요. 다시 배합을 시작하겠……."
카이엘이 서둘러 두 번째 시약병의 코르크 마개를 젖혔다. 그러나 붉게 달아오른 귀를 숨기느라 시선이 미세하게 흩어진 탓이었을까. 병 입구가 유리 비커의 테두리에 세게 부딪히며 또다시 시약이 왈칵 쏟아져 내렸다. 명백한 두 번째 실수였다.
단 한 번도 실습실에서 시약을 흘려본 적 없는 연금술 학부 수석 엘리트라고는 도무지 믿기지 않는 허술함이었다.
리아나는 지저분해진 실험대와 붉다 못해 금방이라도 터질 듯한 카이엘의 귀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녀의 검은 눈동자에 짓궂은 호기심이 어린 빛으로 일렁였다.
"선배."
리아나가 실험대에 턱을 괸 채, 허둥지둥 손을 움직이는 카이엘을 똑바로 올려다보며 물었다.
"오늘 컨디션 안 좋으세요? 평소엔 시약 한 방울도 오차 없이 정확하게 측정하시던 분이 벌써 두 번이나 쏟으시네요."
"……."
카이엘의 말문이 턱 막혔다. 정적 속에서 가마솥의 끓는 소리만이 실습실 안에 크게 울려 퍼졌다. 카이엘은 헝겊을 쥔 손에 꽉 힘을 주며 시선을 정면의 빈 벽에 고정했다.
"……아닙니다. 계속합시다."
"아니긴 뭐가 아니에요. 손끝이 아주 덜덜 떨리시는데요. 혹시 제가 한 칭찬이 너무 파격적이라서 감격이라도 하셨나요?"
리아나가 특유의 날카로운 존댓말과 팩트 폭격으로 카이엘의 허를 정확히 찔렀다. 카이엘은 헛기침을 크게 하며 체면을 차리려 애썼다.
"황당한 추측입니다. 귀족이 겨우 평민…… 아니, 파트너의 가벼운 평가 한마디에 동요하는 불상사는 일어날 리 없습니다. 단지 실내 기온이 급격히 상승하여 손에 땀이 차 미끄러진 것뿐입니다."
"아, 예. 실내 기온이 너무 높아서 귀까지 저렇게 불타오르듯 붉어지셨군요. 정말이지 아주 설득력 있는 연금술적 해명이에요."
리아나가 작게 실소를 터뜨렸다. 명백히 비꼬는 말투였지만, 그 눈빛에는 카이엘을 향한 장난기와 미묘하게 부드러운 안도감이 함께 섞여 있었다.
카이엘은 붉어진 얼굴을 반대편으로 찰나에 돌린 채 입을 꾹 다물었다. 더 해명했다간 속마음에 든 수십 가지 생각들을 전부 들켜 버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겉으로는 차갑고 위엄 있는 표정을 지으려 최선을 다했으나, 귓가를 맹렬하게 울리는 심장 소리만큼은 어찌할 수 없었다.
"……계속합시다."
카이엘은 그 말만을 조용히 반복하며 새로운 시약병을 집어 들었다.
두 사람은 다시 고요한 집중 속으로 들어갔다. 카이엘은 이번만큼은 영혼을 끌어모으듯 완벽한 제어력으로 시약을 투입했고, 리아나는 시약이 반응하는 정확한 타이밍에 맞춰 마력을 정교하게 불어넣었다.
실험대 위의 가마솥 안에서 투명하게 끓어오르던 용액이 점차 영롱하고 맑은 황금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재실험은 의심할 여지 없이 완벽한 성공이었다.
"좋아요. 이 배합 비율과 순도라면 대학술제 제출용으로도 전혀 손색없겠네요."
리아나가 시약병에 완성된 황금빛 용액을 차곡차곡 담아 코르크로 단단히 막으며 만족스럽게 웃었다. 그녀는 실험 도구들을 손쉽게 정리하고 의자에 걸쳐 두었던 검은색 망토를 어깨에 둘렀다.
"오늘 정말 고생 많으셨어요, 카이엘 선배. 저 먼저 숙소로 가볼게요."
"……조심히 돌아가십시오."
카이엘은 꼿꼿이 선 채 고개만 살짝 숙여 정중하게 인사했다. 리아나가 실습실 문을 열고 밤 공기 속으로 나가는 모습까지 눈으로 온전히 담은 후에야, 그는 비로소 참았던 깊은 숨을 길게 내뱉었다.
탁.
문이 닫히고 실습실에는 완전한 적막과 조용함이 찾아왔다.
창문 너머로 차가운 달빛이 들어와 텅 빈 가마솥과 차갑게 식어가는 실험대를 묵묵히 비추었다. 하지만 카이엘의 붉어진 체온은 좀처럼 식지 않고 있었다.
그는 가만히 멍하니 서 있다가, 천천히 자신의 개인 연구 책상으로 걸어갔다. 서랍 깊숙한 곳을 열고 두꺼운 고급 가죽 양장 노트를 꺼냈다. 평소 오직 연구 일지와 엄격한 수식 분석만을 기록하던 그만의 신성한 노트였다.
카이엘은 깃펜을 집어 들고 잉크병에 촉을 적셨다. 정갈한 손글씨로 오늘 진행한 재실험의 수치와 배합 결과를 차분히 적어 내려가던 그가, 문득 펜촉을 멈추었다.
툭. 잉크 한 방울이 종이 위로 떨어져 작게 번져 나갔다.
카이엘은 한참 동안 움직이지 않은 채 멈춰 서 있다가, 페이지 하단의 여백 공간에 매우 작고 조심스러운 글씨로 한 문장을 적어 내려갔다.
'이건 인정할 만하네요.'
그녀가 지나치듯 덤덤하게 남기고 간 바로 그 여섯 글자였다.
카이엘은 자신이 적은 글자를 멍하니 내려다보았다. 촛불 불빛 아래에서 잉크 자국이 아련하게 아른거렸다.
"인정할 만하다……."
그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입안에서 그 단어를 조용히 굴려보는 것만으로도 가슴 깊은 곳에서 간질간질한 열기가 터져 나왔다.
카이엘은 결국 깃펜을 내려놓고, 두 손으로 얼굴을 완전히 가려버렸다. 길고 정갈한 손가락 틈새로 드러난 목덜미와 귀가 붉다 못해 불타오르고 있었다.
"내가 왜…… 겨우 그 한마디에……."
속마음 반박을 수십 개나 머릿속으로 떠올려 보았지만, 입 밖으로는 단 하나의 고상한 변명도 나오지 않았다.
달빛 아래의 가마솥은 완전히 식어 가고 있었지만, 혼자 남은 밤의 실습실에서 카이엘의 뜨거운 얼굴은 오래도록 식을 줄 몰랐다.
다음 회차 예고: 제10화 「진심의 시약」에서 카이엘과 리아나의 가마솥 소동이 이어집니다.
작품명: 《별빛 아래의 가마솥》
현재 회차: 제9화
다음 회차 예고: 제10화 진심의 시약
연재 일정: 용용 시리즈 연재 중
마지막 화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