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48화 백무현의 유언
콰아아아앙―!
지하 20층의 암전된 무기 시험장이 거대한 백색 섬광과 함께 갈가리 찢겨 나갔다.
천장에 얽혀 있던 고압 배관과 강철 구조물이 굉음을 내며 무너져 내렸고, 균열부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수백 기의 센티넬 드론 군집은 기계적인 섬광을 발하며 사방을 포위했다. 드론들의 하부에서 뿜어져 나오는 마이크로 미사일 연발과 초고온 하이퍼 레이저 궤적이 허공을 복잡하게 교차했다. 불과 십여 초 만에 공간 내부의 온도는 섭씨 수천 도를 훌발하며 생지옥으로 변모했다.
그러나 붉은 화염과 고열의 폭풍 한가운데로 짓쳐 들어가는 두 그림자에게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쿠구구구궁!
거대 강습 요새 수트, 카이저.
티타늄 그룹 블랙 가드의 총사령관 백무현의 의지가 실린 강철의 거인이 등 뒤의 대형 나노 부스터를 전개하며 가공할 붉은 화염을 토해 냈다. 흉부 두꺼운 티타늄 장갑이 수직으로 슬라이드되며 내부의 트윈 플라즈마 캐논이 모습을 드러냈다.
파아아아앙!
눈을 찌르는 푸른빛의 열선이 대각선으로 허공을 가로질렀다. 직격당한 센티넬 드론 수십 기가 형체도 없이 분자 단위로 녹아내리며 비처럼 파편을 흩뿌렸다.
"크아아아악―!"
카이저의 전신 스피커를 타고 터져 나온 백무현의 포효는 차가운 기계음이 아니었다. 그것은 뼈와 살을 가진 인간이 지를 수 있는 극도의 절규였다.
티타늄 그룹이 뇌간 깊숙이 이식해 둔 강제 통제 칩을 스스로 뜯어낸 직후였다. 뇌수(腦髓)를 직접 타격하는 과부하 전류와 신경 파괴의 통증이 그의 의식을 사정없이 흔들었다. 하지만 강철 투구 내부에서 번뜩이는 백무현의 뇌파 반응은, 그가 기계 인형으로 살아온 수십 년의 세월 중 그 어느 때보다 선명하고 뜨겁게 타오르고 있었다.
파바바박!
카이저의 우람한 어깨 장갑을 딛고 허공으로 솟구친 강진혁의 신형이 칠흑 같은 잔상을 남기며 사라졌다.
마광신보(魔光神步).
인공지능 설화의 전술 연산 궤적을 완전히 웃도는 무인의 절대적 보법이었다.
진혁은 찰나의 순간 허공을 가득 메운 미사일과 레이저의 틈새를 읽어 냈다. 단순한 물리학적 궤도가 아니었다. 폭발의 압력과 열기가 공기를 밀어내며 생겨나는 미세한 기압의 맥(脈), 즉 에너지의 결을 짚어 발을 디딘 것이다.
치지지직!
진혁의 차가운 흑안에는 더 이상 푸른빛의 HUD 상태창이나 시스템 분석 인터페이스가 떠오르지 않았다.
초반부터 자신을 보조하던 인공지능 설화의 연산 보조도, 티타늄 그룹의 시술로 손목과 목에 새겨졌던 시각 보존 회로도 이미 스스로 끊어 낸 지 오래였다.
오직 4단계 경지인 마신경(魔神境)의 정점에 도달한 참된 무인의 감각. 만물의 기혈 흐름과 공간의 진동을 직관으로 꿰뚫어 보는 통찰만이 그의 단전과 전신 신경망을 완벽하게 지배하고 있었다.
"하찮군."
진혁의 오른손 끝으로 서늘한 흑요석빛 마력이 응축되어 갔다.
고주파의 초진동 물리력과 순수한 흑색 마기가 극도로 동기화된 파천검강(破天劍罡).
그것은 단순히 강철이나 장갑판을 베어 내는 칼날이 아니었다. 공간 그 자체를 이루는 물리적 공진 주파수와 마기의 기혈을 접목하여 대상의 구조 자체를 붕괴시키는 법칙의 결정체였다.
스아아앙―!
진혁이 허공을 향해 가볍게 손목을 튕겼다.
눈에 보이지 않는 칠흑의 파문이 반경 수백 미터 전방으로 방사형으로 뻗어 나갔다.
신천마신공(新天魔神功) 제10식, 압도(壓倒).
쿠콰콰콰쾅!
검강이 공기를 찢고 닿는 순간, 상공의 중력장이 기괴하게 비틀리며 뒤틀렸다.
하이브 본체와 센티넬 드론 수십 기가 마치 보이지 않는 거대한 무형의 손바닥에 짓눌린 것처럼 우그러졌다. 초경량 장갑판이 비틀려 튕겨 나가고, 내부 회로가 고전압을 견디지 못해 잇따라 터져 나갔다. 핵심 동력원인 고출력 바이오 코어들이 연쇄 폭발을 일으키며 암전을 붉은 화염으로 물들였다.
번쩍! 콰아앙!
터져 나가는 폭염과 강철 파편의 폭풍 속에서 진혁은 깊게 숨을 들이켰다.
흡원천공(吸元天功).
상공을 뒤덮은 열기와 플라즈마 충격파, 터져 나간 전자 장치들의 전자기 잔향이 진혁의 전신 모공을 통해 검은 소용돌이로 흡수되어 들어왔다. 그 흉폭한 에너지를 단전의 마기와 융합하여 뇌전마강의 정순한 연료로 전환하는 찰나의 기혈 조율.
시스템의 계산식이나 프로토콜 데이터로는 결코 도달할 수 없는, 기계 공학적 에너지와 무공 심법의 완벽한 동화였다.
그러나 그 화려한 섬멸의 이면에서, 묵직하고 기분 나쁜 강철 파열음이 울려 퍼졌다.
푸슈우우욱―!
"크윽……!"
카이저의 거대한 동체가 허공에서 커다란 휘청임을 보이며 바닥으로 기울어졌다.
수백 발의 고에너지 레이저와 미사일 파편을 온몸으로 받아낸 카이저의 외장 티타늄 합금 장갑이 붉게 달아올라 녹아내리고 있었다. 그러나 정작 치명적인 손상은 외부가 아닌 내부에서 발생하고 있었다.
강제 제어 칩을 억지로 떼어낼 때 유입된 고전압 역기전력과, 티타늄 그룹이 사전에 걸어 두었던 자폭 시퀀스의 강제 중단 여파가 뇌수와 전신 회로를 짓눌렀다. 카이저의 주동력원인 4세대 군용 바이오 코어가 임계 수치를 훨씬 넘어 내부에서부터 파괴되고 있었다.
쿠우웅!
상공의 잔존 드론들을 모조리 분쇄한 카이저가 결국 균형을 잃고 콘크리트 바닥으로 추락했다.
지하 20층의 굳건한 바닥재가 거미줄처럼 갈라지고 충격파로 인해 수많은 돌가루와 철파편이 사방으로 튀어 올랐다.
슈우웃.
진혁은 깃털처럼 가볍게 착지하며 카이저의 무너진 흉부 장갑 앞으로 다가섰다.
그의 차가운 흑안이 검붉은 연기와 전자기 불꽃을 뿜어내는 기계 거인을 조용히 응시했다.
치이익― 콰르르르.
카이저의 전신 관절 이음새에서 냉각수와 갈색 오일이 피처럼 바닥으로 흘러넘쳤다. 흉부 한가운데, 방탄 캐니스터 속에 엄중히 봉인되어 있어야 할 백무현의 생체 뇌.
원래라면 영양액으로 가득 채워져 투명하게 유지되어야 할 강화 유리 수조는 절반 이상 금이 가 있었고, 푸른빛의 신경 보존액이 파편 틈새로 뚝뚝 떨어져 내렸다.
기계 거인의 심장이 꺼져가고 있었다.
코어 출력 12%…… 8%…… 4%…….
남아 있는 예비 전력이 바닥을 드러내며 붉은 비상 경고등만이 희미하게 깜빡거렸다.
"……백무현."
진혁이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치지직.
카이저의 외부 보컬 스피커는 이미 회로가 타버려 작동하지 않았다.
대신, 뜯겨 나간 신경 케이블의 끝자락에서 미세한 전자기파 파동이 진혁의 귓전을 직격했다. 그것은 성대를 거친 음성이 아닌, 잔존 뇌파를 직접 변환하여 전송하는 일종의 신경 텔레파시였다.
[……진, 혁인가.]
갈라지고 쉰 목소리.
수십 년 동안 기계 부품으로 갇혀 썩어가던 한 무인의 메마른 영혼이 진혁의 의식 속에 꽂혀 들었다.
"나다."
진혁은 카이저의 깨진 뇌 수조 캐니스터 위로 가만히 한쪽 손을 얹었다.
손끝에서 은은한 온기를 머금은 순양(純陽)의 마기를 천천히 흘려보냈다. 파괴되어 가는 뇌세포의 사멸을 조금이라도 늦추고, 끊어져 가는 신경 시냅스를 다시 잇기 위한 운기조식이었다.
그러나 백무현의 뇌파는 진혁이 보내온 마기를 거칠게 밀어냈다. 명확한 거부의 의사였다.
[거두어라.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 짓이다. ……내 뇌는 이미 자폭 회로가 역류하면서 신경 시냅스의 칠십 퍼센트 이상이 괴사했다. 이 기계 껍데기가 멈추는 순간, 나라는 존재의 수명도 끝이다.]
백무현의 신경 파동에는 묘한 담담함이 깔려 있었다.
죽음에 대한 공포도, 신세를 망친 원망도 존재하지 않았다.
오직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마침내 자신의 빼앗긴 영혼을 되찾은 자만이 가질 수 있는 서늘하고 맑은 해방감이었다.
"티타늄 그룹의 개로 죽는 것보다는 낫겠지."
진혁의 무덤덤한 말에 백무현의 뇌파가 희미하게 요동쳤다. 씁쓸한 자조가 섞인 파동이었다.
[그래…… 평생을 개로 살았지. 무(武)의 극의를 기계 공학으로 구현해 주겠다는 진무극의 달콤한 사기에 속아, 내 스스로 뼈와 살을 도려내고 기계 통 속에 뇌를 처넣었어. 티타늄 그룹의 사냥개가 되어…… 수많은 무림 동포와 무고한 이들을 내 손으로 도살했다. 그 업보의 대가가 바로 이 차가운 강철 껍데기지.]
유리 수조 너머로 보이는 백무현의 뇌 표면에 박혀 있던 은빛 나노 전극들이 하나둘 빛을 잃어가기 시작했다.
생체 신호 그래프가 급격한 경사를 그리며 바닥으로 곤두박질치고 있었다.
그에게 남은 시간은 길어야 2분, 혹은 그 미만이었다.
백무현은 그 얼마 남지 않은 찰나의 순간 속에서, 자신이 평생 짊어져 온 마지막 업보와 비밀을 털어내려는 듯 거친 뇌파 파동을 뿜어냈다.
[진혁, 똑똑히 들어라. 네가 조금 전 타워 120층 집무실에서 베어 넘겼던 진무극…… 그놈은 '가짜'다.]
진혁의 눈썹이 옅게 꿈틀거렸다.
"가짜라고?"
[정확히 말하자면 의식 데이터가 연동된 생체 분신(分身)이자 백업체에 불과했다. 진무극은 늙고 병든 인간의 육체에 하등의 집착도 없어. 놈의 진짜 본체와 진짜 뇌는 타워 꼭대기가 아니라…… 가장 깊고 어두운 지하 밑바닥에 숨겨져 있다.]
쿠구구궁…….
백무현의 전언이 끝남과 동시에, 지하 20층의 바닥 저편 깊은 곳에서 기괴한 진동음이 울려 퍼졌다.
마치 흉폭한 거인의 심장이 대지 밑에서 요동치는 듯한, 기분 나쁘고 둔탁한 맥동이었다.
진혁의 미간이 좁아졌다.
마신경의 감각을 타워 수직 축을 따라 깊숙이 내려보내자, 지도상에는 존재하지 않는 최하층 심연의 공간이 감지되었다.
그곳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은 통상적인 인간의 내력도, 기계의 전자기파도 아니었다.
이질적이고 탐욕스러우며, 고대의 핏빛 원념이 과부하된 암흑물질과 엉켜 붙은 거대한 악의의 덩어리였다.
[프로토콜 제로(Protocol Zero) 룸…….]
백무현의 목소리가 떨려 왔다.
[티타늄 타워를 처음 건설할 당시, 고대 마교의 핵심 유적이 묻혀 있던 지하 바로 위에 지어진 극비 챔버다. 진무극은 이미 자신의 본래 뇌와 주요 신경계를 인출하여, 놈들이 '오리진(Origin)'이라 부르는 궁극의 시작형 수트와 결합 시술을 진행하고 있다.]
"오리진 수트……."
[그래. 1,000년 전 천마의 유골에서 직접 추출한 절대 마기(魔氣)의 정수와, 티타늄 그룹 연구소가 극비리에 배양한 5세대 암흑물질 생체 코어가 융합된 금단의 생체 병기다. 놈은 신서울 전체의 전력을 그곳으로 강제 역류시켜…… 스스로 신(神)이자 절대의 천마가 되려 하고 있어.]
백무현의 기억 데이터 단편들이 전자기 파동을 타고 진혁의 감응 신경망으로 유입되었다.
차갑고 거대한 원형 격납고.
거대한 칠흑빛 수트 중심부에 자신의 척수와 뇌를 결속한 채, 기괴한 광기의 미소를 짓고 있는 은발의 노인.
진무극은 인간이라는 껍데기를 완전히 벗어던지고, 기계 공학과 고대 마공이 완벽하게 융합된 금단의 마신(魔神)으로 거듭나려 하고 있었다.
[그 챔버는 일반적인 네트워크 해킹이나 물리적인 타격으로는 절대 파괴할 수 없다. 외부와 차단된 독립형 양자 격벽 시스템이 걸려 있어서…… 티타늄 그룹 이사회조차 접근 권한이 없어.]
치지직, 팟!
카이저의 가슴팍, 백무현의 뇌 수조 아래쪽에 매립되어 있던 소형 데이터 전송 포트 하나가 덜컥 소리를 내며 밖으로 튀어나왔다.
그것은 붉은빛으로 차갑게 빛나는 나노 크리스털 칩이었다.
백무현이 블랙 가드 총사령관이라는 지위를 이용해 가슴속 가장 깊은 암호화 데이터 블록에 숨겨 두었던 최후의 오버라이드 권한이었다.
[내 뇌의 잔존 전력을 모두 태워서…… 프로토콜 제로 룸의 마스터 오버라이드 암호키를 추출했다. 이걸 받아라.]
진혁은 망설임 없이 손을 뻗어 붉은 크리스털 칩을 쥐었다.
손가락 끝을 타고 흐르는 나노머신이 칩을 감싸 안는 순간, 차가운 데이터 패킷이 진혁의 뇌리 속에 쏟아져 들어왔다.
[SYSTEM INFO: 보안 패킷 수신 완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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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데이터 명칭: 'PROTOCOL ZERO: OVERRIDE KEY'
■ 인가 등급: 레벨 0 (절대 권한자 - 블랙 가드 사령관 백무현)
■ 대상 구역: 티타늄 타워 지하 30층 [심연의 관(棺)]
■ 격벽 암호 해제 시퀀스: 동기화율 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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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터 패킷이 진혁의 의식 속에 완전히 각인되는 순간, 백무현의 뇌 수조를 채우고 있던 푸른빛 생체 액체의 빛이 완전히 바래기 시작했다.
금이 간 유리 너머로 보이던 뇌세포의 시냅스들이 하얗게 타들어가며 사멸의 궤적을 그렸다.
치이익…… 치익…….
카이저의 전신 장갑 틈새에서 뿜어져 나오던 오일 증기와 냉각수 분출이 점차 잦아들었다.
기계 거인의 묵직한 심장 박동소리가 완벽한 침묵으로 가라앉았다.
[진혁.]
백무현이 보내온 마지막 뇌파 파동.
그것은 바람 앞에 꺼져가는 촛불처럼 위태로웠으나, 그 어떤 순간보다 맑고 정순했다.
"듣고 있다."
[나는 평생을 힘에 굶주려 살았다. 더 강한 육체, 더 빠른 연산 속도, 더 완벽한 무력을 얻을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가리지 않았지. 그래서 내 멀쩡한 몸을 도려내고 기계 부품으로 채웠고…… 결국 괴물의 충직한 노예가 되었다.]
백무현의 의식이 진혁의 전신을 조용히 감돌았다.
기계의 보조 HUD 따위는 털끝만큼도 빌리지 않은 채, 오직 자신의 의지와 단전의 기혈만으로 당당히 서 있는 청년.
티타늄 그룹의 손에서 태어난 가장 완벽한 실험체였으나, 자신을 앳맨 시스템의 굴레를 스스로 부수고 참된 무의 극의에 도달한 자.
[하지만 너를 보고 비로소 깨달았다. 무(武)는…… 차가운 기계 부품 따위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었음을. 핏줄도, 자본도, 기술도 아닌…… 자신의 영혼을 불태워 얻어낸 통찰과 의지만이 진짜 무도라는 것을.]
백무현의 뇌파 파동에서 깊은 탄식과도 같은 전율이 흘렀다.
[고맙다, 강진혁. 내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 나를 기계 사냥개가 아닌, 한 명의 인간 무인으로 죽게 해 주어서.]
스르륵.
카이저의 붉게 타오르던 단하나의 대형 센서 빛이 완전히 꺼져 내렸다.
수조 내부의 뇌는 생체 반응을 완전히 멈추었고, 모니터의 생체 신호 그래프는 일직선으로 평탄하게 이어졌다.
삐이이이이―.
적막.
포화와 파괴의 소음으로 가득했던 지하 20층 폐허에 무거운 정적만이 내려앉았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티타늄 그룹의 최강자.
기계의 갑옷 속에 갇혀 영혼 없는 살인병기로 살아가야 했던 비운의 무인, 백무현.
그는 마침내 기술이 씌운 굴레를 벗어던지고, 차가운 강철 요람 속에서 영원한 안식에 들었다.
진혁은 말없이 서서 카이저의 무너진 거구만을 응시했다.
손끝에 쥐어진 나노 크리스털 칩의 온도가 차갑게 식어가고 있었다.
스윽.
진혁은 깨진 캐니스터 위로 손을 뻗어, 흙먼지와 그을음으로 뒤덮인 카이저의 장갑판을 가볍게 털어내어 주었다.
"편히 쉬어라, 백무현."
무인의 예(禮)였다.
한때 적이었으나, 마지막 순간에는 기계가 아닌 무인으로서 자신의 영혼을 증명하고 산화한 전사에 대한 최소한의 배려였다.
"네가 남긴 열쇠로…… 네 숨통을 끊어 놓은 그 원흉의 목을 베어 주마."
진혁이 몸을 돌려 지하 깊은 곳을 향하는 찰나였다.
쿠구구구구궁―!
단전 깊숙한 곳에서부터 소름 끼치는 오한이 치밀어 올랐다.
단순한 건물 구조물의 진동이 아니었다.
지하 20층의 콘크리트 바닥 전체가 울부짖고 있었다.
벽면에 복잡하게 얽혀 있던 초고압 전력 케이블들이 일제히 푸른 불꽃을 튀기며 파열했다.
신서울 상공과 티타늄 타워 전체를 지탱하던 거대한 전력이, 마치 보이지 않는 아가리에 흡수되듯 바닥 아래 심연으로 곤두박질치고 있었다.
우우우우웅―!
공간 자체가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바닥의 미세한 균열 틈새로 스며 나오는 기운.
그것은 칠흑보다 더 짙고 불길한 암흑의 파동이었다.
고대 마교 천마의 유골이 품고 있던 원념과, 5세대 암흑물질 바이오 코어가 결합하여 뿜어내는 절대의 악의.
진혁의 차가운 흑안이 칠흑 같은 빛을 발하며 번뜩였다.
그의 귓가에, 공간을 찢고 올라오는 기괴한 텔레파시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오너라, 나의 완벽한 그릇이여…….'
진무극.
놈이 마침내 오리진 수트와의 신경 융합 시술을 시작한 것이다.
신서울 전체의 전력과 생명력을 제물로 삼아, 가짜 천마가 아닌 진정한 마신(魔神)으로 거듭나기 위한 금단의 의식이 발동되었다.
쩌저적!
진혁의 발밑, 지하 30층 프로토콜 제로 룸으로 이어지는 대형 비상 수직 통로의 강화 강철 해치가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뒤틀려 튕겨 나갔다.
그 어두운 심연의 입구에서, 보랏빛과 검은빛이 어지럽게 뒤엉킨 섬뜩한 마기의 광배(光背)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진혁은 붉은 피와 그을음이 묻은 도포 자락을 휘날리며 허리춤의 검자루를 천천히 감싸 쥐었다.
4단계 마신경(魔神境)의 단전에서 폭발적으로 뿜어져 나온 순수한 흑색 마기가 그의 전신을 휘감으며, 웅장하고 거대한 흑마갑(黑魔甲)의 형상을 빚어냈다.
"기다려라, 진무극."
진혁의 입꼬리가 차갑고 서늘하게 비틀려 올라갔다.
"네놈이 만든 그 지옥 속에서, 진짜 천마가 누구인지 똑똑히 새겨 줄 테니."
쾅!
대지를 거칠게 박찬 진혁의 신형이, 어둠이 아가리를 벌리고 있는 지하 30층의 칠흑 같은 심연 속으로 거침없이 낙하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