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장 빗나간 시계바늘
산서성의 밤바람은 칼날보다 날카롭게 피부를 파고들었다. 청운문의 낡은 산문을 나서는 한소운의 발걸음 위로 삭풍이 휘몰아쳤다. 뼛속까지 시린 한기는 단순히 계절의 변화 때문이 아니었다. 단전 깊은 곳에서부터 치밀어 오르는 싸늘한 기운, 그것은 사맥체의 저주를 억지로 누르고 역맥 수련을 거듭해 온 육체가 비명을 지르며 보내는 경고였다.
소운은 잠시 멈춰 서서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눈앞에 투명한 장부의 환영이 떠올랐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도 그 글자들만은 핏빛으로 번뜩이며 소운의 망막을 자극했다.
【 현재 부채: 89 / 100 】
숫자는 결코 거짓을 말하지 않는다. 임계점인 100까지 남은 수치는 고작 11. 이 위태로운 잔액은 소운의 목을 죄는 올가미와 같았다. 여기서 조금이라도 더 인과를 비틀거나, 혹은 사소한 변덕으로 예정된 미래를 바꾸려 든다면 장부는 가차 없이 추심의 칼날을 내리꽂을 것이다. 그것은 곧 죽음이자, 소운이 지키고자 했던 모든 것의 파멸을 의미했다.
“소운아, 또 도진 것이냐?”
옆에서 나란히 걷던 진무겸이 소운의 어깨를 묵직하게 짚었다. 거친 대사형의 손바닥을 통해 뜨겁고 투박한 내력이 전해져 왔다. 공동 장부로 운명이 묶인 덕분에 소운이 짊어진 부채의 무게는 무겸과 서린에게도 일부 분산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몸이라고 평안할 리 없었다. 무겸의 입가에는 미처 닦아내지 못한 핏자국이 희미하게 남아 있었고, 평소 서늘한 기운을 내뿜던 백서린의 호흡 역시 미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괜찮습니다. 조금만 더 가면 됩니다. 이 정도 통증은 이미 익숙하니까요.”
소운이 이를 악물며 대답했다. 그는 시선을 멀리 던졌다. 장부의 공덕 열람 기능을 통해 읽어낸 기척은 섬뜩할 정도로 정확했다. 칠흑 같은 어둠에 잠긴 산서성 외곽, 버려진 지 오래되어 무너져가는 낡은 폐주막이 보였다. 그곳에서 흘러나오는 탁한 살기와 비릿한 피 냄새가 밤바람을 타고 소운의 코끝을 자극했다.
혈월교의 선봉대, 그리고 그들의 그림자에 숨어 기회를 엿보는 흑련회의 잔당들.
원래의 역사대로라면 이들은 5년이라는 세월이 흐른 뒤에야 본색을 드러냈어야 했다. 그때 그들은 청운문을 하룻밤 사이에 잿더미로 만들고, 제자들의 목을 베어 산문에 걸어두었을 것이다. 하지만 소운이 회귀하여 미래를 비틀었다. 남궁가의 음모를 분쇄하고, 천맹의 심판정에서 판을 뒤흔든 결과 역사의 시계바늘은 광기 어린 속도로 미쳐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들의 습격이 예상보다 훨씬 빨라졌다. 아직 곽노가 있는 노아산으로 향해 역맥 수련의 마지막 조각을 맞추기도 전에, 적들이 먼저 칼을 뽑아 든 것이다.
“저 안이로군. 쥐새끼들의 소굴이.”
백서린이 허리에 찬 검의 자루를 고쳐 잡으며 낮게 읊조렸다. 그녀의 눈빛은 더 이상 열다섯 살 소녀의 것이 아니었다. 멸문의 참상을 미리 보았고, 자신의 비극적인 미래를 온몸으로 받아들인 자만이 가질 수 있는 단단하고도 서늘한 각오가 그 안에 서려 있었다.
“그렇습니다. 놈들도 우리가 이 밤중에 선수를 치러 올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을 겁니다. 아니, 우리가 겁에 질려 문파 방어 시설이나 점검하며 떨고 있을 거라 자만하고 있겠지요.”
소운이 차갑게 입꼬리를 올렸다. 그의 눈에는 이미 주막 안에서 숨을 죽이고 있는 적들의 위치가 점으로 찍혀 보이고 있었다.
“선수를 칩니다. 저들을 베어 넘겨 공덕을 쌓아야만 이 지긋지긋한 부채를 줄일 수 있습니다. 그래야 노아산까지 갈 여력이 생깁니다.”
“좋다. 복잡하게 머리 굴릴 것 있겠느냐. 앞을 가로막는 것들은 모조리 베어 발치에 쌓아두면 그만이지.”
무겸이 검집을 탁 치며 앞장섰다. 세 사람은 기세를 죽이고 발소리를 지운 채 폐주막으로 육박했다. 사방은 기괴할 정도로 고요했다. 들리는 것이라고는 밤을 지키는 귀뚜라미의 울음소리와, 서로의 고동 소리뿐이었다.
주막의 낡은 문틈 사이로 희미한 등불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그 누런 빛무리 속에서 저급한 사파 무공의 탁한 기운이 마치 뱀처럼 꿈틀거리고 있었다.
카득!
소운이 짧게 손짓을 보내자, 무겸이 망설임 없이 발을 뻗었다. 벼락같은 발길질에 낡은 나무 문이 비명을 지르며 박살 났다. 부서진 파편들이 안으로 비산하며 정적을 깼다.
“누구냐!”
주막 안에서 술잔을 기울이며 작당 모의를 하던 사파 살수들이 경악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검광이 번뜩이고, 서슬 퍼런 살기가 순식간에 좁은 주막 내부를 가득 채웠다. 하지만 소운 일행의 움직임은 그들의 반응보다 한 박자 더 빨랐다.
“간다!”
소운이 먼저 그림자처럼 치고 나갔다. 사맥체를 역으로 뒤틀어 얻어낸 폭발적인 순발력이 단전을 박차고 사지로 뻗어 나갔다. 화려한 초식 따위는 없었다. 오직 상대의 허점을 도려내고, 가장 빠르고 확실하게 목숨을 끊는 무자비한 실전 살법뿐이었다.
퍼벅!
첫 번째로 칼을 뽑으려던 흑련회 살수의 목줄기에 소운의 검지 손가락이 깊숙이 박혀들었다. 내력이 응집된 지오의 일격이었다. 살수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눈을 부릅뜨고 그대로 고꾸라졌다.
【 적대 세력 제거: 흑련회 살수 1명 】
【 공덕 +3 획득 】
장부의 알림이 뇌리를 스쳤다. 하지만 소운은 멈추지 않았다.
“이 쥐새끼 같은 놈들이 감히 어디라고 기어 들어와!”
혈월교의 복장을 한 거구의 살수가 흉악한 도를 휘두르며 무겸을 향해 덮쳐왔다. 묵직한 도풍이 주변의 탁자들을 박살 내며 무서운 기세로 몰아쳤다. 그러나 무겸은 한 치의 물러섬도 없었다.
“삼류 찌꺼기들이 입만 살았구나!”
무겸의 검에서 청운검법의 정수가 터져 나왔다. 과거 멸문의 밤, 가장 먼저 비참하게 죽어갔던 무력한 대사형은 이제 없었다. 소운과 함께 역맥의 고통을 나누며 단련된 그의 검은 이제 바람을 가르는 청량한 검강을 머금고 있었다.
챙강!
도와 검이 부딪히며 사방으로 불꽃이 튀었다. 거구의 살수가 엄청난 충격에 도를 놓치며 뒤로 주춤거렸다. 그 찰나의 틈을 백서린이 놓칠 리 없었다. 어둠 속에서 소리 없이 날아간 비도가 정확히 살수의 목덜미를 꿰뚫었다.
싸움은 처절했으나 순식간에 끝이 났다. 세 사람이 펼치는 연계는 마치 하나의 몸처럼 유기적이었고, 웬만한 중소 문파의 정예 제자들을 압도하는 잔인함을 품고 있었다. 주막 안은 순식간에 역한 피비린내로 진동했고, 바닥에는 시체들이 겹겹이 쌓였다.
소운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자신의 손에 묻은 피를 내려다보았다. 몸 안의 부채 수치가 변동되는 것을 느끼며 정신을 집중했다.
【 적대 세력 섬멸 및 미래의 위협 요소 제거 인과 보정 】
【 공덕 총합 +8 획득 】
【 부채가 일부 청산됩니다. 】
【 현재 부채: 81 / 100 】
“후우…….”
소운의 입에서 뜨거운 안숨이 새어 나왔다. 89까지 치솟아 당장이라도 터질 것 같던 부채가 81로 떨어졌다. 상한선까지 약간의 여유가 생겼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안도하기엔 일렀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잔당들을 처치해 얻은 임시방편에 불과했다. 흑련회와 혈월교가 본격적으로 산서성을 집어삼키기 위해 보낼 진짜 본대는 아직 움직이지도 않았다. 아니, 어쩌면 그들이 움직이는 속도가 빨라진 만큼, 소운이 알지 못하는 더 거대한 재앙이 수면 아래에서 다가오고 있을지도 몰랐다.
“소운아, 이 자식들의 복장을 좀 봐라. 이상한 문양이 새겨져 있다.”
무겸이 시체 한 구의 가슴팍을 들추며 인상을 찌푸렸다. 시체의 가슴에는 핏빛 달 모양의 자수와 함께, 기괴한 눈동자 모양의 낙인이 찍혀 있었다. 그것은 단순한 문신이 아니었다. 보는 것만으로도 정신이 아득해지는 사악한 기운이 서려 있었다.
“탈명록…….”
소운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천명장부와 대척점에 서 있는 또 다른 시스템. 타인의 공덕을 강탈하여 자신의 힘으로 삼는다는 사악한 장부. 그것을 손에 넣은 자가 혈월교의 배후에서 이 모든 판을 뒤흔들고 있었다.
“사마령.”
소운의 입에서 혈월교 소교주의 이름이 낮게 뇌까려졌다. 원래 역사 속에서 그는 그저 이름 있는 마교의 고수 중 하나였을 뿐이다. 그러나 장부를 얻은 이후, 소운은 깨달았다. 그 역시 자신과 같은 ‘기여자’ 혹은 ‘탈취자’라는 사실을.
“소운아, 사마령이라니? 그게 누구인데 그렇게 안색이 안 좋은 거야?”
서린이 다가와 소운을 살피며 물었다. 그녀의 뺨에도 붉은 핏방울이 튀어 있었으나, 눈빛만큼은 흔들림 없이 맑았다. 소운은 잠시 망설이다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혈월교의 진짜 수뇌이자, 나와 같은…… 아니, 나와는 정반대의 길을 걷는 자입니다. 그 자 역시 장부와 비슷한 힘을 손에 넣었습니다. 우리가 미래를 바꾸려 할 때마다, 그 자 역시 자신의 이득을 위해 세상을 비틀겠지요. 이제부터는 단순히 사람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 뒤틀린 인과 그 자체와 싸워야 할 겁니다.”
무겸과 서린은 잠시 말을 잃고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저 쓰러져가는 문파를 일으키고 싶었던 평범한 제자들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들 앞에 놓인 숙명은 하늘의 이치 자체를 뒤흔드는 거대한 괴물들과 맞서는 일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의 눈에는 두려움보다 더 강한 신뢰가 깃들었다. 무겸이 소운의 어깨를 툭 치며 호탕하게 웃었다.
“하! 그래? 그럼 더 잘됐군. 마침 평범한 놈들이랑 싸우는 건 질리던 참이었다. 하늘의 장부를 쥔 놈들이라면 내 검맛도 좀 남다르게 느끼지 않겠느냐.”
“대사형 말이 맞아. 이제 와서 도망칠 곳도 없고, 도망치고 싶지도 않아.”
서린 역시 검에 묻은 피를 털어내며 단호하게 말했다.
“우리는 함께 빚을 갚기로 했잖아. 그 사마령이라는 자가 무엇을 가졌든, 우리 앞을 막아서면 베어버리면 그만이야. 안 그래?”
동료들의 흔들림 없는 눈빛이 소운의 차가운 단전을 따스하게 데웠다. 혼자였다면 벌써 몇 번이고 무너지고 미쳐버렸을 지옥 같은 회귀의 삶이었다. 하지만 이 무거운 짐을 나누어 짊어질 이들이 곁에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큰 구원인지, 소운은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고맙습니다. 여기서 지체할 수 없습니다. 흑련회 잔당들이 이 정도라면 본대의 움직임은 더욱 거세질 겁니다. 당장 노아산으로 가서 곽노 사부님을 뵙고 역맥 수련을 끝마쳐야 합니다.”
“가자, 노아산으로!”
세 사람은 더 이상 주저하지 않고 주막을 나섰다. 밤은 깊었지만, 그들의 등 뒤로 어둠을 찢고 떠오르는 새벽녘의 여명은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미래는 이미 바뀌기 시작했다. 원래라면 멸문당해 사라졌어야 할 청운문은 살아남았고, 비극으로 점철되었어야 할 운명은 이들의 손에 의해 새로운 길을 개척하고 있었다.
천명장부의 숫자가 마지막으로 부드럽게 깜빡였다.
【 현재 부채: 81 / 100 】
【 누적 공덕: 20 】
【 다음 청구 대기 중 — 노아산의 은거 고수에게서 진정한 역맥의 극의를 깨달으십시오. 】
낙양을 지나 산서성 북쪽 끝에 험준하게 솟아오른 노아산은 예로부터 짐승조차 발길을 멈춘다는 절경의 산이었다. 깎아지른 듯한 암봉들은 마치 날카로운 칼날처럼 하늘을 찌르고 있었고, 사방은 짙은 안개로 둘러싸여 한 치 앞도 분간하기 어려웠다. 산세가 워낙 험하고 기괴하여 정상 부근에 은거하는 이가 누구든 제정신일 리 없다는 것이 무겸의 투덜거림이었다.
“이런 산골짝 벼랑 끝에 처박혀 살다니, 곽노 그 노인네도 참 보통 성깔이 아니구먼. 이래서야 뼈마디가 남아나겠어?”
“입 조심하십시오, 대사형. 그분이 어떤 분인지 잊으신 겁니까.”
서린이 앞서 걷던 발걸음을 멈추며 무겸을 흘겨보았다. 과거 천맹의 전설적인 의원이자, 세상에서 소운의 사맥체를 치료할 유일한 실마리를 쥔 괴인. 비록 성격은 괴팍하고 종잡을 수 없으나, 그들의 운명을 바꿀 열쇠를 쥔 인물이었다.
소운은 묵묵히 앞만 보고 걸었다. 머릿속의 장부는 여전히 묵직한 경고음을 울리며 압박감을 가해왔다.
【 현재 부채: 81 / 100 】
【 남은 시간: 145일 】
노아산의 초입에 들어서자마자 기이한 압박감이 소운의 어깨를 짓눌렀다. 평범한 무인이라면 감지조차 할 수 없는 미세한 기의 파장이 사방의 바위와 뒤틀린 나무 틈새에서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역맥 수련.
일반적인 경맥을 열어 기를 채우는 통맥과는 근본부터 달랐다. 이미 뒤틀리고 막혀버린 사맥체의 혈도를 억지로 역방향으로 뚫어 폭발적인 내력을 이끌어내는 극한의 수법. 그 마지막 단계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이 산 전체가 품고 있는 살벌한 기운을 온몸으로 받아내며 동화되어야 했다.
“왔느냐, 이 맹랑한 꼬마 녀석들아.”
짙은 안개 너머에서 걸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수십 년간 세상의 발길이 닿지 않은 암봉 끝, 가느다란 나뭇가지 위에 낡은 베옷을 걸친 백발의 노인이 거꾸로 매달려 있었다. 곽노였다. 그의 눈빛은 먹잇감을 노리는 매처럼 예리하게 빛났고, 그 늙은 몸에서는 믿기지 않을 정도의 거대한 기감이 주변을 압도하며 뿜어져 나왔다.
“사부님, 소운이 뵙습니다.”
소운이 정중히 포권하여 예를 갖췄다. 무겸과 서린 역시 그 위압감에 눌려 고개를 숙였다. 곽노는 물구나무를 선 기괴한 자세 그대로 소운을 빤히 훑어보더니, 쯧 하고 혀를 찼다.
“쳇, 낯짝 꼴이 아주 가관이구나. 낙양에서 무슨 미친 짓거리라도 벌이고 온 게냐? 꼴을 보니 부채니 뭐니 하는 그 기괴한 짐덩어리가 아주 목구멍까지 차올랐어.”
소운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떨렸다. 곽노는 과거 자신처럼 장부를 쥐었다가 결국 실패했던 회귀자였다. 그가 소운의 상태를 단번에 알아차리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알고 계셨군요.”
“모를 리가 있나. 하늘에 진 빚은 이자가 무서운 법이지. 갚으려고 들면 들수록 더 깊은 수렁으로 밀어 넣는 그런 더러운 장부 아니더냐.”
곽노가 가볍게 몸을 뒤집으며 바닥에 착지했다. 그의 발소리는 낙엽 한 장 밟히는 소리조차 나지 않을 정도로 정숙했다. 노인이 성큼 다가와 소운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
척!
순간, 소운의 단전에서 맹렬한 반발력이 튀어나왔다. 역맥 수련의 부작용으로 엉망이 된 기운이 곽노의 이질적인 내력에 반응해 폭발하려 한 것이다.
“크윽……!”
소운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리며 식은땀이 비 오듯 흘렀다. 전신의 혈관이 터져나갈 듯한 고통에 무릎을 꿇으려 했으나, 곽노는 코웃음을 치며 자신의 손바닥에 모인 강대한 내력을 소운의 혈도로 밀어 넣었다.
“가만히 있어라! 네놈 혼자 다 짊어지겠다고 아등바등하니까 속이 썩어 문드러지는 것 아니냐. 다행히 이 녀석들과 공동 장부로 묶여서 기가 분산된 덕분에 단전이 박살 나지 않고 버틴 게야. 천운인 줄 알아라.”
곽노의 내력이 소운의 경맥을 타고 구석구석 흐르자, 온몸을 찢어발기는 것 같던 통증이 거짓말처럼 가라앉았다. 무겸과 서린이 걱정 가득한 표정으로 물었다.
“어르신, 소운이의 몸 상태가 대체 어떻습니까? 더 이상 수련을 계속하는 건 무리가 아닙니까?”
“위험하냐고? 당연히 위험하지! 여기서 한 걸음만 더 잘못 디디면 주화입마에 빠져 온몸의 구멍에서 피를 토하고 죽을 거다.”
곽노는 퉁명스럽게 내뱉고는 손을 거두었다. 그러더니 씩 웃으며 품 안에서 꼬깃꼬깃하게 접힌 종이 한 장을 꺼내 던졌다.
“하지만 방법이 아예 없는 건 아니지. 역맥의 극의는 막힌 것을 억지로 뚫는 게 아니거든. 막힌 채로 흐르게 만드는 것이다. 그 엿같은 장부의 빚도 마찬가지야. 갚으려고 애쓰지 말고, 빚 자체를 네놈의 내력으로 소화해 버려라!”
소운은 바닥에 떨어진 종이를 조심스럽게 집어 들었다. 그 위에는 난해하기 짝이 없는 검보와 함께, 혈도의 흐름을 기괴하게 뒤틀어 놓은 도안이 그려져 있었다.
【 역맥검법(逆脈劍法)의 최종 경지 개방 】
【 장부의 부채를 내공의 자양분으로 전환하는 수법을 습득합니다. 】
머릿속에서 장부의 차가운 글귀가 반짝였다. 소운의 눈빛이 깊어졌다. 빚을 갚기 위해 발버둥 치는 것이 아니라, 빚이라는 거대한 부채 그 자체를 자신의 검강을 이루는 힘으로 바꾼다. 그것은 장부의 규칙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동시에, 장부의 힘을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유일한 길이었다.
“이해하겠느냐? 빚쟁이 녀석아.”
곽노가 물었다. 소운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해보겠습니다.”
“좋다! 오늘부터 이 노아산 꼭대기에서 나를 이기지 못하면 단 한 발짝도 내려가지 못할 줄 알아라!”
곽노가 호탕하게 웃으며 허리춤에서 묵직한 목검을 뽑아 들었다. 동시에 노아산의 정상을 휘감는 바람이 거세졌고, 산서성의 험준한 능선 위로 칠흑 같은 먹구름이 밀려들기 시작했다.
5년 뒤 찾아올 멸문의 밤. 그리고 그 뒤에서 칼을 갈고 있는 사마령과 혈월교의 정예들. 시간은 그들을 기다려주지 않았다.
소운은 검을 뽑아 들고 세찬 바람 속에서 자세를 잡았다. 공동 장부로 연결된 무겸과 서린 역시 그의 등 뒤에 서서 각자의 검을 빼어 들었다. 그들의 기세가 하나로 합쳐지며 안개를 밀어냈다.
하늘에 진 빚은 피할 수 없다면, 검으로 그 인과를 베어내면 그만이었다. 소년의 검광이 칠흑 같은 노아산의 안개를 찢으며 눈부시게 피어올랐다.
빚을 갚기 위한, 아니 세상을 바꾸기 위한 진짜 투쟁은 이제부터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