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장 탈명록(奪命錄)의 그림자
마차 바퀴가 산서성의 험준한 산세를 따라 덜컹이며 구르, 청운문의 낡은 산문이 멀리서 윤곽을 드러냈다. 하지만 산문을 마주한 한소운의 눈빛은 긴장을 풀지 못했다. 낙양에서 천맹의 심판정을 뒤흔들고 남궁휘를 몰락시켰음에도, 가슴 한구석을 짓누르는 불안감은 가시지 않았다.
'남궁휘 하나를 무너뜨렸다고 끝이 아니다. 흑련회와 혈월교가 가만히 있을 리 없어.'
마차가 멈춰 서자마자 소운은 바닥으로 뛰어내렸다. 진무겸과 백서린 역시 뒤를 따랐다. 세 사람의 기운은 이미 예전의 삼류 무인들과는 달랐다. 역맥 수련으로 억지로 뚫은 경맥은 거칠게 요동쳤지만, 그 안에는 화경을 향해 나아가는 날카로운 검의 의도가 담겨 있었다.
도현이 마차에서 내리며 제자들을 둘러보았다.
"산문은 봉쇄했지만, 마음을 놓을 때는 아니다. 모두 각자의 자리로 돌아가 수련을 재개해라."
"장문인 사부님, 잠깐만요."
소운이 사방을 둘러보며 손을 들어 제지했다. 밤바람이 불어오며 숲속에서 스산한 나뭇잎 스치는 소리가 들렸다. 평소라면 밤의 적막이겠으나, 소운의 예민해진 역맥의 감각은 그 속에 숨겨진 불길한 기척을 놓치지 않았다.
【 부채 64 / 100 】
【 경고: 인과율의 왜곡이 극에 달했습니다. 예기치 않은 존재가 접근합니다. 】
장부의 글자가 붉게 떨렸다. 소운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물러서라! 온다!"
소운의 외침이 채 끝나기도 전에, 청운문의 낡은 산문 위로 어두운 그림자 하나가 가랑잎처럼 내려앉았다.
툭.
소리의 기척조차 없는 착지였다. 달빛이 구름에 가려 어두워진 순간, 산문 지붕 위에 선 자의 모습이 어렴풋이 드러났다. 검은 로브를 깊게 뒤집어쓴 채, 얼굴에는 기괴한 문양이 새겨진 하얀 가면을 쓴 사내.
그의 손에는 낯익은 붉은 표지의 책 한 권이 들려 있었다.
천명장부와는 결이 다른, 핏빛으로 번들거리는 사악한 기운을 뿜어내는 물건.
탈명록(奪命錄).
"설마……."
무겸이 검집에 손을 올리며 이빨을 갈았다. 서린 역시 검을 반쯤 뽑아들며 경계 태세를 갖추었다.
가면을 쓴 사내가 낮고 쉰 목소리로 웃었다.
"키득키득…… 한소운. 네놈 덕분에 남양의 판도가 재미있어졌더군. 남궁휘 같은 송장 같은 놈 하나 치웠다고 세상이 네 손에 들어온 줄 알았나?"
소운은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저 목소리, 저 기운. 낙양 성문 앞에서 마주쳤던 탈명록의 지배자였다.
"네 놈은 누구냐. 혈월교의 수뇌부인가?"
소운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물었다. 그의 단전에서 역맥의 내력이 거칠게 끓어올랐다. 공동 장부로 연결된 무겸과 서린의 기운 역시 소운의 호흡에 맞춰 하나로 묶였다.
가면의 사내가 비웃듯 탈명록을 펼쳐 들었다.
"이름 따위가 무슨 의미가 있겠나. 나는 하늘이 버린 인과를 거두어들이는 자일뿐. 너희들이 미래를 바꿀 때마다 쌓이는 부채가 어디로 가는지 아느냐? 네놈이 짊어진 그 빚의 일부는, 바로 이곳에 고스란히 기록된다."
사내의 손가락이 탈명록의 붉은 장부를 짚었다.
순간, 소운의 눈앞이 아득해지며 온몸의 경맥이 찢어지는 듯한 극심한 통증이 밀려왔다.
쿠구구구궁—!
【 경고: 탈명록의 간섭으로 부채가 강제로 가중됩니다! 】
【 현재 부채: 64 → 89 / 100 】
"크윽……!"
소운이 피를 토하며 무릎을 꿇었다. 공동 장부로 연결되어 있던 무겸과 서린 역시 동시에 피를 토하며 비틀거렸다.
"소운아!"
"이 자식…… 내력이 안에서부터 타오른다……!"
서린이 이를 악물며 검을 겨누었다. 가면의 사내는 그들의 고통을 즐기듯 가면 너머의 눈동자를 가늘게 접었다.
"너희는 모른다. 천명장부가 너희에게 준 것은 은혜가 아니라 거대한 빚더미일 뿐이다. 미래를 바꿀수록 하늘은 너희에게 이자를 청구하지. 그리고 나는 그 빚을 회수하러 온 집행자다."
사내가 손을 가볍게 휘둘렀다.
그러자 사방의 어둠 속에서 수십 명의 핏빛 검을 든 살수들이 일제히 튀어나왔다. 혈월교의 정예 선봉대였다. 원래 역사라면 5년 뒤에나 나타났어야 할 최정예들이, 소운이 미래를 너무 많이 비틀어버린 탓에 지금 이 순간 청운문 앞마당으로 들이닥친 것이다.
"막아라!"
무겸이 대사형으로서의 기개를 발휘하며 검을 뽑아 들었다. 역맥 수련으로 단련된 그의 검강이 허공을 가르며 첫 번째로 달려들던 살수의 목을 베어버렸다.
지옥 같은 혼전이 시작됐다.
청운문의 제자들이 놀라 기어나왔지만, 혈월교 살수들의 살인 기교는 삼류 무인들이 상대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도륙이 시작되려던 그 순간, 백도현이 장검을 뽑아 들며 앞으로 나섰다. 평소의 온화한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과거 천맹의 암부에서 활약했던 '흑검귀'의 살기가 전신을 감쌌다.
"내 제자들에게 손대지 마라."
파학!
도현의 검광이 달빛을 가르며 살수들의 대형을 단숨에 반으로 갈라놓았다. 장문인의 가세로 청운문 제자들이 버텨내기 시작했다.
하지만 진짜 위협은 지붕 위에 앉아 있는 가면의 사내였다.
사내는 탈명록을 덮으며 차갑게 말했다.
"발버둥 쳐봐야 소용없다. 너희가 짊어진 빚은 이미 상한선을 향해 달리고 있으니까."
사내가 손가락을 튕기자, 공간이 일그러지는 듯한 기이한 압박감이 소운의 머리를 내리쳤다. 탈명록의 고유 권능. 상대의 공덕을 빼앗고 부채를 폭발시키는 술법이었다.
"크하하……!"
소운은 머리가 깨질 듯한 통증 속에서 정신을 차리려 애썼다.
'안 돼. 여기서 밀리면 모든 게 끝난다. 곽노 사부님이 가르쳐 준 역맥의 운용법을 떠올려라. 빚을 피할 수 없다면, 기꺼이 짊어지고 부서뜨려라!'
소운이 피투성이가 된 얼굴로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의 눈동자에 서늘한 살기가 번뜩였다.
"네놈이 탈명록이든 뭐든 상관없어."
소운이 바닥을 박차고 일어났다. 역맥으로 곤두박질치던 내력이 오히려 단전의 벽을 사정없이 두드리며 화경을 향한 균열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 공동 장부의 동기화율이 100%를 돌파합니다. 】
【 공덕 10을 소모하여 '인과 역전'을 준비합니다. 】
"무겸이형! 서린아!"
소운의 외침에 무겸과 서린이 동시에 적을 베어내며 소운의 곁으로 모여들었다. 세 사람의 기운이 하나로 합쳐지며 거대한 검강의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가면의 사내가 처음으로 당황한 듯 가면 너머의 시선을 흔들었다.
"뭐지……? 빚을 짊어지고도 그 기운이 꺾이지 않는단 말인가?"
"우리가 진 빚은 우리가 갚는다."
소운이 검을 치켜세웠다.
"그리고 너 같은 도둑놈에게 우리 미래를 뺏길 일은 없어!"
세 사람의 검이 동시에 빛을 발하며 지붕 위를 향해 날아갔다. 역맥검법의 진수, 빚을 검강으로 치환하여 상대를 베어버리는 절명(絶命)의 일격.
콰아아앙—!
거대한 폭음과 함께 청운문의 산문 지붕이 박살 나며 사방으로 파편이 튀었다. 가면의 사내가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뒤로 물러서며 피를 토했다.
"크윽…… 이 자식들이……!"
"물러가라!"
소운의 검끝이 사내의 목전에 멈춰 섰다. 비록 부채는 89까지 치솟았고 온몸의 경맥이 타들어 가는 듯한 고통이 밀려왔지만, 세 사람의 눈빛은 단 한 치도 흔들리지 않았다.
가면의 사내는 더 이상 싸울 승산이 없음을 직감한 듯,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어둠 속으로 몸을 던졌다.
"기억해라, 한소운. 너희가 바꾼 미래의 끝에는 더 거대한 파국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탈명록은 언제든 다시 너희의 빚을 수하러 올 테니까."
사내의 잔영이 사라지자마자, 청운문 앞마당은 언제 그랬냐듯 적막에 휩싸였다.
살수들은 도망치거나 쓰러졌고, 청운문의 제자들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소운은 검을 땅에 짚은 채 그대로 무릎을 꿇었다.
【 부채 89 / 100 】
【 경고: 추심의 한계가 다가옵니다. 남은 시간과 부채를 관리하십시오. 】
무겸과 서린이 달려와 소운의 양옆을 부축했다.
"소운아! 괜찮냐?"
소운은 입술에 묻은 피를 닦아내며 엷은 미소를 지었다. 호흡은 가빴지만, 그의 눈빛은 오히려 더욱 선명하게 빛나고 있었다.
"……살았어요. 그리고, 저놈들이 우리를 두려워하기 시작했습니다."
도현이 다가와 제자들의 어깨를 말없이 두드려주었다. 먼동이 트기 시작하는 산서성의 하늘 위로, 핏빛 같은 새벽 햇살이 청운문을 비추고 있었다. 운명의 바퀴는 더 빠르게 돌고 있었지만, 소년은 더 이상 혼자가 아니었다.
도현의 거친 손길이 제자들의 어깨를 감싸 쥐었다. 그간 온화한 장문인으로서 문도를 이끌어왔던 그의 손바닥에는, 과거 암부 시절 익혔던 굳은살이 단단하게 배어 있었다. 도현의 시선이 박살 난 산문 지붕과 널브러진 혈월교 살수들의 시체를 번갈아 향했다.
"문파의 피해는 크지 않다. 제자들 중 중상은 있으나 사망자는 없다. 너희들이 선두에서 기세를 꺾어준 덕분이다."
"안심하기엔 이릅니다."
소운이 숨을 가쁘게 몰아쉬며 고개를 저었다. 그의 단전에서는 여전히 역맥으로 억지로 뚫은 내력이 불길처럼 치솟고 있었다.
【 부채 89 / 100 】
【 경고: 탈명록과의 충돌로 인한 인과 왜곡이 심각합니다. 상한선까지 단 11 남았습니다. 】
시야 구석에 붉은색으로 깜빡이는 숫자는 그야말로 목을 조르는 시한폭탄과 같았다. 가면의 사내가 남기고 간 경고는 허투루 들리지 않았다. 소운이 미래를 바꿀 때마다, 그리고 그들의 목을 옥죄는 적들을 물리칠 때마다 하늘이 청구하는 이자는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었다.
무겸이 서린의 부축을 받으며 일어섰다. 그의 얼굴은 땀과 흙투성이였지만, 손에 쥔 검은 단단하게 고정되어 있었다.
"탈명록이라…… 놈들도 우리처럼 장부를 쥐고 있는 건가?"
"그렇습니다."
소운이 이를 악물며 일어섰다.
"우리의 천명장부가 빚을 짊어지고 미래를 바로잡으려 한다면, 저들의 탈명록은 남의 공덕을 빼앗아 힘을 불리는 방식이겠죠. 애초에 뿌리가 다른 시스템입니다. 저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건, 이제부터는 진짜 전쟁이라는 뜻입니다."
서린이 검을 검집에 꽂으며 차갑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다면 멍하니 기다릴 수 없어요. 낙양에서 남궁휘를 무너뜨리고 흑련회의 밀약을 부쉈으니, 저들도 더 이상 숨지 않을 겁니다. 다음에는 더 거대한 대군이 몰려오겠지요."
"맞습니다."
도현이 제자들의 결연한 눈빛을 바라보며 깊은숨을 내쉬었다. 삼류 문파의 장문인으로서 제자들을 평범하게 키워내고 싶었던 그의 바람은 이미 산산조각 난 지 오래였다. 하지만 지금 제자들의 등 뒤에서 느껴지는 기운은 웬만한 명문대파의 장로들보다 훨씬 더 묵직하고 단단했다.
도현이 목소리를 가다듬고 명령을 내렸다.
"당장 산문을 수리하고 방어 태세를 정비한다. 부상자들을 치료하고, 곽노 사부님이 계신 노아산으로 향할 준비를 해라."
"알겠습니다!"
청운문의 제자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과거 5년 뒤 하룻밤 사이에 불타오르며 비참하게 짓밟혔던 그날의 멸문지화는, 이제 이들의 손으로 완전히 다른 역사가 되어 가고 있었다.
하지만 소운의 마음은 무거웠다.
'부채 89. 이 상태로 노아산에 가서 역맥 수련의 마지막 단계를 거치면, 상한선인 100을 넘을지도 모른다.'
상한을 넘는다는 것은 곧 '추심'의 폭발을 의미했다. 혼자라면 버텨낼 수 있을지 몰라도, 공동 장부로 묶인 무겸과 서린까지 함께 붕괴할 위험이 있었다.
'방법을 찾아야 한다. 빚을 갚으려면…… 공덕을 쌓아야 해.'
소운은 눈을 감고 장부의 남은 기능을 살폈다.
【 현재 공덕: 12 】
【 장부 정보 열람 가능: 주변 십 리 내의 위협 요소 및 인물의 업보 수치 확인 】
그 순간, 소운의 머릿속으로 미세한 파장이 밀려왔다. 청운문을 둘러싼 산서성의 험준한 산세 너머, 거미줄처럼 얽혀 있는 인과의 실타래가 눈앞에 펼쳐지는 듯했다.
산문 밖의 어둠 속에서, 아직 완전히 물러가지 않은 흑련회의 잔당들과 혈월교의 밀정들이 은밀하게 움직이는 기척이 손바닥 보듯 읽혀졌다.
소운의 입꼬리가 차갑게 말려 올라갔다.
"숨어 있어 봤자 소용없어."
소운이 무겸과 서린을 돌아보았다. 두 사람 역시 소운의 눈빛을 읽고 나지막이 검에 손을 올렸다.
"소운아, 뭘 잡을 생각이지?"
"저기 숨어 있는 쥐새끼들입니다."
소운이 산문 저 너머의 어두운 숲을 가리키며 말했다.
"우리가 가만히 기다리면 저들이 먼저 찾아오겠지만, 먼저 쳐서 인과의 균형을 맞추고 공덕을 쌓는다면 부채를 줄일 수 있습니다. 곽노 사부님을 만나러 가기 전에, 청운문 주변을 완전히 깨끗이 청소해야 합니다."
"좋다. 네 생각대로 해라."
무겸이 거칠게 웃으며 검병을 잡았다. 서린 역시 가방에서 약초와 비도를 점검하며 차분하게 기운을 가라앉혔다.
삼인 공동 장부의 파장이 다시 한번 세 사람의 단전을 묵직하게 연결했다.
부채의 무게는 여전히 어깨를 짓누르고 있었지만, 그 무게를 함께 나누어 짊어지 뼈저린 연대가 있는 한, 두려울 것은 없었다.
소년은 검을 빼 들고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산서성의 숲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천명장부의 숫자가 미세하게 떨렸다.
【 부채 89 / 100 】
【 청구 대기 중 — 다가오는 폭풍 속에서 운명을 개척하십시오. 】
운명의 시계바늘은 더욱 빠르게 회전하고 있었고, 그 중심에 선 소년의 검광은 칠흑 같은 어둠을 찢으며 매섭게 빛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