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장 산서 방어 준비
낙양의 밤은 죽음보다 깊은 침묵에 잠겨 있었다. 도성 외곽, 인적 끊긴 숲길 옆에 숨겨진 낡은 토굴 안에는 비릿한 피 냄새와 거친 숨소리만이 감돌았다. 흙벽 사이로 스며든 달빛조차 이곳의 참혹함을 차마 비추지 못하고 바닥에 흩어졌다.
진무겸은 상의를 거칠게 풀어헤친 채 벽에 몸을 기대고 있었다. 구릿빛 어깨 위로 깊게 파인 검상은 여전히 검붉은 피를 머금고 있었으나, 그를 괴롭히는 것은 육신의 상처가 아니었다. 천명장부의 공동 분산이 가져온 인과의 반동. 그것은 뼛속까지 시리게 만드는 냉기와 혈관을 타고 흐르는 불길이 동시에 전신을 뒤트는 듯한 고통이었다.
“크윽…….”
무겸이 이를 악물었지만, 잇새로 새어 나오는 신음은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옆에 앉아 있던 백서린이 떨리는 손으로 제 도포 자락을 찢었다. 그녀 역시 안색이 창백하게 질려 있었으나, 묵묵히 무겸의 상처 위로 지혈을 시도했다. 손가락 끝이 닿을 때마다 전해지는 미세한 경련이 그녀 또한 한계에 다다랐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한소운은 차가운 흙바닥에 대자로 누운 채 허공을 응시했다. 아니, 그의 시선은 시야 구석에서 기괴한 붉은 광채를 내뿜으며 명멸하는 글귀에 고정되어 있었다.
【 현재 부채: 76 / 100 】
【 누적 공덕: 13 】
【 남은 시간: 158일 】
“76이라…….”
소운의 목소리는 갈라진 논바닥처럼 푸석했다. 낙양을 뒤흔든 대가치고는 싸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이제 정말 끝이 보인다고 해야 할까. 오대세가 중 하나인 남궁세가의 차남, 남궁휘의 밀약을 폭로하고 화산파라는 거대한 산을 움직여 천맹 내부의 갈등을 촉발한 결과였다.
세상의 흐름이 거대할수록, 원래 정해진 역사의 궤적을 억지로 비틀어버린 대가는 독니를 드러낸 뱀처럼 소운의 목을 조여왔다.
“소운아.”
서린이 피와 먼지로 얼룩진 얼굴을 들어 소운을 불렀다. 그녀의 눈동자 속에는 공포보다는 서늘한 이채가 서려 있었다. 그것은 다가올 더 큰 폭풍을 예감한 무인의 눈빛이었다.
“낙양의 판은 확실히 부서졌어. 남궁가는 제 발등에 떨어진 불을 끄느라 당분간 외부로 눈을 돌릴 여력이 없을 거야. 천맹의 원로들도 남궁휘의 행보에 의구심을 품기 시작했겠지. 우리가 던진 돌이 거대한 파문을 일으킨 건 분명해.”
“그래요. 하지만 그 파문이 우리를 집어삼킬 해일이 되어 돌아올 겁니다.”
소운이 상체를 일으키려다 단전에서 치밀어 오르는 통증에 미간을 찌푸렸다. 곽노에게 전수받은 역맥 수련법으로 억지로 뚫어낸 단전은, 지금 이 순간에도 장부의 부채를 감당하기 위해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남궁휘는 뱀 같은 인간입니다. 자존심에 입은 상처는 독기로 변했을 것이고, 우리를 향한 살의는 이제 광기로 번졌을 겁니다. 게다가…….”
소운의 시선이 토굴 입구의 짙은 어둠 너머를 향했다.
“혈월교와 흑련회입니다. 우리가 미래의 시계바늘을 강제로 돌려놓은 만큼, 저들 또한 예정된 계획을 앞당길 수밖에 없습니다. 원래 역사대로라면 5년 뒤에나 벌어졌을 멸문의 참극이, 이제는 언제 닥쳐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 된 겁니다.”
무겸이 검을 지팡이 삼아 짚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비틀거리는 다리에 힘을 주자, 그의 얼굴에 죽어 있던 핏기가 서서히 돌아오기 시작했다. 공동 장부의 힘으로 고통과 생명력을 나누어 가진 덕분이었다.
“그럼 가만히 앉아서 저승사자를 기다릴 순 없겠군. 다음 수는 정했나?”
“청운문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낙양의 소문이 산서까지 퍼지는 건 순식간입니다. 지금부터 일 년, 아니 어쩌면 그보다 훨씬 짧은 시간 안에 그들은 산서를 향해 칼을 뽑을 겁니다. 청운문을 단순히 우리가 머무는 문파가 아니라, 누구도 함부로 넘보지 못할 철옹성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사흘 뒤, 산서성 외곽의 푸른 능선이 겹겹이 두른 산자락 아래.
평화롭다 못해 나태함마저 감돌던 삼류 문파, 청운문의 정적은 세 사람의 등장으로 산산이 조각났다. 산문을 지키던 하급 제자들과 잡역부들은 멀리서 걸어오는 세 그림자를 보고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장문인 백도현은 대청마루에 앉아 심각한 표정으로 밀봉된 서신을 읽고 있었다. 낙양에서 들려오는 흉흉한 소문들이 이미 그의 책상 위까지 닿아 있었다.
“돌아왔느냐.”
도현이 고개를 들었다. 눈앞에 선 세 제자의 몰골은 참혹했다. 비단옷은 갈가리 찢겨 누더기가 되었고, 몸 곳곳에 감긴 붕대 위로는 마른 핏자국이 겹겹이 층을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은 예전의 그것이 아니었다. 삼류 문파의 평범한 무인들이 가질 수 없는, 수많은 사선을 넘나든 자들만이 품는 묵직한 살기와 위압감이 대청마루를 가득 채웠다.
소운이 먼저 무릎을 꿇으며 포권했다.
“장문인 사부님, 제자 소운이 명을 받들어 돌아왔습니다.”
“서린아! 무겸아! 너희들 몸이 이게 무슨 꼴이냐!”
도현이 경악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달려 내려왔다. 그는 과거 천맹의 비밀 임무를 수행하던 고수였으나, 지금은 그저 제자들을 걱정하는 늙은 스승에 불과했다. 상처를 살피는 그의 손길이 사정없이 떨렸다.
서린이 도현의 거친 손을 맞잡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버지, 저희는 괜찮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상처를 돌볼 한가한 때가 아닙니다. 청운문을 당장 바꾸어야 합니다. 이대로라면 우린 모두 죽습니다.”
“바꾸다니? 그게 무슨 소리냐. 낙양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게야?”
무겸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그의 눈은 결연한 의지로 타오르고 있었다.
“사부님, 이제 청운문은 예전처럼 숨죽여 살아가는 삼류 문파로 남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오대세가의 남궁가와 사파의 거두 흑련회가 우리를 정조준하고 있습니다. 머지않아 이 고요한 산문은 피비린내 진동하는 전쟁터가 될 것입니다.”
도현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는 제자들의 눈을 하나하나 뜯어보았다. 허황된 겁박이 아니었다. 그들의 눈에는 이미 다가올 멸망의 풍경이 비치고 있었다.
“남궁가와 흑련회라니…… 너희들이 낙양에서 감히 누구의 꼬리를 밟고 온 것이냐.”
소운이 고개를 들고 장문인의 시선을 정면으로 마주했다. 그의 눈빛은 칠흑처럼 깊고 예리했다.
“우리가 먼저 도발한 것이 아닙니다. 다가올 죽음을 피하기 위해 판을 흔들었을 뿐입니다. 하지만 저들은 자신들의 치부를 목격한 우리를 살려두지 않을 겁니다. 청운문은 산서 외곽에 고립되어 있어 방어에 극히 취약합니다. 이대로 며칠만 지나면, 우린 자다가 목이 잘릴지도 모릅니다.”
도현은 말없이 제자들을 응시했다. 한때 문파의 허드렛일이나 돕던 잡역부 소운에게서 느껴지는 이 기질은 무엇인가. 장문인인 자신조차 압도할 만큼 깊고 무거운 압박감이 그의 어깨를 짓눌렀다.
도현이 깊은 한숨을 내쉬며 물었다.
“그래, 정녕 요새라도 만들겠다는 거냐.”
“그렇습니다. 청운문을 이름 그대로 푸른 구름 위의 검문(劍門)으로 다시 세워야 합니다.”
소운의 목소리에 힘이 실렸다.
“험준한 산세를 이용해 진법을 펼치고, 문도들의 무공 체계를 뿌리부터 갈아엎어야 합니다. 그리고…….”
소운이 품 안에서 소중히 간직해온 두툼한 서책을 꺼내 도현의 앞에 놓았다.
“이것은 화산파의 비기 중 일부와 곽노 어르신에게 전수받은 역맥 수련법입니다. 제자들의 자질을 따질 시간이 없습니다. 독을 삼키는 심정으로 이 무공들을 익히게 해야 합니다.”
도현이 서책을 집어 들더니 첫 장을 넘기자마자 안색이 급변했다.
“이, 이것은…… 화산의 정수가 아니냐! 이런 기보를 어떻게…… 아니, 네놈들 설마……!”
“시간이 없습니다, 사부님. 지금 이 순간에도 적들의 칼날은 우리 목전을 향해 다가오고 있습니다. 1분 1초가 생명과 직결됩니다.”
도현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제자의 눈 속에 담긴 핏빛 미래를 본 것인지, 아니면 제자들의 성장을 믿기로 한 것인지, 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장문인으로서 선언하마. 오늘부터 청운문의 모든 권한을 너희 세 사람에게 위임한다. 문파의 모든 자원과 인력을 너희의 수련과 방어 준비에 쏟아붓도록 하마. 대신…… 반드시 살아남아라.”
그날을 기점으로 청운문은 거대한 용광로처럼 들끓기 시작했다.
과거의 나태하고 평화로웠던 산문의 공기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하인들과 잡역부들조차 예외는 없었다. 그들은 새벽이 오기도 전에 일어나 산을 타며 돌을 나르고 함정을 팠다.
소운은 매일 밤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며 시야에 떠오르는 천명장부를 점검했다.
【 현재 부채: 76 / 100 】
【 남은 시간: 154일 】
방어를 준비하고 무공을 전수하는 과정조차 '인과의 개변'으로 취급되어 부채 수치는 수시로 요동쳤다. 때로는 80에 육박하는 위기가 찾아오기도 했으나, 공동 장부로 연결된 무겸과 서린이 고통을 함께 나누어 졌기에 소운은 무너지지 않고 버틸 수 있었다.
“거기, 단전의 흐름을 멈추지 마라! 기가 역류하는 고통을 즐겨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실전에서 적의 칼을 맞기도 전에 네 몸이 먼저 터져나갈 것이다!”
연무장 한복판에서 진무겸의 고함이 벼락처럼 울려 퍼졌다. 목에 핏발을 세우며 제자들을 다그치는 그의 모습은 흡사 전쟁터의 귀신과도 같았다. 무겸 자신도 역맥 수련법을 통해 내공을 정제한 뒤로 그 경지가 몰라보게 달라져 있었다. 그의 목검 끝에서 뿜어져 나오는 서늘한 검강은 이미 예전의 그가 우러러보던 대성급 고수들의 것을 능가하고 있었다.
한편, 산문의 후미진 암반 지대에서는 백서린이 젊은 제자들을 진두지휘하고 있었다.
“여기에 낙석용 통나무를 더 촘촘히 엮어. 흑련회의 살수들은 어둠을 타고 올 것이다. 그들이 첫발을 내딛는 그 순간이 바로 그들의 무덤이 되어야 해.”
서린의 지시는 얼음처럼 차갑고 정확했다. 과거 훗날의 역사에서 '혈월검희'로 불리며 겪어야 했던 잔혹한 전쟁의 기억들이, 그녀를 치밀하고 냉혹한 전략가로 탈바꿈시키고 있었다. 그녀는 제자들이 흘리는 땀과 눈물에 흔들리지 않았다. 지금 흘리는 눈물이 미래의 피를 대신할 것임을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었다.
문파 후미의 낡은 창고, 소운은 홀로 검을 쥐고 숨을 몰아쉬었다. 전신에서 뿜어져 나온 땀이 바닥을 적셔 웅덩이를 이룰 정도였다.
스으읍- 하아-
소운의 호흡에 따라 단전에서 소용돌이치는 기운이 경맥을 타고 폭풍처럼 몰아쳤다. 태어날 때부터 사맥체라 불리며 무공은커녕 제 몸 하나 건사하기 힘들다던 저주받은 몸이었다. 그러나 역맥 수련법과 천명장부의 가혹한 시련을 통해 강제로 뚫어낸 경맥은 이제 거대한 폭포수와 같은 기세를 품고 있었다. 그것은 정통적인 방식으로는 절대 도달할 수 없는, 파괴적이고도 이질적인 강함이었다.
그때, 시야의 한구석에서 장부의 글귀가 붉은빛을 내며 경고를 보냈다.
【 경고: 산서 외곽의 인과율이 급격히 왜곡됩니다. 】
【 흑련회 산서 지부의 잔당들이 남궁가의 지원을 받아 은밀히 이동을 개시했습니다. 】
【 남은 시간: 150일 → 145일로 급격히 단축됩니다. 】
소운의 눈이 가늘게 찢어졌다.
“예상보다 훨씬 빠르군.”
시간이 당겨졌다. 5년 뒤의 미래도, 1년 뒤의 유예도 아니었다. 이제 불과 며칠, 혹은 당장 오늘 밤이라도 저들이 청운문의 목을 치기 위해 그림자 속에서 기어 나올 것이었다.
소운은 바닥에 놓인 검을 집어 들고 연무장으로 걸어 나갔다.
구슬땀을 흘리며 검을 휘두르던 무겸과 서린이 소운의 기척을 느끼고 동작을 멈췄다. 세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혔다. 굳이 말을 섞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대기를 타고 흐르는 비릿한 살기, 그리고 장부를 통해 공유되는 긴장감이 그들의 말문을 막았다.
“소운아, 때가 된 건가?”
무겸이 검을 고쳐 쥐며 물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떨림이 없었다.
“놈들이 움직였습니다.”
서린의 눈동자가 잠시 흔들렸으나 이내 서늘한 광채를 회복했다.
“벌써라니…… 아직 진법 수습이 완벽하지 않은데.”
“우리가 낙양에서 너무 큰 상처를 입혔습니다. 남궁휘는 자신의 체면을 세우기 위해, 흑련회는 실추된 지부의 위신을 세우기 위해 더 이상 기다리지 않기로 한 모양입니다. 그들은 이제 사냥이 아니라 학살을 원하고 있습니다.”
소운은 청운문의 높은 담장 너머, 산서성 도심으로 이어지는 굽이진 산길을 바라보았다. 멀리서 불타오르는 저녁 노을이 마치 산을 집어삼키려는 핏빛처럼 보였다.
과거의 역사 속에서 청운문은 하룻밤 사이에 지도에서 지워졌다. 아무것도 모른 채 단잠에 빠져 있던 제자들은 비명 한 번 지르지 못하고 목이 잘렸고, 장문인은 제자들을 지키려다 만신창이가 되어 살해당했다. 그리고 서린은…… 지옥보다 더한 곳으로 끌려갔다.
하지만 이번엔 다르다.
소운은 가슴 속 깊은 곳에서 고동치는 장부의 힘을 느꼈다.
【 현재 부채: 79 / 100 】
【 공동 장부 동기화 상태: 최상 】
“빚은 우리가 졌고, 그 대가는 우리가 치른다. 하지만 그 대가를 가져가려면 제 목숨 정도는 내놓아야 할 것이다.”
소운이 검집에 손을 얹자, 서늘한 바람이 그의 머리카락을 흩뜨렸다. 무겸과 서린이 좌우에 나란히 섰다. 세 사람의 기운이 하나로 엮이며 거대한 압박감이 연무장을 휘감았다. 근처에서 수련하던 제자들이 그 기세에 눌려 숨을 들이켰다.
“오라고 해라. 이 산문을 그들의 거대한 무덤으로 만들어주마.”
바람이 거칠게 불어와 연무장의 흙먼지를 쓸어갔다.
붉은 낙조가 지평선 너머로 완전히 가라앉고 칠흑 같은 밤의 막이 오르자, 청운문 전체는 숨을 죽인 듯 기괴한 적막에 휩싸였다. 제자들은 이미 각자 배정된 방어 진지로 이동해 병기를 움켜쥐었고, 장문인 백도현은 정문 앞 대청마루에 홀로 앉아 가문 대대로 내려오는 보검을 무릎 위에 올린 채 눈을 감았다.
문파의 운명, 아니 세 사람의 생사가 걸린 전면전의 전야였다.
소운은 연무장 구석에 높게 솟은 망루에 올라 산길을 응시했다. 멀리 어둠 속에서 아주 미세한, 그러나 명백한 살의가 섞인 파공성이 들려왔다. 수십 개의 인영이 숲의 나무 사이를 건너뛰며 다가오는 기척이었다.
사맥체를 억지로 뚫어낸 뒤 얻은 소운의 감각은 보통의 고수들보다 몇 배나 예민하게 대기의 흐름을 읽어내고 있었다.
“온다.”
소운의 낮은 읊조림이 떨어지기 무섭게, 무겸과 서린이 어느새 망루 위로 솟구쳐 올라와 그의 곁에 섰다. 두 사람의 손도 이미 검병을 으스러지게 쥐고 있었다.
“생각보다 선봉대의 규모가 상당하군. 작정하고 왔어.”
무겸이 이를 갈며 어둠 속을 노려보았다. 드러난 기척은 단순한 정탐꾼이 아니었다. 흑련회의 정예 살수들과 남궁가에서 파견된 암살 고수들로 구성된, 오직 멸문만을 목적으로 조직된 살인 부대였다.
서린은 품에서 은빛 섬광이 번뜩이는 단검을 꺼내 제 손등 위로 가볍게 돌렸다. 그녀의 눈빛은 한 점의 흔들림도 없이 차가웠다.
“과거의 역사라면 우린 지금쯤 영문도 모른 채 죽음을 맞이했겠지. 하지만…….”
“하지만 지금은 우리가 저들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소운이 시야 구석에 떠오른 장부를 조용히 내려다보았다.
【 현재 부채: 79 / 100 】
【 다가오는 위기: 흑련회 산서 지부 선봉대의 습격 (남은 시간 0일) 】
장부의 숫자는 더 이상 변하지 않았다. 그것은 이미 회귀 전의 운명이 완전히 조각났으며, 오직 현재의 의지만이 새로운 인과를 써 내려갈 것임을 증명하고 있었다.
슈우우우-!
산문 아래쪽 숲에서 소름 끼치는 파공성과 함께 수십 명의 검은 도복 무리가 쏜살같이 튀어나왔다. 흑련회의 상징인 핏빛 연꽃 문양을 가슴에 새긴 살수들, 그리고 그 선두에는 남궁가의 비기인 오행환을 손에 든 중년 고수가 섬뜩한 미소를 지으며 서 있었다.
“청운문의 애송이들! 네놈들이 당돌하게 낙양에서 우리 상전의 판을 흔들었다지? 오늘 이 산골짝을 네놈들의 공동묘지로 만들어주마!”
살수 우두머리의 광기 어린 외침이 산사 전체에 메아리쳤다.
그 순간, 정문 대청마루에 앉아 있던 장문인 백도현이 눈을 번쩍 떴다. 그의 노쇠한 육신을 뚫고 거대한 내공의 파동이 폭발하듯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삼류 문파의 장문인이라는 허울 뒤에 숨겨두었던, 왕년의 고수다운 기개가 산문을 뒤흔들었다.
“무엄하구나! 우리 청운문의 산문에 발을 들인 것을 지옥에서 후회하게 해주마!”
도현의 호령과 동시에 청운문의 밤은 피로 물든 격전의 막을 올렸다.
소운은 망루 위에서 천천히 검을 뽑아 들었다. 검신에 반사된 달빛이 그의 서늘한 눈매를 훑고 지나갔다. 빚은 산더미처럼 쌓였고, 이제 그 대가를 치러야 할 시간이었다. 하지만 그 대가는 적들의 목숨으로 지불하게 될 것이다.
“가자.”
소운의 짧은 명령과 함께 세 사람은 동시에 허공을 박차며 어둠 속으로 몸을 던졌다. 청운문을 지키기 위한, 그리고 이미 결정되었던 운명을 거스르기 위한 진짜 싸움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