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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과부채 · 19화목차

19장 부서지는 밀약

낙양(洛陽)의 낮과 밤은 전혀 다른 두 개의 얼굴을 지니고 있었다.

대륙의 중심이라 불리는 이곳은 현재 천맹(天盟)의 청년 비무대회를 앞두고 전례 없는 활기에 휩싸여 있었다. 황하의 물줄기를 따라 흘러 들어온 전국의 군웅들이 거리를 메웠고, 오대세가의 문장이 새겨진 화려한 가마들이 거만한 기세를 뿜으며 대로를 가로질렀다. 장사치들의 호객 소리와 구경꾼들의 웃음소리가 뒤섞여 하늘을 찔렀으나, 그 찬란한 번영의 그림자 밑바닥에는 썩은 물처럼 고인 살기가 소리 없이 출렁이고 있었다.

낙양 서북쪽, 인적이 드문 골목 끝자락에 자리 잡은 허름한 객잔.

곰팡이 냄새가 코를 찌르는 좁고 어두운 가겟방 안에서, 세 명의 그림자가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창틈으로 스며든 가느다란 달빛이 방 안을 떠도는 먼지를 비추었지만, 그 빛조차 세 사람의 무거운 기운에 눌려 금방이라도 꺼질 듯 위태로웠다.

“크헉……!”

침상 모서리에 주저앉아 있던 진무겸이 갑자기 몸을 떨며 가슴을 움켜쥐었다. 억눌린 신음과 함께 그의 입술 사이로 검붉은 선혈이 울컥 쏟아져 내렸다. 낙양 성문 앞에서 마주했던 탈명록(奪命錄)의 주인, 그 가면 쓴 괴인과 겨루며 입은 내상이 결국 한계에 다다른 모양이었다.

“사형!”

백서린이 급히 다가가 무겸의 등을 받쳤다. 그녀의 손길은 평소답지 않게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서린은 품속에서 소중히 간직해온 백납단(白蠟丹) 한 알을 꺼내 무겸의 입에 밀어 넣고는, 서둘러 그의 맥문을 짚었다. 손끝을 타고 전해지는 무겸의 진기는 마치 성난 파도처럼 뒤엉켜 있었다. 공동 장부를 통해 빚을 나누어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탈명록이 가한 인과의 타격은 그들의 경맥을 갈기갈기 찢어놓을 만큼 치명적이었다.

한소운은 방구석 한편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눈을 감고 있었다. 그의 전신에서도 식은땀이 비 오듯 흘러내렸다. 사맥체(死脈體)라는 저주받은 체질을 억지로 비틀어 만들어낸 역맥(逆脈). 그 거친 기운이 단전 깊은 곳에서 요동치며 전신의 혈도를 칼로 저미는 듯한 고통을 선사하고 있었다.

하지만 소운은 그 지옥 같은 고통 속에서도 정신을 놓지 않았다. 오히려 그 고통을 이정표 삼아 내력을 정교하게 갈무리했다. 곽노에게 전수받은 역맥검법의 이치가 전신의 근골에 스며들며, 비록 상처 입었을지언정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응축된 밀도의 내공이 단전에 고이기 시작했다.

그때, 소운의 망막 위로 천명장부(天命帳簿)의 희미한 문자들이 떠올랐다.

【 현재 부채: 62 / 100 (삼인 균등 분산) 】

【 남은 시간: 160일 】

【 경고: 낙양 내부의 인과율이 거대한 악의(惡意)에 의해 왜곡되고 있습니다. 】

【 탐지: 흑련회와 천맹 내부 배신자들의 밀약 장소가 확인되었습니다. 】

소운의 눈이 번쩍 떠졌다. 눈동자 속에는 서늘한 냉기가 서려 있었다.

“독고염은…… 아직인가?”

무겸이 단약을 삼키고 가까스로 호흡을 고르며 물었다. 핏기가 가신 그의 얼굴은 처참했지만, 눈빛만큼은 여전히 대사형다운 강인함을 잃지 않고 있었다.

“기다려야 합니다. 그 정보꾼이 움직였다면 반드시 소식이 올 겁니다.”

소운이 나직하게 답했다. 그들이 만신창이가 된 몸을 이끌고 굳이 낙양의 심장부로 기어들어 온 이유는 명확했다. 남궁세가의 차남 남궁휘, 그리고 그 뒤를 받치는 그림자회의와 사파 연합 흑련회. 그들이 이 비무대회를 제물 삼아 천맹의 실권을 장악하려는 거대한 음모를 꾸미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음모의 끝에는 5년 뒤 청운문을 멸문으로 몰아넣을 비극의 씨앗이 심겨 있었다.

똑, 똑, 똑.

무거운 침묵을 깨고 규칙적인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세 사람의 몸이 용수철처럼 튀어 올랐다. 무겸은 대검의 자루를 거머쥐었고, 서린의 손은 이미 허리의 검병에 닿아 있었다. 소운 역시 역맥의 기운을 끌어올리며 문쪽을 응시했다.

“나야. 문 열어.”

낮게 가라앉은, 허스키한 여인의 목소리. 독고염이었다.

서린이 신중하게 문을 열자, 남루한 변복 차림의 독고염이 잽싸게 방 안으로 미끄러져 들어왔다. 평소의 능글맞던 여유는 온데간데없었다. 그녀의 창백한 이마에는 팽팽한 긴장감이 서려 있었다.

“상황이 최악이야. 생각보다 판이 훨씬 커.”

독고염이 숨을 몰아쉬며 탁자 위에 낙양 남쪽의 지도를 펼쳤다.

“오늘 밤 자정, 낙양 외곽의 폐쇄된 철광창고에서 대대적인 밀회가 열려. 흑련회의 서부 지부장인 독고룡, 그리고 천맹 내부의 고위 임원진들…… 무엇보다 남궁가의 차남 남궁휘가 직접 그 자리에 나타날 거야.”

소운의 미간이 좁아졌다.

“밀약의 구체적인 내용은?”

“청운문이다.”

독고염의 입에서 나온 이름에 방 안의 공기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남궁휘가 흑련회에게 명분을 팔았어. 청운문을 혈월교(血月敎)의 잔당과 내통했다는 누명을 씌워 멸문시키기로 합의한 거지. 그 대가로 흑련회는 천맹 내에서 남궁가의 앞길을 막는 반대파들을 하나씩 암살해주기로 했고. 오늘 밤, 그 최종 밀약서에 서명이 이뤄지면 청운문은 내일부터 대역죄인의 문파가 되는 거야.”

“이 더러운…… 쥐새끼들!”

무겸이 이를 갈며 주먹을 쥐었다. 너무 세게 쥔 나머지 손등의 핏줄이 터질 듯 솟아올랐고, 갓 멈췄던 입가의 핏자국이 다시 번졌다. 우리 문파를, 우리 스승님과 형제들을 고작 지들의 권력욕을 채우기 위한 소모품으로 쓰겠다는 말인가. 분노가 역맥을 타고 흐르며 방 안의 기운을 거칠게 뒤흔들었다.

“가만히 앉아서 당할 수는 없지.”

소운이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그의 시야 속에서 장부의 수치가 붉게 점멸하고 있었다. 이 정보를 바탕으로 밀약 현장을 덮치는 것. 그것은 확정된 미래를 정면으로 거스르는 행위였다. 미래의 인과를 비틀수록 장부의 부채는 폭포처럼 쏟아질 것이 뻔했다. 어쩌면 오늘 밤, 부채 상한을 넘겨 추심의 나락으로 떨어질지도 몰랐다.

하지만 소운은 주저하지 않았다. 여기서 멈춘다면 5년 뒤의 비극은 예고된 수순대로 찾아올 것이며, 청운문의 이름은 역사 속에서 추악한 오명을 뒤집어쓴 채 사라질 터였다.

【 청구: 흑련회와 남궁가의 밀약을 저지하고, 증거가 될 밀약서를 탈취하라. 】

【 주의: 인과의 강제 개입 시 부채가 급증할 수 있습니다. 감당하시겠습니까? 】

장부의 글자가 핏빛으로 번뜩이며 소운의 의지를 시험했다. 소운은 피식, 서늘한 미소를 지었다.

“피할 수 없으면 빚을 져야지. 어차피 갚아나가면 그만이다.”

“소운아, 혼자 짊어질 생각 마라.”

서린이 검을 고쳐 매며 단호하게 말했다. 그녀의 눈에는 흔들림 없는 결의가 깃들어 있었다.

“우리는 이미 공동 장부로 묶인 사이다. 네가 짊어질 빚이라면 우리도 함께 나눈다. 저번처럼 죽기밖에 더 하겠어? 청운문의 제자로서 비겁하게 살 바엔 검 한 번 휘두르고 죽는 게 낫지.”

“그래, 대사형인 내가 눈 뜨고 가만히 있을 줄 알았냐? 빚쟁이가 무서워서 도망칠 거면 애초에 낙양까지 오지도 않았어.”

무겸도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그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이 역맥의 고통을 짓누르며 묵직하게 응축되었다. 세 사람의 의지가 하나로 모이자, 방 안의 공기가 팽팽하게 조여들었다.

독고염이 황당하다는 듯 그들을 바라보다 이내 한숨을 내쉬었다.

“너희들, 진짜 미쳤구나. 거긴 낙양에서도 손꼽히는 고수들이 깔렸어. 특히 남궁휘의 호위로 붙은 남궁철(南宮鐵)은 화경(化境)의 경지에 발을 걸친 괴물이야. 삼류 문파 애송이들이 가봤자 뼈도 못 추리고 죽는다고.”

“그래서 머리를 쓰는 겁니다.”

소운이 품에서 낡은 지도 한 장을 꺼내 탁자 위에 펼쳤다. 그것은 독고염이 며칠 전 구해다 준 철광창고의 상세 구조도였다.

“정면으로 들이받는 건 자살행위죠. 하지만 그들이 가장 방심한 순간, 그들이 가장 믿고 있는 판을 뒤흔든다면 이야기는 달라집니다.”

밤이 깊어질수록 낙양의 기온은 서늘하게 내려앉았다. 달빛조차 두꺼운 구름 뒤로 숨어버린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낙양 남쪽의 버려진 철광창고는 거대한 괴수의 아가리처럼 입을 벌리고 있었다.

창고 주변은 적막했다. 하지만 그 고요함 속에는 날 선 칼날 같은 살기가 숨어 있었다. 거대한 철제 정문 앞에는 흑련회의 정예 살수들이 횃불을 든 채 매서운 눈초리로 사방을 경계하고 있었고, 창고 내부에서는 낮게 웅성거리는 음산한 목소리들이 새어 나왔다.

“거기까지다.”

창고 뒷벽, 낡은 환기구 근처의 어둠 속에 몸을 숨긴 소운이 나직하게 읊조렸다. 그의 뒤로 무겸과 서린이 그림자처럼 밀착해 있었다. 세 사람의 기운은 역맥 수련을 통해 극도로 압축되어 있었기에, 웬만한 고수가 아니면 그들의 기척을 눈치채기란 불가능했다.

소운이 눈을 가늘게 뜨며 장부의 경고를 읽었다.

【 현재 부채: 62 / 100 】

【 잠입 및 밀약 저지 시퀀스 개시. 인과 개변의 파장이 감지됩니다. 】

“가자.”

소운이 환기구의 녹슨 쇠창살을 맨손으로 움켜쥐었다. 사맥체를 뚫어낸 역맥의 내력이 손끝으로 집중되며 파직거리는 소음이 일었다. 무시무시한 악력에 쇠창살이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기괴한 형태로 우그러졌다.

휘익-!

소리 없이 뜯겨 나간 틈새로 소운이 먼저 몸을 날렸다. 이어 무겸과 서린이 한 줄기 바람처럼 창고 내부의 어둠 속으로 스며들었다.

창고 안은 거대한 철제 가대와 녹슨 광석더미가 산처럼 쌓여 복잡한 미로를 형성하고 있었다. 그 중앙, 임시로 마련된 화려한 단상 위에는 세 무리의 인물들이 마주 앉아 있었다.

한쪽에는 검은 장포를 뒤집어쓴 채 비릿한 미소를 짓고 있는 흑련회 지부장 독고룡이 있었고, 맞은편에는 천맹의 상징인 백색 도포를 걸치고도 탐욕스러운 눈빛을 숨기지 못하는 장로급 인사들이 자리했다. 그리고 그 정중앙, 상석에는 남궁세가의 차남 남궁휘가 오만한 자세로 앉아 비단으로 된 밀약서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하하하! 백도현 그 고지식한 늙은이가 영문도 모른 채 혈월교의 첩자로 몰려 목이 날아갈 꼴을 상상하니 벌써부터 술맛이 나는군.”

남궁휘가 잔에 든 술을 가볍게 흔들며 비릿하게 웃었다.

“청운문 같은 잡동사니 문파가 천맹의 이름에 먹칠을 하고 있었으니, 이번 기회에 우리가 대청소를 해주는 셈 치면 됩니다. 자, 지부장. 더 지체할 것 없이 서명하시지요.”

독고룡이 낄낄거리며 붓을 집어 들려던 그 찰나였다.

“정화는 개뿔. 쥐새끼들이 모여서 아주 가관인 작부 놀이를 하고 자빠졌군.”

창고 천장의 어두운 철골 구조물 위에서, 얼음처럼 차갑고 낭랑한 목소리가 폭포처럼 쏟아져 내렸다.

“누구냐!”

남궁휘의 안색이 순식간에 일그러지며 고함을 내질렀다.

그와 동시에, 세 줄기의 서슬 퍼런 검광이 마치 낙뢰처럼 어둠을 찢고 단상을 향해 수직으로 내리꽂혔다.

쿠우웅-!

거대한 폭음과 함께 밀약서가 놓여 있던 대리석 탁자가 가루가 되어 흩날렸다. 자욱한 먼지 속에서 세 명의 실루엣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한소운……!”

남궁휘가 경악에 찬 눈으로 선두에 선 소운을 보았다. 피 칠갑이 된 옷을 입고도 태산처럼 당당하게 서 있는 소운의 손에는 푸르스름한 기운을 머금은 검이 들려 있었다. 그 뒤를 지키는 무겸과 서린 역시 귀신 같은 살기를 뿜어내며 남궁휘의 숨통을 조여 왔다.

“네놈이…… 어떻게 이곳을 찾아낸 거지? 성문 앞에서 분명히 죽었어야 할 놈이!”

남궁휘가 분노로 시뻘개진 얼굴을 경련하며 소리쳤다. 소운은 차가운 눈빛으로 그를 멸시하듯 내려다보았다.

“네놈들이 꾸민 그 추악한 종이 쪼가리, 우리가 접수하러 왔다.”

“어디서 감히 벌레 같은 놈들이……! 남궁철, 저놈들의 사지를 찢어버려라!”

남궁휘의 외침과 함께 그의 등 뒤에 그림자처럼 서 있던 거한, 남궁철이 살기를 터뜨리며 앞으로 나섰다. 그가 거대한 도(刀)를 뽑아 들자 창고 전체가 짓눌리는 듯한 위압감이 몰아쳤다. 화경에 근접한 고수의 기세는 삼류 문파 제자들이 감당하기엔 지나치게 무거웠다.

그와 동시에, 소운의 시야 속 천명장부가 미친 듯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 경고: 거대한 인과 변동 발생! 운명의 줄기가 강제로 뒤틀리고 있습니다! 】

【 현재 부채: 62 / 100 → 84 / 100 (밀약 개입 및 물리적 파괴로 인한 인과 대가) 】

【 추심 임박: 감당할 수 없는 인과의 파장이 경맥을 잠식합니다! 】

부채가 순식간에 84로 폭등했다. 억지로 누르고 있던 역맥의 고통이 백 배, 천 배의 중압감이 되어 전신을 짓눌렀다. 소운의 입가에서 진득한 선혈이 흘러내렸다. 오장육부가 뒤틀리는 고통에 눈앞이 아찔해졌지만, 그는 검을 쥔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옆에 선 무겸과 서린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들도 피를 토하며 비틀거렸으나, 공동 장부의 동기화를 통해 서로의 고통을 나누어 짊어지며 투지를 불태웠다. 세 사람의 기운이 하나로 뭉쳐지며 남궁철의 압도적인 기세에 맞서는 거대한 방벽을 형성했다.

“빚은 우리가 진다. 하지만 네놈들의 목숨은 우리가 가져가마.”

소운의 서늘한 목소리가 부서진 창고 안을 서늘하게 울렸다. 피비린내 나는 격전의 서막이 올랐다.

남궁철의 도강(刀罡)이 허공을 갈랐다. 단순한 베기가 아니었다. 화경의 문턱에 닿은 자만이 부릴 수 있는, 공간을 압착하는 듯한 묵직한 일격이었다.

“크윽……!”

소운은 단전에서 역맥의 기운을 억지로 끌어올렸다. 뼈가 으스러지는 통증이 밀려왔지만, 시야 구석의 붉은 장부 문구는 더욱 선명해졌다.

【 현재 부채: 84 / 100 】

【 남은 시간: 159일 】

【 경고: 부채 상한 임계점에 근접했습니다. 추가적인 인과 개변은 파멸을 불러옵니다. 】

“소운아, 버텨라!”

무겸이 대검을 가로지르며 남궁철의 정면을 막아섰다. 그의 검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핏빛 검강이 남궁철의 도와 부딪히며 불꽃을 튀겼다.

챙강-! 콰아아앙!

지면이 통째로 꺼질 듯한 폭음이 창고를 흔들었다. 무겸의 전신 근육이 비명을 질렀고, 그의 입에서 굵은 혈주가 뿜어져 나왔다. 경지의 격차는 명확했다. 하지만 공동 장부로 연결된 서린과 소운이 그 충격을 나누어 받으며 무겸의 방어선을 지탱했다.

“놓치지 않아!”

서린의 검이 그림자처럼 남궁철의 측면을 파고들었다. 청운문의 정수가 담긴 예리한 초식이 남궁철의 목을 겨냥했다. 화경의 고수조차 무시할 수 없는 정교한 일격에 남궁철이 미간을 찌푸리며 도를 뒤로 물렸다.

그 찰나의 빈틈, 소운의 눈이 번뜩였다.

그는 회귀 전의 기억을 통해 남궁철의 무공, '태산압정'의 결정적인 허점을 알고 있었다. 거대한 위력을 발휘한 직후, 기혈이 다시 순환하기까지 찰나의 정체기가 발생한다는 사실을. 소운의 검이 기괴한 궤적을 그리며 남궁철의 겨드랑이 밑, 기혈이 교차하는 지점을 정확히 꿰뚫었다.

푸쉭!

“크윽…… 이 애송이들이!”

남궁철이 황급히 신법을 펼쳐 뒤로 물러났다. 비록 치명상은 아니었으나, 화경의 고수가 삼류 문파 제자에게 피를 흘렸다는 사실만으로도 그는 큰 충격을 받은 듯했다.

단상 위의 남궁휘는 이미 이성을 잃고 날뛰고 있었다.

“당장! 당장 저 버러지들을 베어버려! 독고 지부장, 뭘 하고 있는 거야!”

독고룡이 흉포하게 웃으며 품에서 시커먼 독사슬을 꺼내 들었다.

“애송이들이 제법이군. 하지만 여기까지다. 오늘 이곳을 너희들의 무덤으로 만들어주마.”

흑련회의 살수들과 남궁가의 정예들이 포위망을 좁혀왔다. 사방이 적이었고, 퇴로는 보이지 않았다. 소운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장부를 노려보았다. 부채 84. 여기서 한 번만 더 힘을 폭발시키면 100을 넘겨 파멸할지도 모르는 위기.

하지만 소운은 웃고 있었다.

“우리가 정말 맨몸으로 온 줄 알았나?”

소운이 품 안에서 화산파(華山派)의 밀인이 찍힌 철통 하나를 꺼내 단상 아래로 던졌다.

“이게 뭐지……?”

남궁휘와 독고룡의 시선이 바닥에 떨어진 철통으로 향한 순간, 창고 밖에서 천지를 뒤흔드는 수십 명의 발소리와 외침이 들려왔다.

“거기 누구냐! 천맹의 밀회를 당장 개방하라! 화산파의 이름으로 명한다!”

창고 문이 박살 나며 쏟아져 들어온 것은 화산파의 고수들과 천맹 내의 정통파 무인들이었다. 소운이 미리 독고염을 통해 화산파에 전달한 '남궁가와 흑련회의 밀약 정보'가 정확한 타이밍에 작용을 일으킨 것이었다.

남궁휘의 얼굴이 잿빛으로 변했다.

“이, 이건…… 말도 안 돼! 어떻게 화산파 늙은이들이 여기에……!”

“판은 이미 깨졌다, 남궁휘.”

소운이 피투성이가 된 얼굴로 핏덩이를 뱉어내며 검을 거두었다.

“오늘은 이 정도로 해두지. 하지만 기억해라. 다음번엔 네놈의 목을 직접 가지러 갈 테니까.”

“잡아라! 저놈들을 절대 놓치지 마!”

남궁휘가 발악했지만, 이미 창고 안은 화산파 무인들과 흑련회 살수들이 뒤엉켜 아수라장으로 변해 있었다.

소운은 무겸과 서린의 어깨를 낚아채듯 움켜쥐었다.

“가자!”

세 사람은 허공을 박차며 무너진 환기구와 지붕 위로 몸을 날렸다. 추격의 함성과 금속음이 멀어지는 것을 느끼며, 그들은 낙양의 칠흑 같은 밤 속으로 신들린 듯 스며들었다.

한참을 달려 안전한 외곽의 버려진 토굴에 도착해서야, 세 사람은 약속이라도 한 듯 바닥에 주저앉았다.

털썩-!

긴장이 풀리자마자 전신이 갈기갈기 찢어지는 듯한 고통이 밀려왔다. 세 사람의 입에서 동시에 검붉은 선혈이 터져 나왔다. 공동 장부로 나눈 부채의 무게와 역맥의 반동이 한꺼번에 몰아친 결과였다.

소운이 떨리는 손으로 장부를 확인했다.

【 밀약 저지 및 남궁가-흑련회 간의 균열 야기 성공. 】

【 현재 부채: 84 / 100 → 76 / 100 (공동 장부 분산 및 인과율 안정화) 】

【 공덕 +8 획득 (누적 공덕 13) 】

【 남은 시간: 158일 】

부채가 76으로 떨어졌지만, 여전히 위태로운 수치였다. 하지만 소운의 가슴 속에는 기묘한 해방감이 소용돌이쳤다.

“크헤헤…… 미치겠군. 진짜 염라대왕이랑 하이파이브하고 온 기분이야.”

무겸이 대자로 누워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서린 역시 떨리는 손으로 소운의 상태를 살피며 맑은 눈물을 훔쳐냈다.

“하지만 해냈어, 소운아. 남궁휘의 계획은 완전히 꼬였고, 이제 천맹 내부에서도 그들을 의심하기 시작할 거야.”

소운은 차가운 흙바닥에 누운 채, 토굴 틈새로 보이는 밤하늘의 별을 바라보았다. 5년 뒤의 멸문이라는, 절대로 넘을 수 없을 것 같았던 거대한 운명의 벽. 그 단단한 벽에 오늘 드디어 첫 번째 균열을 내는 데 성공했다.

“이것은 시작일 뿐이다.”

소운의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토굴 안의 어둠 속에 깊숙이 스며들었다.

부채는 여전히 무거웠고 남은 시간은 촉박했지만, 청운문을 지키기 위한 그들의 반격은 이제 막 진정한 서막을 올리고 있었다. 세 사람의 거친 호흡 소리가 어둠 속에서 하나로 겹쳐지며, 낙양의 핏빛 밤은 서서히 저물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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