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30화 슬럼가의 수호자
산성비와 기계 기름 냄새가 번진 신서울 제4구역 슬럼가의 밤하늘은 선붉은 화염으로 물들어 있었다.
쿠구구구구-!
지축을 울리는 대포성과 함께 콘크리트 방벽이 허망하게 무너져 내렸다. 파편이 사방으로 튀어 오르고, 그 너머에서 거대한 전술 장갑차와 4세대 생체 코어를 탑재한 사이보그 용병들이 쏟아져 나왔다.
세계적인 용병 기업 ‘아이언 윌(Iron Will)’의 최정예 타격대.
티타늄 그룹의 자본을 등에 업은 그들의 무력은 슬럼가의 민간인들과 반(反)기업 저항군 ‘니르바나’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전열을 유지해! 제발, 조금만 더 견뎌라!"
니르바나의 총수, 송수연이 피범벅이 된 가죽 재킷을 휘날리며 고함을 질렀다.
그녀의 손에 쥐어진 군용 대형 도검에서 붉은 플라즈마 검강이 분출되었지만, 끝자락이 위태롭게 떨리고 있었다.
이미 수십 명의 용병을 혼자서 베어 넘겼다. 하지만 상대는 끝이 없는 기계 군단이었다. 장갑 수트의 동력원이 한계에 도달해 가슴 중앙의 보조 코어가 경고음을 울려댔다.
지직, 지지직.
비가 내리는 방독면 시야 너머로 슬럼가의 아이들과 부상자들이 모여 있는 중앙 수용소가 보였다. 이곳이 뚫리면 남은 건 학살뿐이었다.
티타늄 그룹은 신서울 상층부의 균열을 메우기 위해 슬럼가 거주민 전체를 '생체 코어 재료'로 수확하라는 명령을 내린 상태였다.
"후우, 후우……."
송수연은 어깨를 거칠게 헐떡였다.
입안에서 텁텁한 피비린내가 진동했다. 허벅지와 옆구리에는 이미 고주파 진동 칼날에 베인 깊은 상처가 나 있어 운기조식조차 불가능한 상태였다.
그때, 용병대의 후방에서 기괴한 엔진 음향과 함께 거대한 로켓 포탑들이 일제히 고개를 들었다.
스스스스-!
열 감지 레이저가 송수연과 니르바나의 마지막 방어선에 일제히 고정되었다.
"목표 확인. 제4구역 저항군 잔당 및 슬럼가 쥐새끼들."
아이언 윌의 지휘관이 무미건조한 기계음으로 선언했다.
"대기갑용 플라즈마 탄도 로켓 48발, 전탄 발사."
쿠콰콰콰콰콰-!
순간 밤하늘이 낮처럼 밝아졌다.
하늘을 가로지르는 수십 줄기의 붉은 섬광. 개당 건물을 통째로 증발시킬 수 있는 고폭 플라즈마 탄두들이 대기를 찢으며 낙하했다.
"끝인가……."
송수연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자신의 검강으로는 저 대규모 폭격을 절반조차 막아낼 수 없었다. 뒤에 있는 아이들의 비명 소리가 귓가를 때렸다.
그녀는 이를 악물고 단전에 남아 있는 마지막 내공을 쥐어짰다. 죽기 전 단 한 발이라도 더 쇄신하겠다는 결의.
검을 들어 올려 낙하하는 탄막을 향해 뛰어오르려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
슉-.
세상의 모든 소음이 순간적으로 사라졌다.
폭포수처럼 쏟아지던 빗줄기가 허공에 멈춰 섰다.
포격의 굉음도, 용병들의 기계음도, 죽음을 앞둔 아이들의 비명조차 단 하나의 '존재'가 내뿜는 압도적인 격(格)에 눌려 숨을 죽였다.
대기 중에 감돌던 화약 연기와 매연이 기괴한 궤적을 그리며 한 점으로 수렴하기 시작했다.
대체 무엇인가.
송수연은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았다.
공중. 낙하하는 48발의 플라즈마 로켓 바로 위쪽의 허공.
아무것도 없어야 할 빈 허공에, 마치 공간을 깨부수고 걸어 나오듯 한 남자가 유유히 모습을 드러냈다.
칠흑 같은 검은 머리칼.
빛조차 흡수해 버릴 것 같은 차가운 흑안(黑眼).
핏자국 하나 묻지 않은 무채색의 옷자락이 산성비 속에서 유유히 나부꼈다.
강진혁.
그의 시야에는 더 이상 과거 티타늄 그룹이 이식했던 옅은 푸른빛의 HUD(상태창)도, 시스템 AI의 번잡한 연산 로그도 존재하지 않았다.
[SYSTEM UI: DISABLE]
[PROTOCOL CONTROL: 100% SELF-GOVERNANCE]
시스템의 보조 따위는 필요치 않았다.
혈마병의 절망적 고통을 스스로의 의지로 깨부수고, 마공과 현대 기술의 경계를 완전히 소멸시킨 자.
자연의 기류, 화약 연기 속의 은밀한 살기, 적들의 미세한 생체 회로의 진동까지도 진혁의 감각 속에서는 명확하게 읽히는 진리였다.
"진…… 혁……?"
송수연의 입술에서 떨리는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진혁은 슬럼가를 깔보는 용병들과 그 위로 떨어지는 붉은 탄막을 차갑게 내려다보았다.
그의 표정에는 단 한 모금의 감정조차 섞여 있지 않았다.
그저 귀찮은 벌레를 바라보는 무심함.
진혁이 천천히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
나노머신을 제어하는 기계적 신호가 아니었다. 단전에서 시작되어 전신의 혈맥을 타고 흐르는, 순수하고 완벽하게 통제된 '신천마기(新天魔氣)'의 흐름이었다.
손짓 단 한 번.
스아아아-!
진혁의 손끝에서 뿜어져 나온 옻칠한 듯한 흑마기(黑魔氣)가 허공에서 수천, 수만 갈래의 미세한 마사(魔絲)로 갈라져 나갔다.
그것은 흡사 하늘 전체를 덮는 거대한 검은 연꽃이 봉오리를 피워 올리는 모습과 같았다.
콰콰콰콰쾅-!
공중에서 48발의 플라즈마 로켓이 동시에 폭발했다.
단 한 발도 슬럼가의 지상에 닿지 못했다.
충격파로 인해 발생해야 할 거대한 열풍과 플라즈마 후폭풍마저도, 진혁이 펼쳐놓은 흑마기의 장막 속으로 흡수되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만법귀마(萬法歸魔).
적의 에너지와 파괴력을 강제로 자신의 마기로 환원시켜 소멸시키는 절대 권능.
"……뭣?!"
"포격이…… 공중에서 전부 소멸했다고?!"
"연산 오류다! 에너지 측정 불가! 레이더에 아무것도 잡히지 않는다!"
아이언 윌 용병대의 진영이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최첨단 전술 레이더와 AI 예측 시스템이 작동하고 있었지만, 진혁이라는 존재의 입출력 데이터 자체를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시스템의 규칙 위에 서 있는 자였기 때문이다.
스슥.
진혁이 허공을 마치 계단을 밟듯 차분히 걸어 내려왔다.
공기 중의 분자를 마기로 압축해 발판으로 삼는 쇄공(碎空)의 경지.
그가 슬럼가의 젖은 흙바닥에 발을 내디뎠을 때, 먼지 하나 일어나지 않았다.
진혁이 천천히 고개를 돌려 송수연을 바라보았다.
"늦지 않은 모양이군."
"너…… 너, 피는……? 혈마병은 어떻게 하고……?"
송수연은 그를 바라보며 숨을 죽였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진혁의 전신 회로는 폭주하는 마기와 나노머신의 충돌로 인해 당장이라도 터져 나갈 듯 위태로웠다.
하지만 지금의 강진혁에게서는 어떠한 불안정함도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회로의 은빛 선들은 진혁의 피부 아래 완전히 녹아들어, 그 자체가 하나의 완벽한 생체 혈맥처럼 숨을 쉬고 있었다.
진혁이 옅게 소리 없이 웃었다.
"버렸다."
"뭐?"
"나를 얽매이게 만들던 모든 걸 버렸다. 시스템도, 프로토콜도, 고대 마교의 망령조차도."
진혁의 시선이 용병대의 중앙으로 향했다.
"이제 남아있는 건, 오직 나 자신뿐이다."
그 한마디에 담긴 압도적인 무도(武道)의 의념이 슬럼가 전체를 직격했다.
아이언 윌 용병들의 전신 수트 장갑판이 미세하게 진동하며 경고음을 울려댔다. [WARNING: High Ma-gi Pressure Detected].
공포라는 감정을 억제당한 사이보그 용병들조차 본능적으로 뒷걸음질을 쳤다.
"전 대원, 사격! 사격하라!"
지휘관의 비명이 터져 나왔다.
치지직-! 콰아아앙!
수십 대의 장갑차에 탑재된 고주파 가속 포탑과 플라즈마 레이저가 일제히 강진혁이라는 단 하나의 목표를 향해 집중 포화를 퍼부었다.
빛의 속도로 날아드는 열선과 텅스텐 탄환의 세례.
하지만 진혁은 피하지 않았다.
그저 왼손을 가볍게 주머니에 넣은 채, 오른손 손가락 두 개를 펴 허공을 스치듯 그어 내렸다.
신천마신공 제17식, 참단(斬斷).
쉭-.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았다.
그러나 강진혁의 손끝에서 시작된 한 줄기 얇은 흑선(黑線)이 전장을 사선으로 가로질렀다.
다음 순간.
서걱-!
강진혁을 향해 날아오던 수백 발의 고주파 탄환과 플라즈마 레이저가 공중에서 정확히 반으로 갈라져 무력화되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탄환 뒤에 서 있던 장갑차 10여 대와 그 앞을 가로막고 있던 백여 명의 전신 개조 용병들이, 자신들이 베였다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한 채 상체와 하체가 미끄러지듯 분리되었다.
콰아아앙-!
뒤늦게 터져 나가는 기계 장갑의 폭발음.
단 한 번의 손가락질에 아이언 윌의 선봉 타격대가 문자 그대로 '지워진' 것이다.
"아…… 아아……."
살아남은 용병들이 넋을 잃었다.
그것은 현대 군사공학이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영역의 파괴력이었다.
방어막(Shield)을 뚫은 것이 아니다. 강진혁의 검기(劍氣)는 방어막이 존재한다는 개념 자체를 절단해 버린 것이었다.
진혁은 피비린내와 매연이 진동하는 전장 한가운데를 차분히 걸어갔다.
그가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슬럼가를 짓누르던 티타늄 그룹의 어두운 압박감이 걷혀나가고 그 자리에 전설 속 천마(天魔)의 영역이 새로이 선포되고 있었다.
"너희의 주인이 말했겠지."
진혁의 차가운 목소리가 용병들의 통신 회로를 강제로 침식하며 뇌리에 직접 울렸다.
"슬럼가는 자본의 부산물이자 폐기장이라고."
진혁이 검지를 들어 지평선 너머, 까마득히 높게 솟아 있는 티타늄 타워의 마천루를 가리켰다.
"틀렸다."
진혁의 눈동자 속에서 칠흑 같은 마기가 번뜩였다.
"이곳은 내가 돌아올 거처이자, 너희의 탐욕을 끝장낼 신천마(新天魔)의 첫 번째 영토다."
그것은 단순한 선언이 아니었다.
1,000년 전 잊혀진 마공과 근미래의 군사기술이 완전한 융합을 이루어 낸 자가, 세계를 지배해 온 거대 자본과 시스템을 향해 던지는 완벽한 처형 선고였다.
바로 그때.
쿵-! 쿵-! 쿵-!
파괴된 장갑차들의 폐허 너머, 용병대의 가장 깊숙한 본대 구역에서 지진이라도 난 듯 무거운 철제 발걸음 소리가 울려 퍼졌다.
연기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은, 일반 장갑차보다도 거대한 체구를 자랑하는 중장갑 전술 수트였다.
수트의 어깨에는 4세대 하이퍼 생체 코어 세 개가 삼각 형태로 자리 잡아 붉은 빛을 상시 분출하고 있었고, 손에는 미세 고주파가 흐르는 거대한 플라즈마 토마호크가 쥐어져 있었다.
용병 기업 ‘아이언 윌’의 에이스.
과거 강진혁에게 뼈아픈 수치와 중상을 입혔던 파괴자.
제프로스(Jeffros)였다.
"……오랜만이구나, 07호 쥐새끼."
제프로스의 수트 내장 스피커에서 쇠를 긁는 듯한 기괴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벌레 같은 슬럼가 놈들과 함께 덤벼라. 이번에야말로 네놈의 척추를 뽑아 회장님께 바쳐주마!"
제프로스가 플라즈마 토마호크를 들어 올리자, 슬럼가 전체의 전력이 순간적으로 요동치며 거대한 고전압 아크가 사방으로 튀었다.
그러나 강진혁은 그 압도적인 무력 앞에서도 눈 하나 깜빡이지 않았다.
그저 무심한 눈빛으로, 자신을 향해 기세등등하게 다가오는 과거의 강적을 바라볼 뿐이었다.
"제프로스."
진혁의 입가에 차가운 실소가 걸렸다.
"네 수트에 탑재된 코어의 주파수, 그리고 네 근육의 반응 속도."
진혁이 손을 가볍게 내밀자, 허공에서 흑마기가 응축되며 한 자루의 묵직한 검의 형상을 갖추기 시작했다.
"시스템의 연산 없이도…… 네놈의 죽음은 이미 정해져 있다."
차원 너머의 지배자들과 싸우기 전.
신서울에 남은 마지막 걸림돌을 치우기 위한, '신천마' 강진혁의 진짜 무도가 다시금 불꽃을 튀기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