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9화 신의 형상, 마의 강림
심연의 문이 열렸다.
티타늄 그룹이 1,000년의 세월을 쏟아부어 구축한 지하 3,500층의 마스터 돔. 그 중심부에 위치한 메인 생체로(Bio-Core Reactor)는 마치 거대한 심장처럼 박동하고 있었다. 붉게 점멸하는 조명 사이로 흘러나오는 것은 공기조차 녹여버릴 듯한 고밀도의 마기(魔氣)였다.
강진혁의 걸음마다 바닥의 강화 합금이 비명처럼 찌그러졌다.
"……드디어 여기까지 왔군."
진혁은 나지막이 읊조리며 자신의 가슴팍을 짓누르는 압박감을 확인했다. 시스템 HUD는 이미 오래전에 꺼졌다. 인공지능 설화의 무미건조한 목소리도, 계산된 데이터의 나열도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혈관을 타고 흐르는 뜨거운 마기와, 뼛속까지 파고드는 나노머신의 진동만이 그가 살아있음을 증명하고 있었다.
[생체 코어 출력: 12,000 MW 돌파.]
단전 깊은 곳에서 울리는 수치는 더 이상 단순한 기계적 연산의 결과가 아니었다. 그것은 진혁의 육체 그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발전소가 되었음을 의미했다.
치익-!
진혁의 등 뒤에서 검붉은 뇌전이 뱀처럼 똬리를 틀었다.
나노머신 회로와 마기가 단전의 경계를 허물고 하나로 뒤섞였다. 인공근육은 한계를 넘어 비정상적으로 팽창했다가 수축하기를 반복했고, 그 과정에서 뿜어져 나오는 열기가 주변의 금속 파편들을 가루로 만들어 흩뿌렸다.
'이것이… 천마현신의 징조인가.'
진혁은 자신의 오른손을 내려다보았다. 피부 아래로 흐르는 은빛 회로가 이제는 칠흑 같은 어둠을 머금은 마기와 공명하며 일렁이고 있었다. 등 뒤로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웠다.
인간의 형상이 아니었다.
수천 년 전, 마교의 지존이라 불렸던 전설 속 천마의 환영이 진혁의 의념과 합쳐져 현실의 물리 법칙을 비틀고 있었다. 검붉은 뇌전으로 이루어진 마신의 상반신이 진혁의 등 뒤에서 서서히 고개를 들었다. 그것은 압도적인 위압감 그 자체였다.
"나를 그릇으로 쓰겠다던 놈들의 최후가 고작 이것인가."
진혁이 차갑게 비웃으며 전방을 응시했다.
그곳에는 메인 생체로의 동력을 직접 받아들여 괴물처럼 변해버린 백무현의 잔재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사방에 흩어진 파편들이 자석에 이끌리듯 백무현의 형체로 모여들고 있었다.
[경고. 데이터베이스 재구축 완료. 대상: 강진혁. 제거 우선순위: 1위.]
백무현의 기계적인 음성이 돔 전체에 울려 퍼졌다.
그의 몸은 이미 인간의 형상을 잃었다. 수많은 코어와 나노 파츠가 융합된 비대칭의 거구. 그 사이사이를 메우는 것은 펄펄 끓는 마기뿐이었다. 그는 마치 지옥에서 기어 나온 강철의 마왕처럼 보였다.
"제거하겠다. 네놈이 쌓아 올린 그 가증스러운 신화까지도."
백무현이 거대한 팔을 휘둘렀다.
쿠구구구-!
지하 돔의 천장이 무너져 내릴 듯 흔들렸다. 진혁은 피하지 않았다. 아니, 피할 필요가 없었다.
그는 검을 뽑았다. 칠흑 같은 어둠을 깎아 만든 듯한 천마검. 검신에 깃든 마기가 공간을 날카롭게 할퀴었다.
"신화는 쌓아 올리는 게 아니다."
진혁의 눈동자가 깊은 흑색으로 물들었다.
"직접 증명하는 것이지."
[신천마신공(新天魔神功) 제7식 - 마도공명(魔道共鳴).]
진혁이 발을 구르는 순간, 지면이 폭발했다.
그의 몸이 뇌전의 궤적을 그리며 백무현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백무현이 휘두른 강철의 주먹이 허공을 갈랐지만, 진혁은 이미 그 궤적을 예측한 듯 한 뼘 차이로 비껴 나갔다.
검이 백무현의 가슴팍에 박혔다.
챙-!
단순한 타격음이 아니었다. 마기가 진동하며 백무현의 나노 회로를 내부에서부터 붕괴시키는 파괴음이었다.
"끄아아악!"
백무현이 괴성을 지르며 마기를 폭주시켰다. 생체로에서 뿜어져 나오는 붉은 에너지가 진혁을 덮쳤다.
하지만 진혁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만법귀마(萬法歸魔).]
그가 검을 비틀자, 백무현을 통해 흘러나오던 마기들이 마치 블랙홀에 빨려 들어가는 것처럼 진혁의 검을 타고 역류하기 시작했다.
"내 것은 모두 내 것이 된다."
진혁의 목소리는 얼음처럼 차가웠다.
백무현의 코어에서 흘러나오는 에너지는 이제 진혁의 단전으로 직행하는 통로가 되었다. 12,000 MW였던 출력 수치가 실시간으로 치솟았다. 15,000, 20,000, 30,000….
기계적인 한계를 넘어선 에너지가 진혁의 혈관을 타고 돌았다.
'부족하다. 더… 더 깊은 곳의 힘이 필요하다!'
진혁은 욕심을 냈다. 그는 단순히 백무현을 이기는 것을 넘어, 이 메인 생체로에 담긴 고대 마교의 근원적인 데이터와 에너지 그 자체를 집어삼키려 했다.
등 뒤의 마신 환영이 더욱 선명해졌다.
이제는 단순한 환영이 아니었다. 진혁의 그림자가 실제로 실체를 가진 것처럼 땅을 짚고 일어섰다.
[이건… 인간의 출력이 아니다. 데이터 범주를 벗어났다…!]
백무현의 음성이 공포로 떨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진혁의 천마검이 백무현의 코어를 정면으로 꿰뚫었다. 검끝에서 뿜어져 나온 마기장이 백무현의 전신을 찢어발겼다.
퍼억-!
피와 금속 파편이 뒤섞여 흩날렸다.
진혁은 그 핏빛 안개 속에서 고고하게 서 있었다.
그의 등 뒤에 자리 잡은 검붉은 마신이 서서히 손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진혁이 검을 내리그음과 동시에, 마신 또한 거대한 보이지 않는 손을 아래로 내리꽂았다.
쾅-!
메인 생체로의 방어막이 산산조각 났다.
진혁의 앞에 놓인 것은 더 이상 티타늄 그룹의 시설이 아니었다. 그것은 1,000년 전, 마교의 천마가 남겼다는 금단의 영역, 심연의 좌표였다.
"이것이 너희가 그토록 숨기고 싶어 했던 진실인가."
진혁이 문 너머를 응시했다.
차원 너머에서 수많은 안광이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신이라 불리는 존재들, 세상을 장기판 위의 돌처럼 다루던 고대 마신들의 시선.
진혁은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그는 검을 거두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단단히 움켜쥐었다.
"이제 사냥을 시작하지."
그의 발밑에서부터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더니, 이내 돔 전체를 뒤덮었다.
마신경의 정점에 도달한 강진혁. 이제 신서울의 하늘은 그를 위한 무대가 될 것이고, 차원 너머의 신들은 그가 휘두를 검의 제물이 될 터였다.
진혁이 한 걸음 내디뎠다.
그 한 걸음마다 공간이 일그러지고, 돔의 벽면이 비틀렸다.
완성된 신천마신공이 그의 전신을 타고 흐르며, 이제껏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시대의 마왕이 강림하고 있음을 알리고 있었다.
[경고. 심연의 문이 불안정함. 차원 좌표 동기화 시작.]
이제는 시스템의 경고조차 진혁의 의지 아래 굴복했다.
그는 문 너머의 어둠을 향해 천천히, 그러나 거침없이 걸어 들어갔다.
그곳에서 그를 기다리는 것은 1,000년 전 천마의 기록이자, 진혁 자신의 기원이 담긴 지옥이었다.
"기다려라."
진혁이 어둠 속으로 몸을 던졌다.
"너희들의 신화를 내가 직접 찢어줄 테니."
지하 3,500층의 돔이 거대한 폭발음과 함께 진동했다. 그것은 멸망의 전조가 아닌, 새로운 전설의 시작을 알리는 개벽의 서곡이었다.
어둠 저편에서 무언가 거대한 것이 꿈틀거렸다.
천 년의 세월을 벼려온 존재들.
하지만 진혁은 그들의 기척을 느끼며 오히려 더 크게 웃었다.
이곳에 있는 모든 것이, 오직 자신의 완성을 위한 영양분이 될 것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가 검을 휘두르는 순간, 돔은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오직, 세상의 모든 마기를 다스리는 단 한 명의 지존만이 남았다.
신천마(新天魔), 강진혁.
그의 사냥이 이제 막 시작되고 있었다.
어둠은 단순히 빛이 없는 공간이 아니었다. 그것은 차원의 밀도를 억지로 압축해 놓은, 끈적하고 기괴한 점액질과도 같은 물리적 질량이었다. 진혁은 그 심연의 아가리 속으로 거침없이 몸을 던졌다.
공간 도약(Dimension Shift).
나노머신과 마기가 하나로 융합되어 도달한 [신천마신공] 제9식의 경지였다. 진혁의 신체는 더 이상 입자가 아니었다. 그는 순수한 에너지의 흐름이 되어 차원의 틈새를 유영했다.
'느껴진다.'
심연의 저편, 수만 개의 차원 좌표가 거미줄처럼 얽혀 있는 그 중심부에 거대한 지적 생명체들의 의지가 꿈틀대고 있었다. 그들은 진혁을 '그릇'이라 불렀다. 1,000년 전, 천마의 육체를 복제하여 자신들의 의지를 투영할 강철의 요람으로 삼으려던 자들. 그들은 진혁이 시스템의 노예로 머물길 바랐으나, 진혁은 그 시스템마저 먹어치우며 그들의 예상을 뛰어넘는 변수가 되었다.
콰아아앙-!
진혁이 발을 딛자, 이계의 공간이 비명을 질렀다. 발밑에는 검은 수정으로 이루어진 불길한 대지가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하늘에는 태양 대신 핏빛으로 번뜩이는 거대한 '눈'들이 수백 개나 떠올라 진혁을 응시하고 있었다.
[침입자 감지. 실험체 07호, 규격 외 변이 발생.]
허공에서 기계적이면서도 동시에 신성한 기운이 뒤섞인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진혁은 피식 웃으며 천마검을 어깨에 걸쳤다.
"실험체는 진작에 폐기했다. 지금 서 있는 건, 너희들이 감히 이름을 올릴 수 없는 '천마'다."
그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핏빛 하늘에서 수천 가닥의 에너지 촉수가 쏟아져 내렸다. 그것은 차원과 차원을 잇는 사슬이자, 행성을 통째로 짓이길 수 있는 압도적인 질량의 공격이었다.
진혁은 검을 휘두르지 않았다.
단지, 왼손을 가볍게 쥐었을 뿐이다.
[만법귀마(萬法歸魔) - 역류(逆流).]
우주를 덮칠 듯 쏟아지던 촉수들이 진혁의 손아귀 앞에서 멈춰 섰다. 아니, 멈춘 것이 아니었다. 그들의 궤도가 비틀리고 있었다. 진혁이 자신의 단전으로 끌어당기는 거대한 인력(引力)에 의해, 그 모든 에너지가 진혁의 몸을 향해 역류하기 시작한 것이다.
"크으으…!"
촉수의 본체들이 경악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들이 쏟아낸 에너지는 진혁을 파괴하기 위한 것이었으나, 이제는 진혁의 마기를 증폭시키는 거대한 동력원이 되어 그의 혈관을 타고 쇄도했다.
[경고! 에너지 과부하 임계치 초과!]
내부의 회로가 비명을 질렀지만, 진혁은 멈추지 않았다. 그는 도리어 그 맹렬한 에너지의 흐름을 즐기며, 검신에 깃든 마기를 더욱 진하게 응축시켰다.
"이 정도 가지고는 턱없이 부족하다."
진혁이 검을 머리 위로 치켜들었다.
그의 등 뒤에 있던 마신의 환영이 서서히 진혁의 몸 안으로 녹아들었다. 이제 환영은 없었다. 진혁 그 자신이 마신이었고, 그 자신이 천마였다.
[신천마신공 제9식 - 천마멸진(天魔滅盡).]
검이 내려가는 순간, 세상이 정지했다.
단 한 번의 참격. 하지만 그것은 수만 개의 차원 결을 한꺼번에 가르는 일격이었다.
콰아아아아-!
검은빛의 파동이 핏빛 하늘을 가로질렀다. 하늘에 떠 있던 수백 개의 '눈'들이 비명을 지르며 산산조각 났다. 공간 자체가 종이처럼 찢겨 나가며 그 너머의 허무를 드러냈다.
고대 신들의 통곡이 차원의 틈새를 타고 메아리쳤다.
진혁은 피와 검은 파편이 비처럼 쏟아지는 대지 위에 묵묵히 서 있었다. 그가 지나온 자리는 폐허가 되었고, 그가 향하는 곳에는 오직 파멸만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것이 끝이 아니다.'
진혁은 고개를 들어 저 멀리 보이는, 심연의 가장 깊은 곳에 자리한 거대한 성채를 응시했다. 그곳에서 자신을 사육했던 설계자들의 본질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티타늄 그룹은 그저 하수인에 불과했다. 진짜 주인들은 이 우주 너머, 차원이라는 감옥을 설계한 자들이다.
진혁의 검끝에서 핏방울이 떨어졌다.
그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한 걸음마다 대지가 진동하고, 차원의 벽이 굴복했다.
그는 더 이상 시스템의 데이터가 아니었다.
스스로의 의지로 운명을 개척하고, 신들의 권능을 강탈하며, 끝내 자신만의 진리를 완성해 나가는 전무후무한 존재.
"기다려라."
진혁의 눈빛이 더욱 차갑게 빛났다.
"오늘, 이 사슬을 완전히 끊어내고 너희들의 왕좌를 박살 내주마."
심연의 성채를 향해 천마의 발걸음이 가속되었다. 신서울의 지하 3,500층에서 시작된 진혁의 복수는 이제 차원을 넘어, 신들의 영역을 향한 거대한 전쟁으로 변모하고 있었다.
진혁의 등 뒤로, 방금 전 베어버린 신들의 에너지가 칠흑 같은 오라가 되어 휘감겼다. 그는 이제 단순한 무인이 아니었다. 그는 마(魔)의 정점에 선 자이자, 신(神)을 도륙하는 재앙이었다.
멀리 성채의 문이 열리며, 인간의 상상을 초월하는 존재들이 진혁을 막아서기 위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진혁은 멈추지 않았다.
그는 검을 더욱 굳게 쥐었다.
이제야 비로소, 진짜 사투가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SYSTEM INFO: 시스템 데이터 완전 소멸. 독립 객체 '강진혁'에 의한 현실 개변(Reality Warping) 관측됨.]
더 이상 시스템의 로그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강진혁이라는 존재 자체가 하나의 시스템이자 법칙이 되어버린 순간.
그는 거침없이 성채의 심장부를 향해 돌진했다.
그의 검이 허공을 가를 때마다, 신들이 쌓아 올린 1,000년의 질서가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이것은 복수극이 아니었다. 이것은 오만한 신들에게 내리는, 참된 천마의 처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