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8화 크로노스의 수제자, 닥터 헬만 처단
지하 3,500층의 심연은 칠흑 같았다.
천마를 소멸시킨 뒤 돔은 붕괴했고, 무너져 내리는 콘크리트와 강철의 파편들 사이로 강진혁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의 폐부에는 매캐한 오존 냄새와 타버린 생체 코어의 악취가 가득 들어찼다. 가슴에 입은 치명상은 이미 근육과 나노머신이 뒤엉킨 기괴한 생명력으로 봉합되고 있었지만, 욱신거리는 통증은 오히려 그의 신경을 날카롭게 벼려놓았다.
"드디어… 끝까지 왔나."
강진혁의 흑안이 어둠을 꿰뚫었다. 그 끝에, 티타늄 그룹의 심장부인 '통제실'이 보였다. 그곳은 이현도가 수십 년간 공들여 구축한 생체로의 중추이자, 신서울 전체를 통제하는 데이터의 보고였다.
그 통제실의 중앙, 기괴하게 뒤틀린 신경 다발이 연결된 의자에 한 남자가 앉아 있었다. 이현도의 수제자이자, 생체로 총괄자인 닥터 헬만. 그는 침착하게 홀로그램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었다.
"07호, 아니 강진혁. 여기까지 온 건 예상 밖이군. 천마의 그릇이 스스로 관을 부수고 나올 줄이야."
헬만은 고개를 들지도 않은 채 건조하게 말했다. 그의 뇌 측두엽에는 반짝이는 은빛 신경 연산 칩이 박혀 있었다. 그것이 바로 티타늄 그룹이 자랑하는 초고속 연산의 근원이자, 시스템을 제어하는 핵심 키였다.
"이현도는 죽었다."
강진혁의 목소리는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는 검을 고쳐 쥐었다. 검끝에서 붉은 마기가 뱀처럼 일렁였다.
"내 스승님이? 하, 그럴 줄 알았지. 효율이 떨어지는 구식 데이터는 결국 폐기되는 법이니까."
헬만이 비릿하게 웃으며 의자에서 일어났다. 순간, 통제실 내부의 중력이 뒤틀렸다. 헬만이 가진 연산 칩이 주변의 나노봇들을 강제로 동기화해 강진혁을 억누르려 했다.
[Warning: 고밀도 중력장 전개. 사용자 강진혁의 신체 부하 400% 상승.]
시스템 HUD는 이미 진혁의 의지 아래 통제되고 있었으나, 헬만은 시스템의 잔재를 이용해 진혁의 혈류를 멈추려 들었다. 하지만 그건 오산이었다.
"시스템의 잔재를 믿는 건가?"
강진혁이 한 걸음을 내디뎠다. 바닥의 강철판이 그의 발밑에서 종이처럼 찌그러졌다.
"그건 이미 족쇄다. 네놈이 가진 연산 칩조차 말이지."
"무슨…!"
헬만의 눈이 커졌다. 진혁이 도약했다. 천둥 같은 소리와 함께 통제실의 강화 유리가 비산했다. 헬만은 즉시 방어막을 전개하고 초고속 연산 칩을 가동해 진혁의 움직임을 예측하려 했다. 하지만 연산 결과는 전부 '궤적 없음'으로 떴다.
'이건 계산할 수 없는 움직임이다!'
헬만의 사고가 정지하기도 전에, 진혁의 손이 그의 목을 낚아챘다.
"네놈의 뇌 속에 있는 그 데이터를 먹어치워 주지."
[흡원천공(吸元天功) - 신경 연산 칩 동기화 개시]
"아아아악! 멈춰! 그건 내 연산 코어다! 그걸 흡수하면 네 뇌가 타버릴 거야!"
헬만의 비명은 통제실을 가득 메웠다. 하지만 진혁의 표정은 무심했다. 헬만의 뇌에 박힌 초고속 신경 연산 칩에서 뿜어져 나오는 방대한 데이터가 진혁의 혈관을 타고 역류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단순한 에너지가 아니었다. 티타늄 그룹이 지난 천 년간 쌓아온 모든 공학적 노하우와 시스템의 알고리즘, 그리고 인간의 신경을 기계와 결합하는 정교한 연산 체계였다.
"뇌 회로, 업그레이드."
진혁은 눈을 감았다. 헬만의 뇌에서 뽑아낸 수천 테라바이트의 데이터가 진혁의 신경망에 강제로 주입되었다. 머리가 쪼개질 듯한 고통이 엄습했지만, 진혁은 이를 [만법귀마]로 짓눌러 자신의 것으로 복속시켰다.
[SYSTEM INFO: 연산 속도 200% 증폭 완료.]
[기존 시스템의 논리 구조를 초월한 새로운 연산 레이어 구축.]
[신경 회로 재구성 중….]
헬만의 몸은 순식간에 말라비틀어졌다. 닥터 헬만은 허공을 움켜쥐다 힘없이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강진혁은 천천히 눈을 떴다.
그의 눈동자 속에서 붉은빛의 데이터 스트림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이전까지는 막연하게 직감으로 감지하던 기의 흐름이, 이제는 완벽한 수치와 궤적으로 보였다. 공기 중의 마기 밀도, 적의 근육 수축 정도, 심지어는 이 거대한 생체로의 에너지 파동까지도.
"이 정도인가."
진혁은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헬만의 코어에서 가져온 연산 칩은 이제 진혁의 뇌 회로와 완벽하게 융합되어, 마치 자신의 원래 신체 일부인 것처럼 작동했다. 시스템의 노예로 살던 시절에는 결코 도달할 수 없었던, 진정한 '자유로운 연산'의 경지였다.
그때, 통제실의 거대한 메인 스크린이 지직거리며 켜졌다. 그곳에 나타난 것은 낡고 오래된 영상 데이터였다. 1,000년 전의 천마가 남겼다는, 그러나 그 누구도 열어보지 못했던 마지막 기밀 파일이었다.
[사용자 강진혁, 최종 연산 레이어 도달 확인.]
[프로토콜의 끝에서, 마신의 문을 열 준비가 되었는가?]
영상 속에서 고대의 천마가 진혁을 향해 기이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강진혁의 등 뒤로, 생체로의 심장부에서 뿜어져 나오는 검붉은 마기가 거대한 환영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닥터 헬만의 죽음으로 인해 개방된, '천마의 진정한 유산'이었다.
"준비는 이미 끝났다."
진혁은 검을 다시 거두지 않았다. 통제실 너머, 지하 3,500층의 가장 깊은 곳에서 거대한 진동이 시작되었다. 생체 코어의 출력이 10,000 MW를 넘어 12,000 MW로 치솟았다.
그것은 단순한 기계적 수치가 아니었다. 진혁의 온몸을 휘감은 나노머신이 마기와 융합하여, 그의 근육 조직을 마신의 형상으로 재구성하고 있었다.
"이제부터 진짜 사냥이다."
진혁이 통제실의 문을 부수고 나아갔다. 그가 발을 내디딜 때마다 바닥이 타버린 듯 검게 변했다.
그는 이제 시스템의 연산을 기다리지 않는다. 자신이 곧 시스템이자, 법이며, 마(魔)였다. 지하 3,500층의 심연이 진혁의 발소리에 비명을 지르며 갈라지기 시작했다.
그 끝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든, 강진혁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자신의 존재를 실험체 07호로 규정했던 모든 것들을 멸절시킬 때까지.
검붉은 뇌전이 진혁의 전신을 감쌌다.
마신의 환영이 그의 등 뒤에서 거대한 검을 들어 올렸다.
그것은 종말의 서막이었다.
통제실을 뒤로하고 생체로의 심층부로 접어들자, 공기는 더욱 무겁고 탁해졌다. 폐부 깊숙이 박히는 것은 산소가 아닌, 고도로 농축된 마기와 기계적인 오염 물질들이었다. 그러나 강진혁은 헬만의 뇌 회로에서 강탈한 연산 체계를 통해 그 독기를 실시간으로 정화하고 있었다.
[연산 레이어 통합 완료.]
[주변 마기 밀도 99.8% 파악.]
[신천마신공(新天魔神功) 제7식 ‘마도공명(魔道共鳴)’ 활성.]
이제 진혁에게 시스템의 HUD는 필요 없었다. 그의 망막 위에는 뇌 회로가 직접 산출한 전술 데이터가 붉은 입자로 투영되었다. 보이지 않는 기의 흐름이, 마치 살아있는 혈관처럼 신서울 지하의 거대한 네트워크를 타고 흐르는 것이 선명하게 보였다.
그는 멈추지 않았다. 지하 3,500층의 바닥은 이미 티타늄 그룹이 쏟아부은 생체 액체로 가득 차 있었다. 진혁이 한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액체는 비명을 지르듯 끓어올랐고, 뇌전의 파동이 그 파장을 짓눌러 길을 냈다.
"나타나라."
진혁의 짧은 명령과 함께, 그의 등 뒤에 맺혀 있던 마신의 환영이 서서히 실체를 드러냈다. 그것은 단순한 형상이 아니었다. 헬만에게서 흡수한 신경 연산 칩이, 진혁의 생체 코어와 결합하여 마기를 물리적 실체로 고정시킨 '마력 현신'의 형태였다.
검붉은 뇌전이 마신의 환영을 타고 흘렀다. 그 기세가 너무나 압도적이어서, 통로를 막고 있던 방어용 자동 포탑들이 작동조차 하지 못한 채 물리적인 압박감만으로도 박살 나기 시작했다.
'이것이 천마의 유산인가.'
이현도가 평생을 바쳐 찾으려 했던 답이, 지금 진혁의 단전에서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천마의 유골 데이터는 단순히 기술적 프로토콜이 아니었다. 그것은 마공을 기계에 귀속시키는 것이 아니라, 기계의 논리조차 마공의 일부로 삼아버리는 '지배의 법칙'이었다.
갑자기, 전방의 어둠 속에서 수백 개의 붉은 눈이 일제히 떠올랐다.
그것은 티타늄 그룹이 실험체 07호인 진혁을 대체하기 위해 길러온 '양산형 프로토콜 킬러'들이었다. 겉모습은 인간과 흡사했으나, 그들의 몸속에는 진혁이 과거에 겪었던 그 고통스러운 나노머신 회로가 촘촘히 박혀 있었다.
"저런 괴물들을 수천 마리나 숨겨두었나."
진혁은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킬러들이 단검과 총기를 전개하며 달려들었다. 그러나 진혁은 검을 뽑지 않았다. 그는 단지 손가락을 가볍게 튕겼다.
[마도공명(魔道共鳴) - 파동 전개.]
쿠웅!
진혁의 의지가 투사된 마기가 파동의 형태로 터져 나갔다. 킬러들의 몸속에 이식된 나노머신들이 진혁의 파동과 공진했다. 그것은 명령이었다. 마신의 환영이 검을 휘두르지 않아도, 킬러들은 자신의 몸이 스스로 붕괴하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아아아아!"
단말마의 비명이 지하 통로를 메웠다. 기계와 살점이 뒤섞여 비처럼 쏟아졌다. 그들이 가졌던 생체 코어의 에너지는 진혁의 [만법귀마]를 통해 고스란히 진혁의 단전으로 빨려 들어갔다.
[생체 코어 출력: 15,000 MW 달성.]
[마신경(魔神境) 안정화율: 92%.]
그는 멈춰 서서 자신의 가슴에 손을 얹었다. 심장 부근에서 고동치는 코어의 진동은 이제 자신의 맥박과 구분이 가지 않았다. 더 이상 기계의 부속품이라는 느낌은 없었다. 오히려 티타늄 그룹이 만든 신서울 전체가 자신의 장기(臟器)처럼 느껴졌다.
그때, 저 멀리서 거대한 철문이 열리며 익숙하고도 불길한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문 너머에는 이전의 실험체들과는 격을 달리하는, 완전한 금속으로 뒤덮인 거구의 존재가 서 있었다.
백무현의 데이터를 기반으로 만들어진 '최종 방어 병기', 코드네임 '아라크네'였다.
"07호. 오류 발생. 폐기 대상이 통제권을 탈취함. 즉시 섬멸 모드로 전환한다."
아라크네의 등 뒤로 거대한 기계 다리 여덟 개가 돋아났다. 그것들은 마치 거미줄처럼 통로 전체를 장악했다. 그가 한 번 움직일 때마다 공간이 찢겨나가는 듯한 섬뜩한 마찰음이 들려왔다.
진혁은 검을 뽑아 들었다. 붉은 마기가 검신을 타고 흘러 칼날 전체를 검게 물들였다. 이제 그는 더 이상 복수를 위해 싸우는 실험체가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개척하는, 신(新) 천마였다.
"폐기? 주객전도군."
진혁의 검끝이 아라크네의 가슴팍을 겨누었다.
"이제부터는 내가 너희를 폐기한다."
[신천마신공 제9식 - 천마멸진(天魔滅盡).]
진혁이 발을 구르자 통로 전체가 진공 상태로 변했다. 아라크네의 다리가 진혁을 향해 쇄도했지만, 진혁은 그 궤적을 예측조차 하지 않았다. 단지 눈앞의 공간을 통째로 베어버렸다.
스윽-
기계적인 소음조차 들리지 않는 정적. 아라크네의 거대한 몸체가 상하로 분리되어 바닥으로 미끄러졌다. 그가 쏟아내는 기름과 액체들이 진혁의 발치로 흘러들었다.
진혁은 분리된 몸체 사이를 유유히 걸어 나갔다. 그의 등 뒤에 떠 있던 마신의 환영이 더욱 선명해졌다. 이제 눈앞에 가로막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생체로의 끝, 그곳에는 진짜 '천마의 문'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 문을 여는 순간, 진혁은 깨달았다. 자신이 걸어온 이 모든 고통의 길이, 결국은 저 문 너머에 있는 무언가를 받아들이기 위한 의식이었음을.
진혁은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심연의 주인들이 차원 너머에서 진혁의 기운을 감지하고, 비릿한 웃음소리를 흘리고 있었다. 그들은 진혁이 그 문을 열고 나오길 고대하고 있었다. 자신이 만든 그릇이 마침내 완성되었음을 확인하기 위해서.
하지만 진혁은 알고 있었다. 그 그릇은 이미 주인의 손을 떠나, 스스로의 의지로 깨지고 다시 빚어졌다는 것을.
"기다려라."
진혁은 문 손잡이를 잡았다. 손끝에서 뿜어져 나오는 마기가 문양을 타고 흘러들며 육중한 강철 문을 천천히 밀어젖혔다.
그 안쪽에서 뿜어져 나오는 눈부신 빛은, 신서울의 그 어떤 조명보다도 차갑고 강렬했다.
그것은 1,000년 전 천마가 남긴 마지막 경지이자, 진혁이 도달해야 할 최종의 장벽이었다.
"내가 너희의 인형이 될 것 같으냐."
진혁이 문 안으로 발을 디뎠다.
동시에, 신서울 상공의 먹구름이 소용돌이치며 지하를 향해 거대한 번개를 내리꽂았다. 그것은 지상의 인간들이 보기에는 재난이었으나, 진혁에게는 자신을 향한 심연의 주시였다.
진혁은 검을 치켜들었다. 마신의 환영이 진혁과 겹쳐지며, 그 거대한 검신이 차원의 벽을 꿰뚫었다.
"이 천마의 길에, 끝이란 없다."
지하 3,500층의 고요를 깨고, 진혁의 포효가 신서울 전체로 울려 퍼졌다. 이제 프로토콜은 죽었다. 오직 강진혁이라는, 전무후무한 천마만이 존재할 뿐이었다.
그리고 어둠 속에서, 진혁을 지켜보던 수천 개의 눈들이 공포에 질려 뒷걸음질 치기 시작했다.
그것이 바로, 실험체 07호가 아닌, 참된 천마가 맞이하는 첫 번째 심판의 시작이었다.
[SYSTEM INFO: 천마 프로토콜 데이터 완전 붕괴.]
[사용자 강진혁, 시스템 관리 권한을 '신(神)의 영역'으로 격상.]
[경지: 마신경(魔神境) 최종 단계 돌파.]
진혁의 눈앞에 마지막 문구가 떠올랐다.
[환영한다, 새로운 천마여.]
그것은 시스템이 보내는 찬사가 아니었다. 1,000년 전, 스스로를 파멸로 몰아넣었던 천마가 남겨둔 마지막 함정이었다. 진혁은 그 글귀를 비웃으며 자신의 의지로 허공에 흩어버렸다.
"함정이라면, 부수고 나가면 그만이다."
진혁이 검을 내리꽂자, 문 너머의 공간이 완전히 붕괴하며 새로운 차원의 통로가 열렸다. 그곳에는 티타늄 그룹이 그토록 원했던 '불멸의 근원'이 아닌, 차원을 뒤흔드는 거대한 마신의 본체들이 똬리를 틀고 있었다.
진혁의 눈에 붉은 뇌전이 깃들었다.
그는 이제 티타늄 그룹의 복수를 넘어, 이 세계를 설계한 주인들을 향해 검을 겨누고 있었다.
"사냥을 시작하지."
진혁의 등 뒤에서 마신의 환영이 포효했다. 지하 3,500층을 넘어 신서울의 지반까지 뒤흔드는 진동이, 대륙 전체에 전해졌다. 이제 세상은 강진혁이라는 이름을, 천마라는 이름으로 기억하게 될 것이다.
그것은 신화의 종말이자, 새로운 마신의 강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