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6화 심장부의 함정
쿠구구구구-!
지하 3,500층의 마스터 돔을 받치고 있던 거대한 생체 기둥들이 무너져 내렸다. 천장을 뒤덮고 있던 배양관들이 일제히 터져 나가며 육체 복제용 영양액과 기괴한 유기물 찌꺼기들이 폭포처럼 쏟아졌다.
그 파괴의 중심, 붉게 타오르는 고대 마교의 문양이 새겨진 대문이 천천히 열리고 있었다.
문 너머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서늘했다.
기계유 냄새와 피비린내, 그리고 아주 오랫동안 봉인되어 있던 원초적인 마기(魔氣)의 악취가 엉켜 코를 찔렀다.
"크, 크학……! 07호…… 네놈은…… 끝까지……."
상체만 남은 백무현의 사이보그 잔해에서 연기가 피어올랐다.
노출된 인공 회로에서 지직거리는 불꽃이 튀었지만, 그의 잔존 뇌세포는 여전히 꺼지지 않은 집념으로 진혁을 노려보고 있었다. 백무현은 부서진 의수를 바닥에 처박으며 거대한 문 너머, 상층부 메인 생체로 진입로를 향해 기어가기 시작했다.
진혁은 검을 거두지 않은 채, 백무현의 뒤를 유유히 따라 걸었다.
뚜벅. 뚜벅.
합금 바닥을 짓밟는 진혁의 발소리가 거대한 통로에 기괴하게 울려 퍼졌다.
"기어갈 필요 없다, 백무현."
진혁의 건조한 목소리가 백무현의 정수리를 내리눌렀다.
"어차피 네놈이 도망칠 곳도, 네 주인이 숨을 곳도 저 너머일 테니까."
"흐, 흣…… 오만하구나, 강진혁. 이곳이…… 티타늄 그룹의 심장부이자…… 수석 연구원 이현도 님이 빚어낸…… 완벽한 처형장인 줄도 모르고……!"
백무현이 광기 어린 실소를 터뜨리는 순간, 진혁의 발걸음이 메인 생체로의 거대한 통로 중앙에 도달했다.
스슥-!
순간, 통로 벽면을 따라 박혀 있던 수천 개의 반도체 수성 코일이 일제히 은빛 광채를 발산하기 시작했다.
붕-!
귓가를 찢는 듯한 고주파음과 함께 진혁의 시야가 새하얗게 물들었다.
[Warning: 외부 차단 필드 감지.]
[경고: 고주파 공진 파동이 체내 나노머신을 교란합니다.]
[경고: 생체 코어 출력 급감 중……!]
진혁의 칠흑 같은 눈동자가 차갑게 식어 내렸다.
어깨 위로 가해지는 압력이 상상을 초월했다. 마치 수백 톤의 중력장이 한 지점에 집중되어 그의 전신을 짓눌러 오는 듯했다.
"이건……."
진혁이 눈을 감았다 뜨자, 통로 전면에 3D 프로젝터로 투영된 거대한 환영이 떠올랐다.
마르고 신경질적인 인상.
안경 너머로 광기 어린 눈빛을 빛내는 사내.
천마 프로토콜의 수석 설계자, 크로노스 이현도였다.
『반갑다, 실험체 07호. 아니…… 스스로를 '천마'라 착각하는 오만한 미물아.』
이현도의 녹음된 입체 영상이 비틀린 미소를 지었다.
『네놈이 백무현을 짓밟고 이곳까지 도달할 확률은 12.8%에 불과했다. 하지만 나의 계산은 단 한 번도 틀린 적이 없지. 네가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체내에 축적된 마기와 생체 코어의 동기화율이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이 트랩의 파괴력은 극대화되도록 설계되어 있었다.』
위이잉-!
진혁의 발밑에서 푸른빛의 구체 필드가 펼쳐졌다.
단순한 물리적 방어막이 아니었다. 공간 자체의 에너지를 왜곡시키는 극악의 특수 필드.
'내공 무력화 필드(Antagonistic Qi Neutralization Field).'
이현도가 한평생 고대 마교의 문헌과 현대 미립자 물리학을 융합하여 완성해 낸, '무인(武人) 전용 절대 처형장'이었다.
『인간의 내공이라는 것은 결국 생체 전위차와 정신적 의념이 결합된 특수 미립자의 흐름이다. 그리고 마기는 그 입자의 진동수가 일반적인 내력보다 수십 배나 높은 극단적인 형태지. 그렇다면 원리는 간단하다.』
이현도의 환영이 손가락을 튕겼다.
『마기의 진동수와 정확히 반대되는 위상의 역공진 주파수를 투사하면 어떻게 될까?』
쿠웅-!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진혁의 체내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윽……!"
진혁의 입가에서 붉은 피 한 줄기가 흘러내렸다.
극심한 통증이었다.
혈관을 타고 초당 3,600회 이상 미친 듯이 회전하던 [마혈회로(魔血回路)]가 순간적으로 굳어붙기 시작했다.
마기가 도는 기혈의 통로마다 잘게 부서진 유리 가루를 집어넣은 듯한 극통이 전신을 덮쳤다.
500,000 MW를 자랑하던 생체 코어의 출력이 미친 듯이 곤두박질쳤다.
[생체 코어 출력: 420,000 MW…… 280,000 MW…… 110,000 MW……]
[체내 나노머신 응고율: 68.4%]
[근육 조직 신경 전달 차단율: 89.1%]
"크하하하-! 보았느냐, 07호!"
바닥에 엎드려 있던 백무현이 피를 토하며 미친 듯이 웃어댔다.
"이것이 과학이다! 네놈이 아무리 고대의 무공을 깨닫고, 차원을 찢는 힘을 손에 넣었다 한들! 네 육체는 여전히 이 티타늄 그룹이 만든 나노머신과 생체 코어로 이루어져 있다! 근본을 부정할 수 있겠느냐!"
필드 내부에 흐르는 역공진 파동은 진혁의 혈도(穴道)를 하나하나 짓누르며 마기의 흐름을 강제로 역류시켰다.
주화입마(走火入魔).
현대 군사 공학이 의도적으로 만들어 낸 극상의 주화입마 상태였다.
"크윽……."
진혁의 무릎이 단단한 합금 바닥에 닿았다.
쿵, 소리와 함께 바닥이 거미줄처럼 갈라졌다.
손에 쥐어진 검마저 마기를 잃고 칙칙한 쇠붙이로 돌아가려 하고 있었다. 전신의 인공 근육이 마비되어 손가락 하나조차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었다.
『불쌍하군, 07호.』
이현도의 환영이 내려다보며 차갑게 속삭였다.
『너는 네가 시스템을 초월했다고 믿었겠지. 진무극 회장님을 베어 넘기고, 스스로 신이라도 된 줄 알았을 거다. 하지만 너는 그저 우리 기술력이 만든 가장 잘 빠진 피조물에 불과해. 부품이 주인을 거역할 수는 없는 법이다.』
위잉- 위잉- 위잉-!
생체로 상부 천장이 열리며, 십수 개의 플라즈마 집속 포탑과 대(對) 초인용 나노 해체 레이저가 진혁의 머리 위를 정밀 조준했다.
[목표: 실험체 07호 (강진혁)]
[상태: 내공 및 생체 코어 완전 억제 확인]
[처형 프로토콜 개시: 대상을 분자 단위로 해체합니다.]
붉은색 레이저 가이드가 진혁의 미간과 심장, 그리고 단전 부근에 정확히 고정되었다.
"끝이다…… 07호. 네놈의 그 오만함이, 결국 네 무덤을 판 거야!"
백무현이 광기 어린 눈으로 진혁의 처형 순간을 지켜보았다.
진혁은 고개를 숙인 채 움직이지 않았다.
입가에서 떨어진 피가 차가운 바닥을 적셨다. 전신의 신경망이 꺼져가고, 500,000 MW의 압도적인 단전 출력이 사방에서 조여오는 억제 필드에 갇혀 완전히 멈춰 서기 직전이었다.
시야가 어두워졌다.
수많은 시스템 경고창이 눈앞에서 붉은 비처럼 쏟아지다가, 이내 하나둘씩 오프라인으로 전환되며 사라져 갔다.
[코어 출력 마비……]
[기혈 회로 정지……]
[마기 운용 불가……]
모든 현대 기술의 산물이 멈춰 서고 있었다.
티타늄 그룹이 그에게 주었던 힘, 생체 코어의 출력, 나노머신의 연산 능력, 프로토콜의 보조 시스템.
그 모든 '기계적인 힘'이 이현도의 함정 속에서 완벽하게 침묵했다.
『잘 가라, 나의 위대한 실패작이여.』
이현도의 목소리와 함께, 천장에 달린 수십 개의 처형 포탑이 눈부신 백색 광선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공간을 증발시키는 초고온의 플라즈마와 분자 해체 레이저가 진혁의 정수리를 향해 폭포처럼 쏟아져 내렸다.
바로 그 순간.
모든 빛과 소리, 심지어 이현도의 연산 데이터마저 미처 감지하지 못한 심연의 최하층에서.
철컥.
진혁의 꺼져가던 단전 깊은 곳,
기계도, 시스템도, 이현도의 역공진 파동도 건드리지 못한 순수한 '마음의 공간'에서 아주 작은 스파크 하나가 튀어 올랐다.
그것은 생체 코어의 전력도, 나노머신의 반응도 아니었다.
구무림의 마지막 전승자, 독고운이 죽어가며 진혁의 뇌리에 각인시켜 주었던 단 하나의 가르침.
'무공은 전기로 돌리는 엔진이 아니다.'
'그것은 기계 따위가 가눌 수 없는…… 무인의 의념(意志)이자, 생명의 결의다.'
숙여진 진혁의 고개가 천천히 올려졌다.
칠흑 같던 그의 눈동자 속에서, 기계의 은빛 회로가 아닌, 순수한 혈빛 마도(魔道)의 불꽃이 이글거리며 타오르기 시작했다.
"이현도."
피범벅이 된 진혁의 입술이 비틀려 올라갔다.
"네놈은 무공(武功)을 너무 모르는군."
쏟아져 내리는 플라즈마의 백광 속에서, 멈춰 섰던 진혁의 심장이 쿵- 하고 거대한 대지의 울림처럼 뛰어올랐다.
쿵-!
심장이 한 번 박동할 때마다, 죽어 있던 전신의 마혈(魔穴)이 비명을 지르며 깨어났다.
이현도의 역공진 필드는 기계적인 진동수만을 계산해 낸 결과물이었다. 나노머신이 얽힌 혈관의 떨림, 생체 코어가 뿜어내는 에너지의 파동만을 상대로 설계된 완벽한 함정. 하지만 진혁이 지금 단전 깊숙한 곳에서 쥐어짜 낸 것은 기계적인 에너지가 아니었다.
그것은 뼛속까지 사무치는 살의(殺意)와,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도 스스로를 증명해 온 천마(天魔)의 고집이었다.
"크으으……!"
진혁의 등 뒤로 거대한 마영(魔影)이 일렁였다.
필드의 역공진 파동과 진혁의 의념이 정면으로 충돌하며 통로 전체가 비명을 질렀다.
-치이익! 콰직!
이현도가 설치한 메인 제어반에서 불꽃이 튀었다.
기계적인 연산으로는 도저히 해석할 수 없는 파동이었다. 뇌전도, 플라즈마도 아닌, 오직 순수한 인간의 정신력이 물리 법칙을 짓누르며 억지로 기혈의 물길을 터트리고 있었다.
『……말도 안 돼. 출력 수치가 측정 불가라고? 근육의 가동률이 0%인데 어떻게 에너지가 흐르는 거지?』
스피커 너머로 이현도의 당혹스러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는 지금 자신이 만든 신(神)의 함정이, 인간의 의지라는 가장 원초적인 변수 앞에 무너지고 있음을 믿을 수 없는 모양이었다.
"부품이 주인을 거역할 수 없다고 했나."
진혁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플라즈마 레이저가 그의 살갗을 태우며 지지직 소리를 냈지만, 진혁은 통증을 느끼지 않았다. 아니, 고통조차 마기로 치환해 심법의 동력으로 삼고 있었다.
"그럼 똑똑히 봐라. 너희가 만든 이 족쇄를, 어떻게 찢어발기는지."
진혁의 오른손이 검 손잡이를 꽉 쥐었다.
억제 필드의 반발력으로 인해 공기가 끈적하게 달라붙었으나, 진혁의 손은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다.
뇌신보(雷神步)를 밟을 필요도 없었다.
그는 단지 한 걸음을 내디뎠을 뿐이다.
-콰앙!
통로의 합금 바닥이 진혁의 발밑을 기점으로 화산 폭발처럼 솟구쳐 올랐다.
필드의 역공진 주파수가 진혁의 의념에 휘말려 제어력을 잃고 폭주하기 시작했다.
『경고! 시스템 과부하! 역공진 필드의 주파수가…… 내부 마기에 동기화되고 있습니다!』
"늦었다."
진혁이 검을 뽑지 않은 채, 그대로 전면을 향해 왼손을 뻗었다.
[만법귀마(萬法歸魔)].
적의 힘을 강제로 비틀어 자신의 영역으로 흡수하는 마공의 극의가, 필드 전체를 통째로 집어삼켰다.
"허억, 으아아악!"
바닥에 엎드려 있던 백무현이 경악하며 비명을 질렀다.
진혁의 몸을 누르던 필드의 중력장이, 도리어 백무현의 사이보그 육체를 짓누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백무현의 장갑판이 뒤틀리고, 내부의 동력원이 과부하로 인해 붉게 달아올랐다.
『멈춰! 필드 해제! 즉시 해제해!』
이현도의 다급한 명령이 떨어졌지만, 이미 필드의 제어권은 진혁의 손아귀에 있었다.
그는 필드를 끄는 대신, 그 안의 에너지를 자신의 단전으로 역류시켰다.
필드의 에너지가 진혁의 혈관을 타고 흐르자, 정지했던 생체 코어가 다시금 굉음을 내며 회전하기 시작했다.
[생체 코어 출력: 600,000 MW…… 800,000 MW……!]
[한계치를 초과했습니다!]
"이 정도 가지고는 부족하다."
진혁의 눈에 서린 흑광(黑光)이 통로 끝, 메인 생체로의 문을 뚫을 듯이 쏘아졌다.
필드의 에너지가 역류하며 고주파 레이저 포탑들이 차례로 터져 나갔다.
쾅! 쾅! 쾅!
불꽃놀이처럼 터지는 포탑 사이로 진혁이 천천히 걸어 나갔다.
그의 발걸음마다 통로 전체가 진동했다.
『이 괴물 같은 놈! 데이터 오류다, 이건 존재할 수 없는……!』
"데이터 너머를 봐라, 이현도."
진혁이 오른손에 쥐어진 검에 마기를 집중시켰다.
검은빛의 기운이 검신을 타고 흘러나와 거대한 검강(劍剛)을 형성했다.
"너희들이 말하는 '그릇'이 무엇인지, 오늘 똑똑히 증명해 줄 테니까."
진혁이 검을 휘둘렀다.
단순한 베기였다.
하지만 그 궤적은 공간의 틈새를 가르고, 억제 필드의 중심부를 정확히 꿰뚫었다.
-쿠구구구구-!
마스터 돔 전체를 감싸고 있던 내공 무력화 필드가 유리 조각처럼 박살 났다.
천장에 매달려 있던 수천 개의 전선과 회로들이 한꺼번에 단락(短絡)을 일으키며 암흑이 찾아왔다.
잠시 후, 붉은 비상등만이 켜진 통로.
진혁은 멈춰 서서, 박살 난 필드의 파편을 밟고 지나갔다.
그의 앞에는 메인 생체로로 향하는 거대한 문이 덩그러니 남겨져 있었다.
이제 함정은 없었다.
하지만 문 너머, 티타늄 그룹이 1,000년의 세월을 들여 완성하려 했던 '진짜 천마의 자취'가 진혁을 기다리고 있었다.
진혁은 검을 고쳐 잡았다.
이제는 시스템의 목소리도, 이현도의 조롱도 들리지 않았다.
오직 자신의 심장 소리만이 귓가에 웅장하게 울려 퍼질 뿐.
그는 망설임 없이, 붉은 문을 향해 발을 내디뎠다.
진정한 지옥의 문을 열기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