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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토콜: 천마 · 104화목차

제104화 심법(心法)의 가르침

사방을 짓누르던 살기가 한풀 꺾였다.

북쪽 경계 밖, 구구역의 잿빛 협곡.

차가운 바람만이 찢어진 대기를 맴돌 뿐이었다.

"거기까지다."

독고운이 손에 쥐고 있던 낡은 도목검(木劍)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검신은 이미 강진혁이 내뿜은 칠흑 같은 마기와 고주파 검강의 여파로 중앙이 쩍 갈라져 있었다.

챙―!

툭, 하고 부러진 목검의 반쪽이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그럼에도 그의 노안은 탁하기는커녕, 오히려 은은한 광채를 머금고 있었다.

진혁은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후우- 후우-

가슴속에서 요동치던 단전의 출력은 여전히 30,000 MW를 가리키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가리키고 있다는 '생각' 자체가 머릿속에서 희미해져 있었다.

더 이상 시야 한구석에 떠오르는 푸른색 HUD나, [Warning: 마기 폭주 위험도 12.4%] 같은 시스템 경고창은 존재하지 않았다.

모든 것은 그의 오감과 직관, 그리고 심장 깊은 곳에서 울리는 단전의 고동 소리에 의존하고 있었다.

"흡."

진혁이 낮게 숨을 내쉬며 검을 거뒀다.

개량형 천마검의 검신을 따라 흐르던 칠흑의 마기와 뇌전이 서서히 가라앉았다.

기계적 연산과 나노머신의 자동 보정이 사라진 자리를, 오롯이 자신의 의지로 다져진 내공이 채우고 있었다.

독고운이 텁스룩한 수염을 쓸어내리며 진혁을 바라보았다. 그의 입꼬리가 미소처럼 휘어졌다.

"대단하군. 기계 장치 따위에 의존하던 녀석이 단숨에 무인의 안광을 얻었어. 천마의 피가 흐른다는 소리만 들었지, 이토록 짧은 시간에 기계의 틀을 부수고 스스로의 심법을 깨우친 자는 천 년 전 마교 역사에서도 손에 꼽힐 것이다."

진혁은 침묵한 채 그를 응시했다.

방금 전까지 목숨을 걸고 부딪치던 상대였다. 하지만 그 안에서 진혁은 잊고 있었던 무언가를 깨달았다.

에너지의 수치.

코어의 출력.

나노머신 동기화율.

그동안 자신을 지탱해 주던 모든 숫자는 결국 타인이 짜 놓은 프로토콜의 안감에 불과했다.

독고운이 말하고자 한 것은 바로 그것이었다.

"심법(心法)."

진혁의 입에서 낮게 흘러나온 그 단어에 독고운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심법이란 단순히 내력을 모으는 운기조식의 법도가 아니다. 마음(心)으로 기(氣)를 부리고, 의(意)로써 검(劍)을 다스리는 근본이지. 현대의 녀석들은 그것을 '출력'과 '효율'이라는 차가운 숫자로 치환해 버렸어. 단전이 팽창하면 뭐 하겠나? 그 에너지를 온전히 제어할 마음의 그릇이 비어 있다면, 결국 스스로의 폭주에 뼈와 살이 으스러질 뿐이다."

독고운의 말이 귓가를 파고들었다.

문득 그동안 자신이 겪어왔던 수많은 전투가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티타늄 그룹의 실험체로 버려졌던 일, 하층 슬럼가에서 천마회를 쓸어버렸던 기억, 그리고 최근 최상층 마스터 돔에서 '프로토콜 00호'와 격돌했던 순간까지.

모든 순간마다 시스템은 최적의 경로를 계산해 주었다.

[적의 궤적 예측 완료. 3시 방향 회피 기동 실시.]

[마기 응축률 84.2%. 뇌전마강 전개 가능.]

하지만 그 계산이 빗나갔을 때, 혹은 시스템이 통째로 셧다운되었을 때 자신을 구원한 것은 계산기가 아니었다.

살고자 하는 집념, 적을 베겠다는 단 하나의 의지, 그리고 심장 안에서 끓어오르는 순수한 살기와 마기였다.

"네놈이 내게 건네준 그것."

진혁이 시선을 내렸다.

품속에 품고 있는, 독고운이 건네준 낡은 죽간이 미세하게 온기를 뿜어내는 듯했다.

천마교 초기 3대 비전 중 하나이자, 의념으로 단전을 열고 마기를 다스리는 법이 담긴 고대 죽간.

그것은 단순히 기술의 레시피가 아니라, 무인이 지녀야 할 정신의 궤적 그 자체였다.

독고운이 허리를 펴며 협곡의 바위산 위로 시선을 던졌다. 북쪽의 찬 바람이 그의 낡은 도포자락을 거칠게 흔들었다.

"나는 이만 가봐야겠군. 늙은이의 뼈마디가 이 찬바람을 오래 버티지 못해."

"어디로 가는 거지?"

진혁의 물음에 독고운은 너털웃음을 지었다.

"어디긴, 흩어진 구무림의 흔적이라도 찾아봐야지. 세상은 너 같은 젊은 혈기들이 기계 도깨비들을 때려부수며 뒤집어엎고 있지만, 그 밑바닥에는 여전히 지켜야 할 기억들이 남아 있거든."

말을 마친 독고운이 몸을 돌렸다.

그의 걸음걸이는 겉보기에는 평범한 노인의 그것과 다름없었지만, 발이 땅에 닿을 때마다 협곡의 자갈이 미세하게 가라앉았다가 떠오르는 기묘한 파동이 일었다.

보법(步法)의 극의.

내력과 육체가 완전히 하나로 융합된 자만이 보일 수 있는 경지였다.

슈우웅-!

바람 소리와 함께 독고운의 형체가 잿빛 안개 속으로 스며들듯 사라졌다.

진혁은 그가 떠난 자리를 말없이 바라보다가, 천천히 눈을 감았다.

쾅, 쿠구구구-!

귀를 멍하게 만드는 기계음이 멀리서 들려왔다.

신서울의 상층부 마천루와 구구역의 경계를 가르는 거대한 철제 방벽 너머에서, 티타늄 그룹의 잔당들이 재차 움직이는 기척이 느껴졌다.

시스템의 경고음은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대신, 진혁의 심장 박동 소리가 고요한 협곡 속을 채웠다.

쿵. 쿵. 쿵.

단전 안에서 소용돌이치는 30,000 MW의 마기가 폭풍처럼 회전했다.

하지만 이전처럼 불안정한 떨림은 없었다.

마기는 이제 진혁의 심장, 그리고 의지와 완벽하게 동기화되어 있었다.

마치 팔다리의 일부처럼, 아니 그보다 더 자연스럽게 육체 구석구석을 순환하며 폭발적인 에너지를 뿜어내고 있었다.

"후우……."

진혁이 눈을 번쩍 떴다.

그의 흑안 깊은 곳에서 칠흑 같은 마광(魔光)이 한 줄기 섬광처럼 스쳐 지나갔다.

[천마마안].

그것은 단순히 적의 기계를 투시하는 능력이 아니었다. 세상의 이치와 에너지의 흐름을 본질적으로 꿰뚫어 보는 통찰의 안광이었다.

진혁이 고개를 들어 신서울의 거대한 야경을 바라보았다.

불야성을 이루는 상층 마천루의 꼭대기, 그 너머에 숨겨진 '진짜 주인'의 존재.

이현도가 소멸 직전 남긴 유언이 머릿속을 스쳤다.

『티타늄 그룹의 진짜 주인은…… 훨씬 더 깊은 곳에 있다…… 네가 부순 것은 그저 장난감에 불과해……!』

장난감.

그래, 지금까지 자신이 부수어온 모든 것은 그 거대한 시스템의 파편에 불과했다.

인간을 오직 데이터와 생체 코어의 부품으로만 취급하며, 세상을 거대한 감옥으로 만들려 하는 자들.

진혁의 입가에 차갑고도 잔인한 미소가 떠올랐다.

"깊은 곳에 있다면…… 기어 올라가서 직접 끌어내리면 그만이다."

치이익-!

진혁의 손에 쥐어진 개량형 천마검의 검신에서 칠흑의 마기와 푸른 뇌전이 동시에 튀어 올랐다.

초고주파 진동이 공기를 잘게 찢으며 날카로운 파열음을 냈다.

과거에는 시스템이 명령하고, 자신이 그에 맞춰 몸을 움직였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오직 나의 의지가 곧 프로토콜이고, 나의 검이 곧 천마의 법도다.

스으윽.

진혁의 발이 바닥을 박차는 순간,

파직, 지지직-!

소리도 남지 않았다.

그가 서 있던 자리에 남은 것은 오직 칠흑 같은 잔상과, 대지를 두 쪽으로 갈라놓을 듯한 거대한 마기의 파동뿐이었다.

[마광신보 - 극(極)]!

진혁의 형체가 어둠 속으로 완전히 녹아들며, 신서울의 거대한 어둠을 향해 사자처럼 질주하기 시작했다.

푸른 뇌전의 잔상이 잿빛 협곡의 대기를 두 동강 내며 쏘아져 나갔다.

콰아아앙!

진혁의 발길질 한 번에 협곡의 바닥이 거미줄처럼 갈라지며 파편이 사방으로 비산했다.

과거였다면 시스템의 자세 제어 프로그램이나 나노머신의 가속 보조가 개입했을 지점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진혁에게는 그런 기계적 보조 장치가 일절 존재하지 않았다.

오직 자신의 두 다리와 단전에서 뿜어져 나오는 30,000 MW의 순수 마기, 그리고 머릿속이 아닌 심장으로 계산하는 직관만이 존재할 뿐이었다.

'가볍다.'

체감하는 속도는 이전보다 몇 배는 더 빨라져 있었다.

시스템의 연산 지연 시간(Latency) 따위는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았으니까.

의지가 곧 행동이었고, 생각이 곧 궤적이었다.

슈우우우-!

칠흑 같은 잔상을 남기며 구구역의 낡은 철도 폐허를 가로지르던 진혁의 눈이 홀연히 가늘어졌다.

[천마마안]이 발동하며 세상의 빛과 파동이 일그러졌다.

순간, 전방의 대기 속에서 미세한 굴절이 감지되었다.

치이익―.

공간의 왜곡.

빛을 흡수하는 특수 광학 스텔스 회로와, 주변의 마기 파동을 상쇄하기 위해 설치된 저주파 감쇄 필드의 흔적이었다.

"숨어 있는 쥐새끼들치고는 파동이 제법 요란하군."

진혁의 입가에 냉소적인 미소가 걸렸다.

동시에 그의 오른손에 쥐어진 개량형 천마검이 미세하게 떨렸다.

스으응-!

적의 존재를 포착하자마자 검신을 감싸고 있던 칠흑의 마기와 고주파 진동이 스스로 요동치기 시작했다.

적의 에너지를 베어낼수록 진화한다는 '하드웨어 무한연성'의 특성이 진혁의 의념과 동기화되어 스스로 최적의 참격 형태를 구축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더 이상 프로토콜의 알고리즘이 만들어낸 계산식이 아니었다.

검을 쥔 무인의 살기와, 상대를 단숨에 찢어발기겠다는 본능적인 의지가 융합되어 태어난 살아 있는 기운이었다.

파직! 지지지직-!

"거기서 기어나와라."

진혁이 가속하던 발을 바닥에 강하게 박으며 몸을 비틀었다.

동시에 허공을 향해 검을 가로로 휘둘렀다.

콰아아앙!

[뇌전마강 - 십자참(十字斬)]!

검광이 지나간 자리에서 칠흑의 마기와 푸른 뇌전이 십자 형태로 폭발했다.

단순한 에너지의 방출이 아니었다. 공간의 결합 부위를 고주파 진동으로 공진시켜 완전히 붕괴시키는 파괴적인 참격이었다.

콰지지직-! 쾅!

"크억?!"

"기습이…… 들켰다?!"

공간의 왜곡이 풀리며 허공에서 요란한 파열음과 함께 네 사람의 형체가 튕겨 나왔다.

검은색 특수 엑소스트 수트를 착용하고, 전신에 마기 감쇄 파동 발생기를 장착한 정예 암살자들이었다.

티타늄 그룹의 은형(隱形) 정예 암살 부대, [스펙터(Spectre)].

그들은 진혁과 구무림 노고수(독고운)의 접선 현장을 포착하고 은밀히 뒤를 밟아온 참이었다.

하지만 진혁의 압도적인 감각과 [천마마안]의 통찰력은 그들의 완벽한 스텔스마저 완벽하게 간파해 낸 것이다.

"이 녀석……! 어떻게 우리의 광학 스텔스를……!"

스펙터의 대장이 경악에 찬 목소리로 소리쳤다.

그의 손에는 고주파 분자 절단용 나노 블레이드가 들려 있었지만, 진혁이 뿜어내는 살기에 압도되어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진혁은 그들의 질문에 대답할 가치조차 느끼지 않았다.

슈우웅!

다시 한번 [마광신보 - 극(極)]이 발동했다.

진혁의 잔상이 허공에 흩어지기도 전에, 그의 형체는 이미 스펙터 대장의 코앞에 도달해 있었다.

"커헉!"

대장의 눈이 사정없이 커졌다.

진혁의 손이 그의 목덜미를 덥석 움켜쥐었기 때문이다.

단전에서 치솟은 칠흑의 마기가 대장의 엑소스트 수트 장갑을 그대로 찌그러뜨리며 내부의 생체 코어를 강압적으로 파고들었다.

[흡원천공 - 개량(改)]!

지이익-!

"아아아아아악―!"

대장의 몸 안에서 고출력 생체 코어의 에너지가 강제로 빨려 나오기 시작했다.

과거에는 시스템의 연산 보조를 받아야만 안정적으로 정제할 수 있었던 타인의 기운이었지만, 지금의 진혁은 오직 자신의 의지와 심법만으로 그 에너지를 거침없이 단전 속으로 흡수해 소화해 냈다.

후두두둑!

에너지를 전부 빨려 굳어버린 대장의 시체를 바닥에 내던지며, 진혁이 나머지 세 명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의 흑안에서 번뜩이는 살기는 이미 인간의 영역을 아득히 벗어나 있었다.

"두 번째 쥐새끼들 차례다."

서늘한 음성이 잿빛 협곡의 바람을 타고 울려 퍼졌다.

남은 스펙터 대원들이 공포에 질려 물러서려 했지만, 진혁의 검은 이미 그들의 목을 향해 치켜올라간 뒤였다.

쾅, 쿠구구구―!

신서울의 거대한 밤하늘 아래, 진혁의 반격은 이제 막 시작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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