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2화 잊혀진 무인 독고운
차가운 밤기운이 북쪽 구구역(舊區域)의 잿빛 협곡을 스쳐 지나갔다.
수백 년 동안 문명의 손길이 닿지 않은 이곳은 철근과 콘크리트가 썩어 문드러진 거대한 무덤가와도 같았다.
메가 코퍼레이션의 감시 카메라도, 하늘을 가르는 비행정의 소음도 닿지 않는 곳.
오직 바람 소리와 메마른 모래가 뒹구는 소리만 가득한 협곡의 중심부에서, 강진혁은 천천히 걸음을 멈추었다.
지이잉-.
시야각 구석에 떠 있던 붉은색 오류 경고창은 이미 영구적으로 꺼져 있었다.
헤븐리 파운데이션의 메인 네트워크를 박살 내고, 이현도의 잔존 의식을 소멸시킨 직후부터 진혁의 시야는 완전히 순수한 인간의 눈으로 돌아와 있었다.
시스템의 보조 HUD가 없었다.
적의 공격 궤적을 미리 계산해 주던 연산 보정도 사라졌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온몸의 신경은 그 어느 때보다 날카롭게 깨어 있었다.
‘……기계가 아니야.’
진혁의 흑안이 협곡의 어둠 속을 응시했다.
방금 전, 자신의 단전 출력을 시험하듯 가볍고 날카로운 기세를 날려보냈던 상대.
낡은 도포를 걸치고 기계 장치라고는 눈 씻고 찾아볼 수 없는 생체 육신 그대로 서 있던 노인.
그가 품고 있는 것은 철저히 고대(古代)의 기운이었다.
티타늄 그룹의 생체 코어나 나노머신의 출력이 뿜어내는 기계적 파동이 아니라, 인간의 단전에서 우러나오는 순수한 내력(內力)의 파동.
사박.
모래를 밟는 미세한 소리와 함께 협곡의 그림자 속에서 그 노인이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은발을 질끈 묶은 낡은 상투, 허리춤에 대충 꿰어 찬 녹슨 도검, 그리고 수십 년은 입은 듯 해진 남루한 도포 자락.
기계 시술의 흔적인 은빛 회로 선 하나 찾아볼 수 없는 온전한 육신이었다.
노인의 이름은 아직 듣지 못했다.
그러나 진혁의 예민해진 [천마마안(天魔魔眼)]은 그 노인의 몸이 하나의 거대한 검집이자, 그 자체로 완숙한 무예의 경지임을 단번에 꿰뚫고 있었다.
“기계 냄새가 진동을 하는구나.”
노인, 독고운이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쉰 듯하면서도 쇳소리가 섞이지 않은 맑은 음성.
그것은 수십 년간 말을 아끼고 오직 호흡과 검에만 집중해 온 자만이 낼 수 있는 소리였다.
“네놈의 단전에서 뛰는 건 심장의 박동이 아니야. 거대한 원자로의 고주파 진동이지. 쯧, 불쌍한 아이야. 기계 따위에 몸을 의탁하고도 그것이 힘이라 착각하다니.”
독고운의 시선이 진혁의 가슴 부근에 멈췄다.
지금은 30,000 MW로 하향 안정화되어 있으나, 그 안에는 여전히 수만 명의 코어 출력을 집어삼킨 칠흑 같은 마기가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진혁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천천히 오른손을 들어 허리춤에 차인 검을 잡았다.
스으윽-.
천우진이 만들어 준 개량형 천마검.
적의 에너지를 베어낼수록 스스로 진화하도록 설계된 그 검에서 미세한 고주파 진동음이 울렸다.
기계공학의 결정체인 검과, 일천 년 전 고대 마교의 마기가 융합된 흉기.
“기계가 힘을 준 게 아니다.”
진혁의 입술이 열렸다. 목소리는 차갑고 단단했다.
“내가 그 힘을 뺏어온 거지.”
“호오.”
독고운의 눈빛이 미세하게 반짝였다.
늙은 무인의 눈동자 속에 진혁의 모습이 또렷하게 박혔다.
“말은 번지르르하구나. 네놈이 휘두르는 그 무기가 진정 네 손으로 깨달은 검인지, 아니면 머릿속에 심어진 회로가 시키는 대로 움직이는 인형의 도구인지…… 내 직접 확인해 주마.”
투우우웅-!
노인의 몸에서 거대한 기세가 폭발했다.
쾅!
그가 서 있던 협곡의 바닥이 사방으로 쩍쩍 갈라지며 모래먼지가 해일처럼 치솟았다.
‘……!’
진혁의 눈이 경직되었다.
내력의 운용 방식이 티타늄 그룹의 특수부대나 S급 사이보그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나노머신의 출력을 끌어올려 신체를 강제 가속하는 방식이 아니었다.
노인의 몸짓 하나하나는 철저히 자연의 섭리와 기혈의 흐름 그 자체에 맞물려 있었다.
심장과 단전의 박동이 완벽하게 일치된 상태.
외부의 시스템이나 인공지능의 보조 없이, 오직 수십 년간 갈고닦은 심법(心法)만으로 공간의 기류를 지배하고 있었다.
‘이것이…… 고대 무림의 심법인가.’
진혁은 1,000년 전 천마의 유골 데이터를 흡수하며 마공의 원리를 깨달았지만, 이렇게 순수한 인간의 육체로 극에 달한 무예를 눈앞에서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슈우우욱!
독고운의 몸이 잔상조차 남기지 않고 사라졌다.
‘빠르다……!’
시야각에 시스템의 예측선이 없었다.
오직 온몸의 감각과 [천마마안]에 의존해야만 하는 극한의 상황.
진혁의 본능이 번개처럼 반응했다.
[마광신보(魔光神步) - 극(極)]!
칠흑의 잔상이 협곡을 가로질렀다.
쾅-, 하는 폭음과 함께 진혁이 서 있던 자리에 거대한 검강(劍剛)이 내리꽂혔다. 모래와 바위 조각들이 비처럼 쏟아졌다.
파앗!
바닥을 박차고 공중으로 솟구친 진혁의 눈앞에 독고운의 형상이 나타났다.
늙은 무인은 어느새 진혁의 사각지대도 아닌 정면으로 파고들어 녹슨 도검을 스윽 밀어 올리고 있었다.
화려한 기술도, 시각을 어지럽히는 홀로그램 투사도 없었다.
오직 검 끝에 모인 순수한 내력의 압축만이 공간을 찢어발기고 있었다.
챙기이잉-!
진혁이 급히 천마검을 가로막았다.
두 검이 부딪치는 순간, 뇌전과 마기가 뒤섞인 충격파가 사방으로 뻗어나갔다.
“크흣……!”
진혁의 미간이 좁혀졌다.
단전의 출력은 30,000 MW에 달했음에도 불구하고, 노인의 검끝에서 전해져 오는 충격은 단순히 물리적인 출력을 넘어 진혁의 기혈 자체를 흔들어 놓고 있었다.
내력이 신경을 타고 흘러와 단전을 직접 타격하는 느낌.
이것은 기계의 장갑으로는 막을 수 없는, 순수한 무공의 경지였다.
“제법이구나.”
독고운이 검을 맞댄 채 낮게 읊조렸다.
그의 얼굴에는 놀라움과 함께 씁쓸한 회한이 서려 있었다.
“출력만 높으면 다 되는 줄 아는 현대의 괴물딱지들과는 다르다. 네놈의 몸속에는 분명 마교의 진짜 피가 흐르고 있어. 하지만…….”
노인의 눈빛이 매섭게 빛났다.
“그 검은 늙었다. 아니, 너무 많은 것을 담으려다 썩어 문드러지고 있지.”
슈우우욱!
독고운의 검이 밀고 들어왔다.
진혁은 뒤로 물러서며 [천마무상체(天魔無相體)]의 마기 방벽을 전개하려 했다.
그러나 노인의 검은 마기 방벽의 결합 구조를 정확히 꿰뚫고 있었다. 방벽의 약한 맥점을 정밀하게 찌르는 날카로운 진동.
콰지지직-!
‘이 노인…… 내 방어의 허점을 단번에 파악했다고?’
진혁은 경악하며 몸을 날렸다.
수많은 S급 초인들과 싸워왔고, 수많은 메카니컬 시스템의 계산을 뚫어온 그였다. 하지만 이 도포를 걸친 늙은 무인은 기계의 계산식이 아니라, 인간의 직관과 통찰력만으로 진혁의 마기 궤적을 읽어내고 있었다.
착지한 진혁의 부츠 아래로 모래가 거칠게 튀었다.
숨이 약간 가빠졌다. 온몸의 근육과 세포들이 노인의 검에 스친 여파로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독고운은 추격하지 않았다.
그는 녹슨 도검을 거두어 가슴 앞에 가로지른 채, 차분한 눈빛으로 진혁을 바라보았다.
“숨이 차는가, 아이야?”
진혁은 말없이 검을 고쳐 잡았다.
심장 부근에서 끓어오르는 마기가 거칠게 요동쳤다. 시스템의 제어가 없기에 폭주 위험도가 미세하게 상승하고 있었다.
하지만 진혁의 눈빛에는 두려움 대신 서늘한 광기가 피어올랐다.
‘재미있군.’
기계에 의존하지 않고, 오직 인간의 육체와 의지, 그리고 무예만으로 자신을 이토록 압박하는 존재.
티타늄 그룹의 회장 진무극도, 메카 크로노스도 결국은 기술과 시스템의 노예에 불과했다.
하지만 이 노인은 달랐다. 그는 철저히 자기 자신의 힘만으로 천 년 전 마교의 무예를 이어받아 살아남은 진짜 무인(武人)이었다.
“기계가 아니라고 해서 내 검이 썩었다고는 생각하지 마라.”
진혁의 입꼬리가 호선을 그리며 올라갔다.
칠흑 같은 흑안 속에서 푸른 뇌전이 스물스물 기어 나왔다.
“네놈의 검이 얼마나 버틸 수 있는지, 직접 시험해 주마.”
후우우우-!
진혁의 등 뒤로 거대한 마기의 파도가 솟구쳤다.
시스템의 보조 없이, 오직 자신의 의지만으로 폭발시킨 단전의 30,000 MW 출력이 협곡 전체의 대기를 뒤흔들었다.
독고운의 눈빛이 비로소 진지하게 변했다.
노인은 천천히 검을 들어 올리며 중얼거렸다.
“그래. 그 광기야말로 천마(天魔)의 잔재지. 와라, 아이야. 네가 가진 그 모든 것을 보여 다오.”
쿠구구구구-!
북쪽 구구역 협곡의 모래바람이 멈추고, 두 사람의 기세가 정면으로 충돌하기 직전의 폭풍전야 같은 침묵이 내려앉았다.
쿠르릉……!
대지가 두 사람의 기세에 눌려 미세하게 진동했다.
기계의 연산 장치도, 인공지능의 확률 계산도 없는 순수한 무력의 충돌.
오직 인간의 의지와 내력, 그리고 목숨을 건 육체적 감각만이 공간을 지배하고 있었다.
"하압!"
진혁이 먼저 움직였다.
[마광신보 - 극(極)].
빛의 궤적조차 남기지 않는 고속의 이동. 하지만 이번에는 시스템의 자동 보정 경로가 없었다. 오직 진혁의 두 눈이 포착한 공기의 흐름과, 피부로 느껴지는 기류의 변화만이 이동할 궤적을 결정했다.
슈우우웅!
협곡의 공간이 순식간에 찢어졌다.
진혁의 몸이 독고운의 측면으로 파고들며 개량형 천마검을 비스듬히 쳐올렸다.
초고주파 진동과 칠흑의 마기가 융합된 [고주파 마검강]이 허공을 가르며 노인의 목을 노렸다.
챙그랑-!
소름 끼치는 금속음이 울렸다.
독고운은 뒤로 물러서지 않았다. 그는 도심의 폐허 속에서 갈고닦은 노련한 보법으로 몸을 반 바퀴 회전시키며, 자신의 녹슨 도검으로 진혁의 검신을 정확히 후려쳤다.
파지직-!
검과 검이 부딪치는 지점에서 새하얀 불꽃이 사방으로 튀었다.
순수한 내력과 칠흑의 마기가 부딪치며 발생하는 충격파가 협곡 양옆의 바위벽을 무참히 박살 냈다.
'이 노인……!'
진혁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자신의 검에 담긴 힘은 30,000 MW의 출력을 고스란히 담고 있었다. 웬만한 S급 생체 코어 착용자라면 검이 부러지는 것과 동시에 전신이 짓뭉개져 즉사했을 터였다.
그러나 독고운은 단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은 채, 그 거대한 충격을 온몸의 기혈로 분산시키며 받아내고 있었다.
"힘만 앞서는구나."
독고운이 나직하게 읊조렸다.
그의 낡은 도포 자락이 폭풍에 휘날리며 펄럭였다.
"검은 무게로 치는 것이 아니다. 기(氣)의 흐름을 타고 흐르는 물과 같아야 하는 법. 너는 그 거대한 에너지를 억지로 우겨넣고 있을 뿐이다."
콰아아앙!
노인의 검에서 폭발적인 내력이 밀려 나왔다.
화산파(華山派)의 극의(極意)인 '자하신공(紫霞神功)'의 진수.
보랏빛으로 은은하게 물든 내력의 파도가 진혁의 마기 방벽을 거칠게 밀어붙였다.
"크윽……!"
진혁은 압도적인 내력의 압박감에 저도 모르게 반 걸음 뒤로 물러섰다.
단전에서 끓어오르던 30,000 MW의 마기가 요동치며 혈관을 타고 역류하려 했다. 기계의 보조가 없는 상태에서 무리하게 힘을 충돌시킨 반작용이었다.
그러나 진혁은 눈을 부릅떴다.
물러서는 순간, 이 노인의 검세에 완전히 압도당해 무인으로서의 자아를 잃어버리게 된다.
시스템이 없기에 오직 자신의 의지로만 이 압박을 버텨내야 했다.
'내 안의 힘은 기계가 준 껍데기가 아니다……!'
진혁의 흑안이 순식간에 핏발치며 흉포한 광채를 뿜어냈다.
이것은 천마의 잔재이자, 자신이 수많은 시체를 밟고 올라와 완성한 진짜배기 마기였다.
머릿속의 회로가 멈추자 비로소 온전한 자신의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두두두두두-!
진혁의 심장이 미친 듯이 뛰며 전신으로 폭발적인 피를 뿜어냈다.
단전에 응축되어 있던 칠흑 같은 마기가 순식간에 온몸의 경락을 타고 역류해 천마검으로 집중되었다.
오우우웅-!
개량형 천마검이 마치 살아 움직이는 생물처럼 울부짖었다.
적의 에너지를 흡수하며 진화해 온 검은, 노인의 강력한 내력마저 집어삼킬 듯이 시뻘건 마광(魔光)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오호라……?"
독고운의 눈동자가 처음으로 크게 흔들렸다.
기계의 힘에 의존하는 줄 알았던 젊은이가, 방금 전의 충격 속에서 스스로 기혈을 재정비하고 한 차원 더 높은 경지로 내력을 끌어올리는 모습.
그것은 가르쳐서 되는 경지가 아니라, 수많은 사지(死地)를 넘나들며 터득한 자만이 가질 수 있는 처절한 투혼이었다.
"이것이 내 검이다."
진혁의 입술 사이로 피가 흘러내렸지만, 그의 미소는 잔인할 정도로 선명했다.
슈아아아아-!
진혁의 몸이 공중으로 솟구쳤다.
머리 위에서 아래로 내리꽂히는 일격.
시스루(System-Route)의 유도선도, 인공지능의 궤적 예측도 없었다.
오직 진혁의 직관과 눈앞에 선 노인을 베어버리겠다는 단 하나의 의지만이 담긴 참격.
[천마일검(天魔一劍) - 개량(改)]!
콰아아아아아아-!
칠흑의 마기와 푸른 뇌전, 그리고 초고주파 진동이 하나로 융합된 거대한 참격이 협곡 전체를 두 쪽으로 갈라놓았다.
바닥이 수십 미터 아래로 꺼지고, 거대한 폭풍이 사방으로 뻗어나가며 모래먼지가 하늘을 뒤덮었다.
독고운은 그 압도적인 참격을 향해 가만히 도검을 치켜들었다.
콰궁-!
지상 최대의 격돌이 북쪽 구구역의 밤하늘을 암흑으로 물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