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3화 종장: 유유자적, 영원히 꺼지지 않는 밥 한 끼의 영지
달그락, 달그락.
싱크대 위에서 자그마한 스텐 국그릇이 부딪히는 맑은 소리가 밤안개처럼 자욱한 주방의 공기를 부드럽게 흔들었다.
앞치마의 허리끈을 질끈 동여맨 정순이 물기가 묻은 손을 툭툭 털며 뒤를 돌아보았다.
"여보, 거기 서서 뭐 해요? 어서 식탁에 앉아요. 찌개 식는다니까요."
식탁 위에는 뚝배기에서 모락모락 하얀 김을 피워 올리는 구수한 된장찌개와 방금 고슬고슬하게 지어낸 하얀 쌀밥 한 공기가 정갈하게 놓여 있었다.
바지락의 시원한 감칠맛과 애호박의 달큰한 향이 좁은 거실 구석구석을 따스하게 채우고 있었다.
철수는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식탁 의자에 가볍게 앉았다.
수십 년 동안 목숨을 걸고 자본주의 무림의 찬바람을 헤쳐 나간 끝에 마침내 다다른 종착지, 그곳은 화려한 황금궁궐도 거대한 자립 영지도 아니었다.
사랑하는 아내와 마주 앉아 뜨거운 밥 한 끼를 온전히 나누는 바로 이 소박한 저녁 식탁이었다.
숟가락을 들어 국물을 한 입 떠넣자, 깊고 진한 된장의 풍미가 혀끝을 감돌며 온몸의 굳어 있던 혈맥을 스르륵 녹아내리게 만들었다.
"크으, 참으로 맛이 좋구나."
"뭐가 그리 맛이 좋아요? 매일 먹는 된장찌개면서. 오늘따라 우리 남편이 참 시인처럼 굴네."
정순이 숟가락으로 밥을 조심스럽게 떠먹으며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철수는 그 싱그러운 미소를 눈에 담으며 속으로 깊이 고요를 삼켰다.
과거 80대의 요양병원에서 병마와 싸우며 눈물 흘리던 아내의 모습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
오직 생기가 넘치고 눈이 반짝이는 서른 살의 정순이 제 앞에 살아 숨 쉬고 있었다.
이것이야말로 140년의 세월을 돌고 돌아 얻어낸 가장 완벽하고 위대한 보물이었다.
저녁 식사를 기분 좋게 마치고 난 철수는 곧바로 주방의 설거지통을 향해 걸어갔다.
"가만있어요, 여보. 오늘은 내가 할 테니까."
"아니다. 내가 하마. 밥을 지어준 사람이 있으면 그릇을 씻는 이도 있어야 하는 법이지."
철수가 고무장갑을 척 끼우며 씩 웃었다.
수억 원의 자산을 굴리며 세계 경제의 흐름을 쥐고 흔들던 절대고수의 손길이었으나, 지금은 그저 뽀득뽀득 소리가 나도록 사기그릇을 정성스럽게 닦아내는 평범한 가장의 손길이었다.
그릇을 차곡차곡 건조대에 얹고 나니 온몸이 가뿐해졌다.
철수는 거실을 가로질러 베란다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후두둑, 하고 가을밤의 선선한 바람이 베란다 창살 틈새를 비집고 들어와 뺨을 부드럽게 쓸고 지나갔다.
베란다 바닥에는 아내가 쓰다 버린 스티로폼 상자로 만든 작은 화분 서너 개가 조용히 자리 잡고 있었다.
그 안에는 초록빛 잎사귀를 꼿꼿이 세운 상추와 앙증맞은 방울토마토의 줄기가 튼실하게 자라나고 있었다.
철수는 낡은 플라스틱 분무기를 집어 들고 손잡이를 지그시 당겼다.
치이익-
미세한 안개 같은 물방울이 싱그러운 초록 잎사귀들 위에 골고루 내려앉았다.
달빛을 받아 반짝이는 물방울은 마치 영롱한 보석 가루를 뿌려놓은 것 마냥 아름다웠다.
휴대전화의 화면을 켜자, 2011년의 소박한 증권 계좌 화면이 환하게 떠올랐다.
평가 금액, 3,500만 원.
누군가의 눈에는 한없이 작고 초라해 보이는 푼돈에 불과할지도 몰랐다.
세상의 수많은 검객들은 이 작은 돈을 몇 배로 불리겠다고 눈에 불을 켜고 작전주와 위험천만한 레버리지의 파도 속으로 뛰어들었다가 하루아침에 나락으로 떨어지곤 했다.
하지만 철수는 달랐다.
"욕심을 부릴 이유가 없지."
철수는 혼잣말처럼 조용히 중얼거렸다.
미래를 알고 있다고 해서 억지로 주가를 조작하거나 허황된 테마주에 목을 매어 마음의 평정을 잃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것은 자본의 노예가 되는 길일 뿐이었다.
진정한 고수는 흐름을 거스르지 않는 법이다.
물이 자연스럽게 아래로 흐르고 계절이 바뀌면 어김없이 봄이 찾아오듯, 우직하고 단단하게 가장 확실한 글로벌 배당 인프라의 씨앗을 매달 조금씩 모아가면 그만이었다.
시간은 그 어떤 적도 이겨내는 가장 강력한 아군이자, 묵묵히 자산을 키워주는 자본주의 무림의 가장 위대한 스승이었다.
철수가 미소를 지으며 분무기를 내려놓고 허공을 올려다보았다.
어둠이 내려앉은 밤하늘 위로 맑고 은은한 달빛이 쏟아지고 있었다.
문득 140년의 세월 동안 가슴속을 떠돌던 구수한 믹스커피의 향기가 코끝을 스쳐 지나가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가상 세계와 현실의 경계가 무너지고, 수많은 세대의 사내가 거쳐간 《사억은퇴신공》의 마지막 장이 머릿속에서 부드럽게 펼쳐졌다.
'철수야, 참으로 잘 왔다.'
허공 어딘가에서 찌그러진 보온병 뚜껑을 든 백발의 노신선이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이 눈에 선했다.
철수는 그 허공을 향해 소리 없이 투명한 찻잔을 들어 올리는 제스처를 취했다.
강호는 내일도 어김없이 피비린내 나는 승진 전쟁과 주가 폭락의 소용돌이 속에서 아수라장이 될 것이다.
수많은 이들이 내일의 불안과 미래의 공포에 사로잡혀 밤잠을 설치고, 남들의 시선과 평가라는 칼바람에 피눈물을 흘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세상의 모든 이들이 그렇게 흔들릴지라도, 철수의 마당만큼은 그 어떤 폭풍우도 결코 침범할 수 없었다.
가장 낮은 곳의 소박한 일상을 지극히 사랑하고, 시간마저 자신의 편으로 끌어안은 자에게 세상의 풍파는 그저 스쳐 지나가는 바람에 불과했으니까.
"여보, 커피 다 탔어요. 나와서 마셔요."
거실 안쪽에서 정순의 다정하고 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래, 지금 나간다."
식탁 머리에 나란히 앉은 두 사람의 손끝으로 달달한 믹스커피의 온기가 부드럽게 스며들었다.
정순이 머그잔을 두 손으로 감싸 쥐며 호호 불었다.
"오늘 우리 남편, 회사에서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었어요? 얼굴에 아주 광이 나네."
"좋은 일이라기보다는…… 그냥 마음이 편해져서 그렇겠지."
철수는 잔을 입술에 대기 전, 아내의 눈망울을 가만히 응시했다.
앞으로 닥쳐올 수십 년의 세월 동안 이 작은 아파트에서 아이를 낳고, 키우고, 때로는 비좁은 생활고에 한숨을 짓기도 하겠지만, 그 모든 과정이 결국 하나의 거대한 축복이자 완벽한 순환의 일부임을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
불안에 떨며 허덕이던 과거의 서른 살이 아니라, 시간을 지배하는 절대고수의 눈으로 바라본 일상은 그 자체로 눈부신 신선경이었다.
"마음이 편해지긴, 매일 야근에 시달리면서. 나이 들어서도 계속 이렇게 살 수 있을지 난 가끔 무서워요."
정순이 살짝 입술을 내밀며 나지막이 속삭였다.
그 가벼운 걱정조차 철수에게는 너무나 사랑스럽고 귀여운 투정으로 다가왔다.
철수는 커피잔을 탁자에 내려놓고 아내의 부드러운 손을 따뜻하게 감싸 쥐었다.
"걱정 마라, 정순아. 앞으로 세상이 아무리 흔들리고 칼바람이 불어도, 내가 네 발밑의 땅을 가장 단단한 바위처럼 튼튼하게 다져놓을 테니까."
"갑자기 왜 그래요, 오글거리게."
정순의 뺨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하지만 그녀의 손을 마주 잡은 철수의 손바닥에는 세상 그 어떤 방패보다 굳건하고 따스한 내공이 깃들어 있었다.
돈을 좇아 달릴 때는 보이지 않던 세상의 이치가, 비로소 제 자리를 찾은 밥 한 끼와 따뜻한 커피 한 잔 속에서 완벽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거실 벽에 걸린 낡은 벽시계의 초침이 묵묵히 틱, 틱, 소리를 내며 흘러갔다.
과거의 철수였다면 그 초침 소리가 목을 조르는 사형대의 시계처럼 느껴졌겠지만, 지금의 그에게 시간은 가장 충실하고 고마운 동반자에 불과했다.
창밖의 차가운 가을바람은 여전히 거리를 휩쓸고 있었지만, 이 작은 거실 안만큼은 그 어떤 외풍도 범접할 수 없는 영원한 영지였다.
철수는 베란다 창문을 살짝 닫고 거실의 따스한 노란 불빛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등 뒤로 펼쳐진 밤하늘은 그 어느 때보다 깊고 평화로웠다.
조급증과 공포를 완전히 떨쳐내고 가장 완벽한 일상 속에서 새롭게 피어난 은퇴 무림의 전설은, 오늘도 고요하고 묵묵하게 우리에게 가장 따스한 온기를 건네고 있었다.
다음 회차 예고: 제24화 「인공지능 마풍과 동일임금의 덫」에서 김철수의 은퇴 강호행이 이어집니다.
작품명: 《은퇴무림전》
현재 회차: 제23화
다음 회차 예고: 제24화 인공지능 마풍과 동일임금의 덫
연재 일정: 용용 시리즈 매일 연재
마지막 화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