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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과부채 · 28화목차

28장 빚과 빼앗음의 본질

챙강-!

백도현의 흑철대검과 독고룡의 대검이 부딪친 자리에 실로 거대한 충격파가 터져 나왔다. 사방으로 튄 내력의 파편들이 연무장의 돌바닥을 잘게 으깨버렸다. 화경(化境)의 경지에 오른 고수 두 사람의 격돌은 그 자체로 주변의 공기마저 진공상태로 만드는 위력을 뿜어냈다.

"크윽……!"

백도현의 얼굴이 미세하게 굳어졌다. 연이은 혈전과 청운문 전체를 보호하기 위해 진을 펼쳤던 탓에 그의 단전에도 이미 상당한 무리가 와 있었다.

반면, 독고룡은 흉포한 미소를 지으며 대검을 더욱 강하게 밀어붙였다.

"늙은이가 아주 발악을 하는구나! 삼류 문파의 장문인이란 작자가 이 정도 내력을 가질 줄이야. 하지만 흑련회의 대업을 막기엔 역부족이다!"

독고룡의 등 뒤로 시꺼먼 사파의 기운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랐다. 그 순간, 그의 뒤편 어둠 속에서 기괴한 은빛 가면을 쓴 자가 스르륵 걸어 나왔다. 탈명록의 집행자를 쓰러뜨렸음에도, 또 다른 가면의 사내가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가면의 사내가 품속에서 꺼내 든 장부는 칠흑 같은 빛을 내뿜고 있었다. 천명장부의 은백색 광채와는 정반대로, 주변의 빛을 모조리 빨아들이는 듯한 탁하고 불길한 색채였다.

"한소운. 네 놈이 내 부하의 목을 베고 인과의 흐름을 어지럽혔더군요."

가면의 사내가 낮고 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의 목소리에는 인간의 감정이 느껴지지 않았다. 오직 거대한 차가움만이 묻어날 뿐이었다.

소운은 이를 악물고 진무겸, 백서린과 함께 검을 고쳐 잡았다. 전신을 조여오는 부채 79의 고통이 역맥을 타고 뇌리를 두드렸지만, 여기서 밀리면 모든 것이 끝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네놈들의 그 장부는 남의 공덕을 빼앗아 힘을 불리는 짝퉁에 불과하다."

소운의 말에 가면의 사내가 피식 실소했다.

"짝퉁? 흐흐, 무지한 소리. 하늘에 진 빚을 갚기 위해 발버둥 치는 게 어리석다는 생각은 안 해봤나? 천명장부가 빚을 떠넘기는 족쇄라면, 이 탈명록은 강자의 권리로 남의 공덕을 수탈하는 해탈의 서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 누군가 빚을 지면, 누군가는 그것을 빼앗아 강해져야 하는 법이지."

말을 마친 가면의 사내가 탈명록을 허공에 펼쳐 들었다.

스으으-!

책장이 저절로 넘어가며 기괴한 흡입력이 발생했다. 그 순간, 청운문 제자들이 흘린 땀과 피, 그리고 문파가 쌓아온 미약한 공덕의 기운들이 사방에서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 경고! 적의 탈명록이 주변의 인과와 공덕을 강제로 수탈합니다. 】

【 보유 중인 공덕 27 중 일부가 유출됩니다! 】

【 현재 부채: 79 / 100 (안정성 흔들림) 】

"큭……!"

공덕이 빠져나가는 순간, 소운의 단전에 가해지는 압박이 견딜 수 없을 만큼 커졌다. 역맥의 힘으로 억누르고 있던 단전의 반발력이 폭발하려는 기미를 보였다.

진무겸과 백서린 역시 얼굴이 사색이 되어 비틀거렸다.

"소운아, 몸이…… 안 움직여!"

"이 자식, 내 안의 내력을 빨아들이고 있어!"

공동 장부로 묶여 있던 세 사람의 기운이 탈명록의 수탈 능력 앞에 동시에 흔들렸다. 흑련회와 탈명록이 손을 잡은 진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그들은 단순한 무력뿐만 아니라, 인간이 쌓아온 인과와 공덕의 흐름 그 자체를 약탈하여 자신들의 한계를 억지로 돌파하려 들었던 것이다.

독고룡이 호기를 놓치지 않고 대검을 내리쳤다.

"죽어라!"

"장문인!"

백도현이 독고룡의 검을 막아내려 했으나, 탈명록의 주술적 압박에 허를 찔려 주춤거리는 바람에 대검의 풍압이 그대로 소운 일행을 향해 내리꽂혔다.

쾅---!

연무장이 반으로 갈라지며 세 사람이 사방으로 튕겨 나갔다. 피를 토하며 바닥을 구르는 소운의 눈앞에 탈명록의 사내가 서늘한 눈빛으로 다가왔다.

"지독한 놈. 하지만 여기까지다. 20년 전의 역사대로, 이 문파는 오늘 밤 완전히 불타 없어질 것이다. 네가 아무리 발버둥 쳐도, 하늘은 너희에게 더 큰 빚을 청구할 뿐이야."

가면의 사내가 손을 들어 올리자, 허공에 떠 있던 탈명록에서 시커먼 검강의 파도가 응축되었다. 그것은 인간의 경지를 넘어선, 시스템의 힘을 빌린 강제적인 죽음의 선고였다.

소운은 바닥에 처박힌 채 멍하게 위를 올려다보았다.

몸은 움직이지 않고, 경맥은 터져 나갔으며, 공덕은 빼앗겼다. 부채는 80을 넘어 90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정말 끝이었다. 회귀 전 20년 동안 겪었던 그 절망적인 멸문의 밤이 고스란히 재현되는 듯했다.

‘내가 바꾼 미래는 결국 이 지독한 인과의 장부에 잡아먹히는 것인가……?’

머릿속이 하얗게 비어가는 그 순간, 품속에서 뜨거운 온기가 느껴졌다.

그것은 천명장부의 페이지가 스스로 타오르는 듯한 열기였다. 장부의 표면에 새겨진 문구들이 바람에 날리듯 선명하게 떠올랐다.

【 하늘에 진 빚은 이자를 붙여 청구된다. 】

【 하지만…… 혼자서 갚는 법은 없다. 】

소운의 눈동자가 번뜩였다.

그렇다. 천명장부는 혼자서 짊어지는 짐이 아니었다. 빚을 나눈다는 것, 그것은 혼자서 망가지는 대신 함께 버텨낸다는 뜻이었다.

"……착각하지 마라."

소운이 피투성이가 된 얼굴로 천천히 상체를 일으켰다. 그의 입가에서 흘러내린 피가 땅바닥을 적셨지만, 눈빛만큼은 그 어떤 고수보다도 매섭게 빛나고 있었다.

"네 놈들이 말하는 수탈은 강자의 오만일 뿐이다. 빚은 남에게 빼앗는 게 아니라…… 내 힘으로 바로잡는 것이다!"

쿠르릉-!

소운의 외침과 동시에, 그의 단전에 억지로 쑤셔 넣었던 역맥의 기운들이 완전히 뒤집히며 폭발했다. 사맥체가 변질된 역맥이 비명을 지르며 모든 경맥을 강제로 개방했다.

부채 79. 그 엄청난 부하를 소운은 도망치지 않고 온몸으로 받아내었다.

【 인과 부채의 한계를 돌파합니다! 】

【 공동 장부의 동기화율이 100%에 도달합니다! 】

【 잠시 동안, 모든 부채와 공덕의 제약이 해제됩니다. 】

탁! 탁!

먼저 쓰러져 있던 진무겸과 백서린의 몸에서도 은백색의 빛이 동시에 터져 나왔다. 그들은 소운의 의지를 공유하며 악물었던 이를 풀고 일어섰다. 세 사람의 기운이 하나로 융합되어 허공을 찌르는 거대한 검강의 기둥을 만들어냈다.

"무겸아, 서린아!"

"마음대로 해라, 소운아. 이번엔 같이 갚아줄 테니까!"

"청운문의 검은 꺾이지 않아!"

세 사람이 동시에 검을 뽑아 들고 땅을 박찼다.

역맥검강(逆脈劍綱) — 합일(合一).

푸아아아-!

세 사람의 검강이 하나로 합쳐져 허공을 가르는 순간, 탈명록의 사내가 내뿜던 시커먼 수탈의 파도가 거짓말처럼 산산조각 났다. 가면의 사내가 경악으로 눈을 크게 뜨며 물러서려 했다.

"이게…… 어떻게 가능해?! 인과의 흐름을 이렇게 역으로 이용하다니……!"

"네 놈들의 장부는 남의 것을 훔치는 도둑놈의 장부일 뿐이지만, 우리의 장부는 우리가 직접 짊어진 인과다. 그 무게가 다를 수밖에 없지."

소운의 검이 가면의 사내의 정중앙을 향해 내리꽂혔다.

콰아아앙-!

거대한 폭음과 함께 탈명록의 사내가 비명을 지르며 뒤로 날아갔다. 그가 들고 있던 탈명록은 산산이 부서지며 검은 종잇조각처럼 흩어져 사라졌다.

독고룡이 경악 어린 눈으로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이럴 수가…… 대사급 고수의 기술을 삼류 문파의 애들이……!"

"끝내자."

백도현이 그 틈을 놓치지 않고 흑철대검을 단숨에 치켜들었다. 장문인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온 묵직한 검강이 독고룡의 대검을 정면으로 가격했다.

파지직-!

독고룡의 대검에 금이 가더니 이내 산산조각이 났다. 독고룡의 가슴팍에 백도현의 검끝이 깊숙이 박혀들었다.

"크하…… 흑련회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독고룡이 피를 토하며 거꾸로 고꾸라졌다.

지부장마저 쓰러지자, 산세를 타고 밀려들던 흑련회 잔류 살수들과 혈월교의 선봉대들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혼비백산하여 도망치기 시작했다. 하룻밤 사이 산서성을 피로 물들일 것 같았던 멸문의 위기가, 마침내 한소운과 청운문 제자들의 손에 의해 완전히 뒤집히는 순간이었다.

고요한 적막이 청운문 연무장을 채웠다.

소운은 손에 쥐었던 검을 바닥에 툭 떨어뜨리며 그대로 주저앉았다. 전신의 경맥이 타오르는 듯한 고통이 밀려왔지만, 눈앞에 떠오른 천명장부의 글귀는 이전과 다른 빛을 띠고 있었다.

【 청구 완수: 탈명록 세력의 간섭 저지 및 지부장 처단. 】

【 공덕 +40 획득. 】

【 인과 부채가 대폭 청산됩니다. 】

【 현재 부채: 34 / 100 】

부채가 34로 급격히 떨어졌다. 공동 장부를 통해 분산되었던 부담도 한결 가벼워졌다.

소운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구름이 걷히고 새벽의 푸른 여명이 산서성의 능선을 따라 서서히 밝아오고 있었다.

5년 뒤의 멸문이라는 정해진 운명. 그 거대한 빚을 상대로 소운은 비로소 첫 번째 승리를 거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끝이 아니었다. 서역의 혈월교 본대와, 탈명록의 배후에 도사린 진짜 적들은 아직 움직이지 않았다.

진무겸과 백서린이 피투성이가 된 채 소운의 곁으로 다가와 나란히 주저앉았다. 세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며 지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살았다……."

"그래, 겨우 시작일 뿐이지만."

소운은 품속에서 은은하게 빛나는 천명장부를 조용히 품에 갈무리했다.

하늘에 진 빚은 앞으로도 계속 쌓일 것이다. 하지만 이제 소운은 혼자가 아니었다. 빚을 함께 짊어질 동료들이 있었고, 그 빚을 검으로 갚아나갈 힘이 있었다.

새로운 강호의 바람이 청운문의 무너진 대문 사이로 불어오고 있었다.

바람은 차가웠으나, 새벽의 여명은 눈이이실 만큼 찬란했다.

무너진 대청마루와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연무장은 하룻밤 사이 치른 사투의 참혹함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었지만, 그 속에 선 청운문의 제자들의 눈빛은 그 어느 때보다 단단했다.

백도현은 칼을 거두며 깊은 숨을 내쉬었다. 그의 거친 호흡 속에는 긴장이 풀린 안도감과 함께, 제자들이 해낸 일에 대한 묵직한 대견함이 묻어났다.

"고생했다, 너희들."

장문인의 낮고 묵직한 음성이 연무장에 울려 퍼졌다.

진무겸은 흙투성이가 된 검을 바닥에 짚으며 쓴웃음을 지었다.

"대사형 체면이 말이 아닙니다, 장문인. 저 녀석들한테 다 빼앗길 뻔했으니원."

"말은 바로 해라, 대사형. 네가 제일 먼저 나자빠졌잖아."

백서린이 퉁명스럽게 받아치면서도, 주저앉아 있는 소운의 어깨를 조용히 부축해 일으켜 세웠다. 세 사람의 어깨가 가볍게 부딪쳤다. 공동 장부로 묶인 인과의 실타래가 여전히 미세하게 진동하며 서로의 체온과 내력을 나누고 있었다.

소운은 비틀거리는 다리를 지탱하며 멀리 산서성의 능선을 바라보았다.

하늘은 맑아지고 있었지만, 강호 전체를 뒤덮은 어둠은 아직 완전히 걷히지 않았다. 탈명록의 사내가 남기고 간 마지막 말, 그리고 서역의 혈월교 본대가 도사리고 있는 진짜 위협은 앞으로 이들이 마주해야 할 더 큰 빚이었다.

하지만 소운은 두렵지 않았다.

【 현재 부채: 34 / 100 】

【 공동 장부의 동기화 상태가 안정화됩니다. 】

【 다음 청구까지 남은 시간: 180일. 】

장부의 숫자는 줄어들었고, 남은 시간은 늘어났다. 그것은 과거의 역사가 완전히 비틀어졌으며, 미래가 그들의 손에 의해 새로 쓰여지고 있다는 명백한 증거였다.

소운은 품속의 장부를 단단히 움켜쥐며 속으로 다짐했다.

‘빚을 졌으면 갚으면 된다. 혼자가 아니라, 이들과 함께.’

"일어나자."

소운의 나지막한 목소리에 무겸과 서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청운문의 제자들이 부서진 문루를 정비하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붉은 피가 말라붙은 대지 위로, 새로운 태양이 뜨겁게 떠오르고 있었다.

잡역부였던 소년은 이제 빚을 짊어진 회귀자로서, 동료들과 함께 강호라는 거대한 바다를 향해 첫걸음을 내디디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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