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8화 잔재의 흡수와 진무극의 음모
에테르나의 심장부가 붕괴하는 소리는 마치 거대한 짐승이 최후의 숨을 몰아쉬는 비명과 같았다. 파편화된 금속 조각들과 튀어 오르는 플라즈마 불꽃 사이로, 강진혁은 무심한 눈으로 바닥에 처박힌 백무현을 내려다보았다.
한때 신서울의 ‘통곡의 벽’이라 불렸던 사내. 티타늄 그룹의 블랙 가드 총사령관이자 진무극의 충실한 사냥개였던 백무현의 육체는 이제 반쯤 녹아내린 고철 덩어리에 불과했다.
"끝이다."
진혁의 건조한 목소리가 공간을 갈랐다. 그는 망설임 없이 백무현의 가슴팍, 생체 코어가 박혀 있던 심장부로 손을 뻗었다.
지이이잉-
손바닥에서 뿜어져 나온 칠흑 같은 마기가 백무현의 잔해를 휘감았다. [흡원천공]. 1,000년 전 천마의 비급과 현대의 군사 나노머신이 융합된 금단의 술법이 그 기괴한 힘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경고: 고출력 마공-기계 혼종 코어, 강제 추출을 시작합니다.]
[데이터 동기화율 34%… 67%… 92%… 흡수 완료.]
백무현의 몸속에 남아 있던 잔류 에너지와 최첨단 전술 연산 데이터가 진혁의 혈관을 타고 역류했다. 그와 동시에 뇌리에 격렬한 섬광이 일었다. 단순한 에너지의 이동이 아니었다. 백무현이라는 인간이 평생을 바쳐 쌓아온 기억의 파편들이, 마치 썩은 물처럼 진혁의 의식 속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이건.'
진혁의 눈동자가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기억의 끝자락에서 본 것은 백무현의 시선이 아니었다. 그 기억의 주인은 진무극이었다.
- "실험체 07호, 강진혁. 그놈의 마기 수용량은 마침내 임계점에 도달했다. 1,000년 전 천마가 넘지 못한 ‘육체의 한계’를, 이 나노 기술이 완벽하게 보완하고 있지."
진무극의 서늘한 목소리가 환청처럼 귓가를 울렸다. 진혁은 입술을 깨물었다. 자신이 그저 복수를 위해 달려왔던 모든 과정, 시스템의 보조를 받으며 강해졌다고 믿었던 그 시간조차도, 사실은 진무극이 설계한 거대한 배양 과정에 불과했다는 사실이 명백해졌다.
'그릇.'
진무극은 자신을 죽이려 했던 게 아니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죽여서는 안 되었다. 진혁이 스스로 고통을 겪고, 무공을 깨닫고, 시스템을 돌파하며 진화할수록, 그 육체는 더욱 견고하고 완벽한 '천마의 그릇'으로 다듬어지고 있었다.
[SYSTEM INFO: 메모리 파편 분석 완료.]
[데이터 층위: 0.01% - 진무극의 기밀 회의 로그 추출.]
진혁의 시야 상단에 붉은색 로그가 점멸했다.
[진무극: "강진혁이 도달할 경지는 마신경(魔神境)이다. 그가 스스로 시스템을 걷어차고, 마기를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혈관에 새기는 순간, 나는 그 육체의 제어권을 회수한다. 그것이야말로 천마의 강림이다."]
"하."
진혁의 입에서 짧은 냉소가 터져 나왔다. 오만함이 극에 달한 자의 발상이었다. 자신을 하나의 도구, 혹은 자신의 영혼을 갈아 끼울 장갑차 정도로 생각했다는 것인가. 진혁은 꽉 쥔 주먹에 힘을 주었다. 마기가 뼈마디를 타고 흘러나와 검게 타올랐다.
백무현의 데이터를 완전히 소화하며 진혁의 코어 출력은 눈에 띄게 상승했다.
[생체 코어 출력: 12,000 MW 돌파.]
[경지: 마신경(魔神境) - 안정화 단계.]
몸 안에서 들끓는 힘은 이제 통제할 필요가 없었다. 그것은 이미 진혁의 혈액이자, 근육이며, 의지 그 자체가 되어 있었다. 시스템의 도움 없이도 스스로 운기조식하는 감각이 전신을 지배했다.
"네가 짜놓은 설계도라고 했나."
진혁은 타워의 천장을 뚫고 비치는 인공 행성의 차가운 달빛을 올려다보았다.
"내가 그 설계도를 찢고, 네 그릇까지 박살 내주지."
그는 발을 굴렀다.
콰아앙-!
에테르나의 지반이 진혁의 발밑에서부터 방사형으로 갈라졌다. 중심부를 타격한 마기는 파괴적인 파동을 일으키며 행성 전체의 에너지를 뒤흔들었다. 백무현을 통해 흡수한 최첨단 전술 데이터는 이제 진혁의 무공과 융합되어, 적의 회로를 역으로 붕괴시키는 파멸적인 도구로 재탄생했다.
타워 내부의 보안 시스템이 비명을 지르며 경고음을 울렸다. 하지만 진혁에게는 그것이 마치 축제 종료를 알리는 장례 음악처럼 들렸다.
"아영아."
통신 장치를 켜지도 않았으나, 진혁은 허공에 대고 나지막이 읊조렸다.
"티타늄 그룹의 메인 서버, 그리고 진무극이 숨겨둔 백업 데이터베이스. 전부 좌표 고정해. 남길 필요 없다. 단 하나도."
통신 너머로 윤아영의 떨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 진혁아, 지금 네 주변의 에너지 흐름이… 이건 사람이 낼 수 있는 출력이 아니야!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그저, 원래 주인에게 물건을 돌려주러 가는 것뿐이다."
진혁은 검을 뽑아 들었다. 검신을 따라 흐르는 마기가 주위의 공간을 굴절시켰다.
'완성된 그릇인가.'
그는 스스로를 향해 비릿하게 웃었다. 진무극이 그토록 원했던 그릇이 완성되었다면, 그 그릇을 깨뜨리는 것 또한 그릇의 주인인 자신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에테르나의 심장부가 마침내 폭발했다. 행성의 중심에서부터 솟구쳐 오르는 푸른 플라즈마 화염이 타워의 기둥들을 삼키기 시작했다. 진혁은 그 화염의 폭풍 속을 거침없이 걸어 나갔다. 등 뒤로 무너지는 인공 행성의 잔해는 그가 지나온 길에 대한 훈장과도 같았다.
이제 남은 것은 단 하나. 신서울의 정점, 진무극의 왕좌가 있는 곳으로 돌아가 그 오만한 창조주의 목을 치는 것뿐이다.
그때였다. 진혁의 시야 끝에서, 시스템의 로그가 아닌, 진무극이 숨겨두었던 최후의 비상 프로토콜이 강제로 활성화되었다.
[Warning: 창조주 인증 코드 입력.]
[프로토콜 ‘천마의 귀환’ - 강제 실행.]
진혁의 심장이 비정상적으로 요동쳤다.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마치 다른 누군가의 것이었던 것처럼 묵직하고 거대한 기운이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그것은 진혁의 내공이 아니었다. 진무극이 강진혁이라는 그릇 속에 미리 심어두었던, 1,000년 전 천마의 '진짜 의념'이었다.
"……역시, 쉽게 끝날 리가 없지."
진혁의 눈동자가 칠흑에서 붉은빛으로 물들었다.
몸 안에서 시작된 투쟁. 자신의 의지와 1,000년 전 천마의 의지가 한 몸 안에서 격돌하기 시작했다. 진무극은 강진혁이 스스로 강해지길 기다린 것이 아니라, 강해진 뒤에 그 몸을 천마의 영혼이 차지하게끔 만들었던 것이다.
[경고: 육체 소유권 쟁탈전이 시작됩니다.]
[마신경의 의지가 육체를 거부합니다.]
진혁은 비틀거리면서도 멈추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단전을 향해 검지를 찔러 넣었다. 자신의 기운을 스스로 찢어발기는 자해적 운기. 하지만 그것만이 이 지독한 운명의 굴레를 끊어낼 유일한 방법이었다.
"내 몸이다. 내 무공이고. 내 삶이다."
그는 피를 토하며 낮게 뇌까렸다.
"천마가 누구든, 창조주가 누구든…… 감히 내 안에 깃들려 하지 마라. 전부 씹어 삼켜주마."
진혁의 기세가 다시금 폭발했다. 행성의 붕괴를 넘어, 차원의 벽을 뒤흔드는 마기가 솟구쳤다.
진무극의 음모가 완성되기 직전, 진혁은 스스로를 파괴함으로써 다시 태어나는 길을 택했다. 제네시스로 향하는 길, 그 끝에는 이제 피비린내 나는 숙청만이 기다리고 있었다.
피를 토하며 흩뿌린 혈흔이 공중에 떠올라 검은 안개처럼 흩어졌다. 하지만 진혁은 그 고통을 비웃듯, 오히려 마기를 더욱 거칠게 몰아붙였다. 단전 내부에서 꿈틀거리는 이질적인 의념, 즉 1,000년 전 천마의 잔영은 진혁의 신경계를 잠식하려 들고 있었다.
[Warning: 이질적인 의식 데이터가 신경 회로를 재구성 중입니다.]
[경고: 강제 동기화 60% 달성. 의식 주도권이 전이됩니다.]
"하찮은 찌꺼기 주제에."
진혁은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그는 시스템의 HUD가 보여주는 경고문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튕겨 지워버렸다. 1,000년 전의 천마? 그가 아무리 위대했어도, 지금은 그저 낡아빠진 데이터의 편린에 불과했다. 진혁은 흡원천공을 자신의 내면으로 역류시켰다. 밖으로 향해야 할 마기를 안으로 옥죄어, 침입자를 사냥하는 덫으로 만든 것이다.
콰득, 콰드득.
뼈가 맞물리는 소리가 진혁의 몸 안에서 울렸다. 천마의 잔영이 비명을 지르며 흩어지려 했으나, 진혁의 마기는 그것을 끈질기게 낚아챘다.
'내 안에서 천마의 기운을 느꼈다고 했나? 그렇다면 그 기운마저 내 마공의 자양분으로 삼아주지.'
진혁은 눈을 감고, 자신의 단전 속에서 맹렬하게 소용돌이치는 기운들을 하나로 뭉쳤다. 이것은 단순한 흡수가 아니었다. 고대의 유산과 현대의 나노 공학, 그리고 진혁이라는 인간이 쌓아온 독자적인 무도가 한데 섞여, 완전히 새로운 차원의 경지로 승화되는 과정이었다.
[경지: 마신경(魔神境) - ‘진천(眞天)’ 단계로 진입.]
[신천마신공(新天魔神功)의 근간이 확립되었습니다.]
순간, 진혁의 몸을 감싸던 붉은 기운이 칠흑보다 깊은 어둠으로 변했다. 그것은 빛조차 빨아들이는 절대적인 공허였다. 에테르나의 심장부가 붕괴하며 뿜어내던 플라즈마 파도가 진혁의 몸에 닿는 순간, 소리 없이 소멸했다.
"이제 알겠군."
진혁이 눈을 떴다. 그의 눈동자 속에는 은하계가 소멸하는 듯한 허무와, 만물을 지배하는 군주의 위압감이 공존하고 있었다.
진무극은 착각했다. 진혁이라는 그릇을 완벽하게 빚어내면, 그 안에 담긴 내용물을 교체할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하지만 진무극은 간과했다. 강진혁이라는 그릇은 애초에 무엇인가를 담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릇 자체가 강철보다 단단한 무기가 되어, 진무극의 손을 잘라버릴 준비를 마쳤다는 것을.
진혁은 발밑의 붕괴하는 에테르나를 뒤로하고, 차원의 벽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한 걸음마다 공간이 일그러지고, 지반이 통째로 으스러졌다.
- 진혁아! 거기서 나와! 차원 좌표가 요동치고 있어!
윤아영의 다급한 목소리가 통신 너머로 들려왔다. 에테르나의 붕괴 여파가 신서울까지 영향을 미치기 시작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진혁은 대답 대신 검을 고쳐 잡았다. 검신에 새겨진 나노 회로가 붉게 달아오르며, 진무극의 비상 프로토콜을 모조리 태워버리고 있었다.
"아영아, 신서울의 하늘을 봐라."
"뭐? 갑자기 그게 무슨…?"
"진무극의 왕좌가 있는 곳, 그 위로 내가 올라갈 길을 만들 테니까."
진혁은 검을 허공에 휘둘렀다.
치이익—!
단순한 검격이 아니었다. 공간 그 자체를 가르는 절단면이 십(十)자로 교차했다. 그 틈새로 보이는 것은 신서울의 야경이 아니었다. 차원 너머, 진무극이 숨어 있는 ‘제네시스’의 전경이었다. 금빛으로 찬란하게 빛나는 그곳은, 썩어 문드러진 신서울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만큼 고고한 아우라를 뿜어내고 있었다.
"드디어 찾았군."
진혁의 입가에 서늘한 살기가 피어올랐다. 그는 망설임 없이, 찢어진 차원의 틈새로 몸을 던졌다.
쿠구구구!
차원을 넘어가는 통로 속에서 수많은 관리자의 환영이 나타나 진혁을 가로막았다. 시스템이 만들어낸 인공 신(神)들이었다. 그들은 진혁의 존재를 ‘오류’로 규정하고, 무수한 마력 탄환을 쏟아부었다. 하지만 진혁은 그 모든 공격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받아냈다.
[만법귀마(萬法歸魔): 역환원.]
진혁이 손을 가볍게 휘젓자, 쏟아지던 마력 탄환들이 궤적을 비틀며 관리자들의 가슴으로 향했다.
콰앙! 콰아앙!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사멸하는 인공 신들. 진혁은 그들의 파편을 밟고 지나가며, 제네시스의 정점에 도달했다.
그곳에는 고고한 백발의 사내, 진무극이 앉아 있었다. 그는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는 듯,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진혁을 맞이했다.
"기다렸다, 07호."
"07호라."
진혁은 검 끝을 진무극의 미간에 겨누었다.
"그 이름은 이미 폐기했다. 지금 네 앞에 있는 건, 네가 만든 그릇이 아니라, 네 왕좌를 부수러 온 천마(天魔)다."
진무극의 눈빛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진혁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은, 자신이 상상했던 그 어떤 데이터값보다도 압도적이었다. 이것은 계산 불가능한 영역이었다. 진무극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며, 뒤편의 거대한 ‘중앙 제어 장치’를 손으로 가리켰다.
"보아라. 네가 이 세상을 구원하겠다고 몸부림쳤던 모든 결과가 여기에 있다. 네가 베어버린 수많은 적들, 네가 지켰던 슬럼가의 시민들… 그 모든 것이 이 데이터의 일부일 뿐이다."
진무극은 광기 어린 눈으로 진혁을 응시했다.
"무의미하다, 강진혁. 네가 아무리 발버둥 쳐도, 너는 내 손안에서 춤추는 광대에 불과해."
"춤은 너희가 추게 될 거다."
진혁은 검을 들어 올렸다.
"네 놈의 목이 바닥을 구르는 그 순간까지."
진혁의 뒤로 거대한 천마의 형상이 떠올랐다. 1,000년 전의 그 천마가 아니었다. 진혁 자신이 완성한, 현대 군사 기술과 마공의 정점이자 끝인 ‘신천마’의 형상이었다. 그 거대한 존재감이 제네시스의 황금빛 궁전을 압도했다.
진무극은 비로소 깨달았다. 자신의 설계가 완전히 빗나갔음을. 진혁은 길들여진 사냥개가 아니라, 주인을 잡아먹기 위해 이빨을 기른 괴물이었다.
"자, 이제 쇼를 끝내자."
진혁의 검이 내려가기 시작했다. 제네시스의 하늘이 찢어지고, 대지가 울부짖었다. 신서울의 운명과, 이 세계의 흑막을 결정지을 최후의 일격이 시작되려는 찰나였다.
그때, 제네시스 중앙 제어 장치에서 붉은빛이 강렬하게 점멸했다.
[Warning: 창조주 시스템, 2단계 봉인 해제.]
[현실 재구성 프로그램을 가동합니다.]
진무극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그조차 예상하지 못한 변수였다. 제어 장치로부터 뿜어져 나온 빛이 진혁과 진무극을 동시에 휘감았다. 두 사람의 발밑으로 거대한 마법진이 펼쳐지며, 차원 너머의 무언가가 소환되기 시작했다.
"이건…! 닥터 헬만이 죽기 전에 심어둔 자폭 코드였나!"
진무극이 비명을 질렀으나 이미 늦었다. 차원의 문이 열리며, 진혁이 그토록 쫓던 ‘심연의 주인들’의 실체가 드러나려 하고 있었다. 진혁은 검을 휘두르려던 동작을 멈추고, 눈앞의 거대한 문을 응시했다.
"설계자들인가."
진혁의 눈빛이 차갑게 빛났다. 진무극을 죽이는 것보다 더 거대한 적, 이 모든 지옥도를 설계한 진짜 주인들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진혁은 오히려 입꼬리를 올렸다.
"잘 됐다. 너희를 죽이면, 이 지긋지긋한 프로토콜도 완전히 끝나겠지."
진혁의 검 끝에서 뿜어져 나오는 마기가 공간을 하얗게 불태우기 시작했다. 창조주들의 왕좌를 향한 진혁의 숙청이, 이제 진정한 막을 올리고 있었다.
과연 진혁은 이 차원 너머의 신들을 상대로 어떤 답을 내놓을 것인가. 거대한 빛의 기둥 속에서 진혁의 검은 더욱 서늘하게 빛나고 있었다.